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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칼럼] K-윤리와 K-의료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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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칼럼] K-윤리와 K-의료윤리

김석신 가톨릭대 명예교수
김석신 가톨릭대 명예교수
최근 두 번의 태풍에 경남과 부산 지역, 그리고 울산, 강릉 등 동해안의 피해가 컸다. 여전히 사람들은 ‘코로나 방역 2.0’ 상태에서 힘겹게 살고 있다. 하필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공공의료 인력증원을 내세운 정부의 발표가 의사들의 가슴에 분노의 불을 붙였다.

의사들은 집단으로 파업을 했고, 하필이면(직접적인 관련성은 멀다 하더라도) 파업 중에 2명의 응급환자가 죽었다. 세계적으로 의사들의 파업 사례는 적지 않은데, 파업할 때 적어도 응급실과 중환자실은 유지한다고 하며, 지난 2000년 우리나라에서 의약분업으로 의사들이 파업할 때도 응급실과 중환자실은 지켰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한 방역 한계상황에서 일어난 이번 파업의 경우, 응급환자를 받아줄 응급실이 없어 생명을 잃었다는 것은 그동안의 파업에서 지켜왔던 ‘선’을 지키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의대생들이 의사국가시험마저 보이콧 하는 걸 보면 의사 증원에 따른 피해의식이 엄청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 되기를 포기한다.” 엄포를 놓는 것은 의대생만의 특혜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여 씁쓸하다. 이번 의사 증원에 가장 예민한 순서가 의대생, 전공의, 전임의라고 짐작해 보면, 불리해질 파이 분배와 예상되는 소득 감소가 중요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은 사실일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이익’을 추구하고, 보호하고, 유지하기를 원하며, 또 그럴 권리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의사들의 자기이익을 위한 파업도 법적 권리로서 인정되어야 할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의사 파업이 있었기 때문에 집단의 관행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다. 만일 의사국가시험 관련 문제로 2차 파업이 일어난다고 해도, 국민들은 의례적 관행처럼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환자들도 싫지만 불편을 감수할는지도 모른다. 파업이 길어질수록 파업의 효과는 감소하고 파업의 출구를 찾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어쨌든 파업 중에 환자들의 생명 상실과 같은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또 운 나쁘게 이런 시기에 환자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이번 의사 파업에 유달리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COVID-19가 진행 중인,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받아들이기 어려워서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쑥 설익은 안을 내놓은 정부부터 잘못됐고, 안의 중요성이나 의미보다 유불리에 민감했던 의사들도 자유로울 수 없다. 대책 없는 환자나 국민들은 엉겁결에 당할 수밖에 없었고, 파업에 대한 의견도 각자 입장에 따라 달라, 국론이 분열되는 것처럼 국민들의 마음도 갈라지지 않았는가?. 평범한 국민의 입장에서, 의사도 아니고 환자도 아니고 정부 관료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닌 입장에서, 왜 이번 파업이 유독 받아들이기 힘들까? 혹시 윤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런 건 아닐까? 윤리적인 측면에서 한번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무전유죄, 유전무죄’는 비윤리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현이지만, 너무 상투적이라 식상하다. 그렇지만 아직도 주변을 돌아보면 비윤리적인 상황을 쉽게 볼 수 있다. 언젠가 백화점 주차장으로 새치기 진입하려던 차량을 제지하다가 오히려 운전자에게 맞았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어떤 회사는 대리점에 제품 밀어내기로 고통을 준다는 기사도 본 적이 있다. 여전히 일반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는 것은 비윤리적인 행태 때문이다. 왜 그럴까?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자기이익을 위해 경쟁하면서도, 혼자서는 자기이익을 이룰 수 없기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경쟁과 협력이라는 두 축 사이의 균형점 찾기를 사회적 삶의 기본문제로 삼았고, 그 답을 윤리에서 찾았다. 이런 이유로 비윤리적 행위를 보면 사회적 삶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 같아 분노하는 것이다. 사람이 윤리의 옷을 입고 태어나는 건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반복적으로 또 습관적으로 윤리를 실천하면서 윤리적 삶을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해왔다.

오늘날 자기이익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세상에서 윤리의 이론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이 이기주의다. 이기주의는 심리적 이기주의와 윤리적 이기주의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자기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후자는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이 목적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앞선 손님이 남긴 반찬을 다른 손님에게 내놓는 식당 주인은 심리적 이기주의자이고, 새 반찬만 내놓는 식당 주인은 윤리적 이기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심리적 이기주의는 식당 주인과 손님 사이의 자기이익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는 면에서 윤리 이론으로 보기 어렵다. 설마 의사들이 환자를 수단으로 간주하면서 파업하는 심리적 이기주의자일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자세로는 결코 의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기주의 윤리 이론은, 윤리적이든 심리적이든, 개인적인 사익의 차원에 머문다. 각 개인의 자기이익을 사회적인 공익 차원으로 확대하여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구하는 윤리 이론이 공리주의다. 공리주의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모든 사람의 이익을 “1”로 간주한다. 사회 안에서 자기이익이 대립될 때 공리주의는 비용-편익 분석을 통해 유용성을 산출하여, 유용성이 큰 행위를 윤리적이라고 판단한다. 이번 파업의 결과 의사증원이 안 된다고 가정할 때, 적은 수의 의사는 미래의 손실을 예방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많은 수의 환자는 의사의 도움을 더 많이 받을 미래의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된다. 공리주의의 측면에서 이번 파업은 환자에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비용-편익 분석은 조건과 대상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단언할 수 없다.

