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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리뷰] 쿰댄스컴퍼니의 묵간, 스물두 번째 정기공연…역사의 숲에서 캐낸 의지적 안무작 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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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리뷰] 쿰댄스컴퍼니의 묵간, 스물두 번째 정기공연…역사의 숲에서 캐낸 의지적 안무작 세 편

공주희 안무의 '이름에게'.이미지 확대보기
공주희 안무의 '이름에게'.
쿰댄스컴퍼니(예술감독 한양대무용과 김운미교수, 대표 서연수)의 ‘묵간’은 해마다 쉬임이 없다. 나이테가 선명하게 들어선 스물두 번째 공연은 세월을 음미하게 하고, 한양대 무용과 주축의 안무가, 출연자, 스태프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한국무용 창작공연으로 자리 잡았다. ‘묵간’은 유난히도 배달겨레의 역사가 떠오르는 달에 공연이 시작된다.

배달겨레의 역사를 끼고 주제를 잡아 무대화하는 것은 무용가들의 당연한 책무이며, 권장할 일이다. 코로나 사태를 맞은 금년 경자년에는 7월 16일(목) 늦은 일곱 시, 포이동 M극장에서 소수의 관객만을 대상으로 세 여성 안무가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전문가 정신이 없이는 견디기 힘든 무관중 공연은 분위기 침체와 무제(無題, Untitled)작 해석만큼 힘든 공연이었다.
공주희 안무의 '이름에게'.이미지 확대보기
공주희 안무의 '이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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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희 안무의 '이름에게'.

공주희 안무의 <이름에게>, 이 세상 누구에게나 있는 이름, 김춘수의 ‘꽃’이 떠오른다. 징소리가 조절해내는 장(場)은 무명을 밝히며 다양한 상징을 담는다. 민족과 문화에 걸쳐있는 각자의 이름이 모여 이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만개를 향해 시동을 걸어 꽃을 피우고, 실핏줄로 번진 세포는 뿌리에서 번진 가지와 열매를 찾아간다. 그리해 이름을 불러 주고자 한다.

산다화 붉은 것이 이름을 가졌을 때 혁명 같은 광복이 눈앞에 서 있었다. 안무가가 은근과 끈기로 역사를 이어 왔음을 강조하는 춤은 호흡과 움직임의 균형을 보이면서 이름의 의미와 소통의 춤을 세묘해낸다. 반복적 리듬에 실은 네 사람의 무용수들은 도입부의 신비함을 잇기에 적절한 양태를 구사한다. 절제된 반복적 동작은 지속적으로 이미지화 된다.

젊은이의 삶 속에도 환절기라는 미명으로 일렁이는 시간이 찾아온다. 위선과 가식을 털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면 세상은 편안해지고 담백해진다. 시간 속에 삶의 균형을 찾아가면, 다리에는 꽃다발이 걸리고 흑백의 조화가 만물을 성숙시킨다. 그날의 ‘내’가 있어서 ‘내’가 아는 ‘나’와, ‘내’가 바라는 ‘나’가 조금씩 닮아간다. 조형 속의 인물이 이름을 얻으면 장(場)은 밝음을 물린다. (출연자/ 지하은, 성혜경, 이수빈, 공주희)

진 솔 안무의 '소녀 학순'.이미지 확대보기
진 솔 안무의 '소녀 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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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솔 안무의 '소녀 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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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솔 안무의 '소녀 학순'.

진 솔 안무의 <소녀 학순>, 진 솔은 독립군을 아버지로 둔 만주 지린 출신의 소녀 김학순(金學順)이 열일곱 살에 일본군에 끌려간 ‘성노예’ 관련 증언을 기억해내고 무대화한다. 광복 46주년을 하루 앞둔 1991년 8월 14일, 국내 거주자 최초의 일본군 성 만행 고발은 국내외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997년 12월 16일 여성운동가 김학순이 소천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민족의 아픔을 개인적 한을 넘어 역사적 교훈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여인'이라고 추모했다.

안무가는 이날의 어둠 속 육성 사용과 침묵의 씬을 배치하는 등 극성을 강화한다. 수치심으로 용기가 없었던 할머니 김학순은 일흔이 지나서야 입을 뗀다. 그 시절의 만행을 담은 육성과 오랏줄이 등장하고, 공포와 불안감을 고스란히 안은 소녀들은 고무신을 안거나, 의자 위에 앉아 있거나, 긴장감에 쌓여있다. 사실에 집중한 진 솔의 안무 스타일은 진지함으로 무장 되어 있지만, 수맥이 통하는 듯한 유연성으로 슬픔을 배가시키는 방법이 첨가되었어야 했다.

안무가 진 솔은 이름도 없이 낡고 여윈 그림자로 존재했던 어두운 방의 소녀, 김학순을 비롯한 이 땅의 별이 된 한반도의 소녀들을 잊지 말 것을 주문한다. 춤은 근대적 모습을 수용, ‘아리랑’과 ‘고무신’을 상징적 도구의 일부로 사용하고, 맨발로 설 수 밖에 없었던 아쉬움을 울음에 섞는다. 장을 닫으면서 암전 속에 김학순 할머니의 육성은 다시 반복된다. (출연자, 강하라, 김비안, 진 솔)

정하연 안무의 '유사중독'.이미지 확대보기
정하연 안무의 '유사중독'.

정하연 안무의 '유사중독'.이미지 확대보기
정하연 안무의 '유사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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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연 안무의 '유사중독'.

정하연 안무의 <유사 중독>, 구음이 앞서간다. 집중과 선택 사이, 충실하면 사고는 굳어버린다. 아니, 전통을 쌓아가는 필수 조건이다. 세월이 흘러가며 한 시절 화사 보다는 이어 온 전통이 소중함을 깨닫는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수많은 것들이 나와 공존하며 흘러갔고 흐르는 모래 속에서 뒤척였다.” 분할된 장면 위로 세련된 전통의 모습들이 굴러간다. “모든 뒤척임과 함께 빨려 들어가는 그것은 생각보다 평화로운 자극이었고 중독이었다.“

역사의 순응자인 안무가는 같은 세계와 시간 속에서 연속적 자극에 중독된 인간군에 대한 의구심을 갖는다. 개개인 소유의 자각적 부호 아래 타인과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자신과 융합체의 모습은 모래시계 속 모래알들과 같다는 결론에 이른다. 전통의 보존과 변주, 벗어나거나 분리될 수 없는 운명은 행복과 불행의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지나친 진지함에 대한 어린이다운 복수는 유머가 아닐까? 끝을 알면서도 빨려 들어가다 보면 탈출 시점이 생긴다.

정신의 지배수단은 질서의 전달이다. 사리에 합당한 합사성은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중독으로 이름한 것에 빠지지 말라는 경계이다. 예술은 정도행에 점수를 주지 않는다. 사회는 비틀어지고, 비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한 가식적 칭송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유사 중독>은 독소를 안고 있는 인간 세상에 대한 경건한 교훈이자 궤도를 이탈하고자 하는 심리적 강박을 경계하고자 하는 안무자의 욕망 같은 현실을 읽어내는 유리판이다. (출연자, 강소연, 전미라, 이수현, 정하연)

쿰댄스컴퍼니의 묵간, 스물두 번째 정기공연 세 편은 역사성을 주축으로 궤도와 틀 안에 안주하지 않고, 창의적 사고방식으로 현실과 현실 이면의 아픔들을 이미지화 시킨다. 잊혀질뻔한 역사적 사실과 현상학적 주제에 대한 해석은 미완의 발전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자신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세 명의 안무가는 상태적(常態的) 질서를 구사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막은 묵간의 고정 관객들을 춤이 감싼 공연은 그래서 더욱 값진 공연이 되었다.


장석용 글로벌이코노믹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