공리주의는 정의롭지 않거나 소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어, 정의론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고 표현하였다. 정당한 이유 없이 이익을 주는 특혜와 정당한 이유 없이 불이익을 주는 차별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집단에 따라 특혜와 차별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예를 들어 요즘 미국에서 일어나는 인종차별은 자신이 속한 인종에 따라 다르게 생각하기 쉽다. 인종을 초월한 보편적인 정의는 참 아름답고도 귀하다.

그래서 롤스는 정의론에서 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의 사유실험을 주장했다. 원초적 입장은 사회 성립 이전의 자연 상태라는 상상 속의 입장으로서, 정의를 판단하기 위한 개념이다. 얼굴을 가리는 무지의 베일은 이해관계에 기울어지지 않고 사회제도의 정의로움을 공정하게 선택할 수 있게 돕는다. 롤스는 이런 조건에서 내린 결정은 정의롭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이 의료인인지, 환자인지, 공무원인지, 환자 가족인지, 일반 국민인지 모르는, 무지의 상태에서 의사증원 여부를 결정한다면 그 결정은 공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의 조건에서 내리는 정의로운 결정이라도, 의견이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상황에서는, 어느 편에서도 지지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받을 수도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기댈 것은 덕의 윤리다. 윤리는 사람이 지키는 것이기에 행위 중심의 윤리보다 행위자의 덕이 중요하다. 비록 덕의 윤리가 개인윤리에서 출발하지만, 덕의 윤리를 제도화하여 잘 지킨다면 사회윤리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 현대의 사주덕은 정의, 지혜, 용기, 절제인데, 특히 정의의 덕은 개인적 덕목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덕목이다. 덕의 윤리는 덕이 깊은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 따르는 것인데, 아직 덕이 부족한 사람은 따르기 어렵고, 요즘 이상적인 덕의 모델도 찾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그러니 원리나 규칙 중심의 윤리로 접근하고, 덕의 윤리로 보완하면, 전자는 행위에 정당성을, 후자는 행위에 동기를 부여하는 면에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고리타분하지만 의료윤리의 원리나 규칙에 의사의 덕목을 강조하는 것도 좋게 보인다. 원칙에 근거한 최근의 의료윤리는 자율성 존중의 원칙, 선행의 원칙, 악행 금지의 원칙, 정의의 원칙을 택한다. 자율성 존중은 환자에게 충분히 설명하여 자율적 동의를 얻는 것으로, 2차대전 후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 바쁘고 지친 의사들은 환자들의 설명 요구에 친절하게 답할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의사 증원은 여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선행과 악행 금지는 히포크라테스에서 비롯된 오래된 원칙이고, 환자에게 적어도 해는 끼치지 말 것을 요구하는데, 의사 파업이 이 원칙을 지키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의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하는 원칙으로, 가난하고 질병이 만연한 곳에 더 많은 의료 혜택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원칙에 따라 소외지역에 공공의료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의사 파업이 여러 차례 있었던 나라로 캐나다가 있는데, 주된 파업 동기는 메디케어 도입이었다. 결국 메디케어는 도입되었고 그 덕분인지 캐나다는 인접한 미국보다 COVID-19를 잘 이겨내고 있다. 물론 미국도 오바마케어를 도입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실행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한다. 의사의 경제적 이익이 큰 미국에서는 파업은 할 수 없다고 한다. 의료보험 도입 전 우리나라의 경우 돈이 없으면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미국은 여전히 의료보험과 의료비가 비싸서 아파도 그냥 참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것이 초강대국 미국의 의료현실이다.

얼마 전 독일이 COVID-19 확산사태를 계기로 2년 내 공공의료 인력을 5천 명 증원하기로 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리고 약 20%를 차지하는 베이비부머 의사들의 은퇴에 대비하여 의대 정원 확대도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굳이 독일을 따라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도 결국 의사를 증원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번 파업으로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특히 당사자인 환자와 국민을 배제한 의사와 정부만의 대화는 바람직하지 않다. 두 집단의 이익에만 치우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을 따라하는 시대는 접을 때다. 사람이든 사회든 정의롭지 않으면 배울 것이 없고, 특히 미국의 인종차별과 지나친 의료자본주의는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우리의 윤리적 모델이 되기 어렵다. 우리 주변의 다른 나라들도 윤리 면에서 모델로 삼을 만한 나라는 별로 없다. 이번 기회에 우리의 의료윤리를 잘 정립해보자. 방탄소년단의 K-팝 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모범이 될 만한 K-의료윤리를 세울 수 있다. 의료윤리 뿐만 아니라, 간호윤리, 생명윤리, 환경윤리, 정보윤리, 공학윤리, 음식윤리 등 모든 응용윤리를 총망라하여 K-윤리를 세우자. 이제 우리가 윤리 선진국이 되면 좋겠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김석신 가톨릭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