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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열매는 꽃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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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열매는 꽃의 미래다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우리가/너를 잊었는가 싶을 때/들판은 휘영청, 초록 연두 노랑 갈색으로 흔들린다/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흔들린다/철길너머 낮은 언덕/그 너머 낮은 山 위의 무덤들이 덩달아/제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온 것들을/예쁘게 예쁘게 익혀가고 있는 계절…(박라연의 ’묘지가 아름다운 계절‘ 부분)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시의 제목을 보고 뜨악했던 기억이 난다. 하필이면 ‘묘지가 아름다운 계절’이라니. 하지만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할 때마다 이 시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벌초를 하여 단정해진 봉분들을 보고 있노라면 추석 명절을 쇠기 위해 읍내 오일장에 나가 말끔하게 이발을 하고 돌아오신 아버지의 머리처럼 정말 묘지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추석 차례도 지내지 않기로 하여 조용히 성묘만 다녀왔다. 선산에 올라 성묘를 마치고 바라보는 들녘이 시의 한 구절처럼 휘영청, 초록 연두 노랑으로 흔들린다. 우리가 마스크에 가려 깜빡 잊고 있는 사이, 가을은 또 그렇게 찾아와 제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온 것들을 색색으로 물들이며 예쁘게 익혀가고 있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선 마스크부터 챙겨야 하는 요즘이지만 가을을 만나기 위해선 마음만 비우면 된다. 마음 속 욕심만 내려놓고 집을 나서면 언제 어디서든 가을을 만날 수 있다. 청명해진 가을하늘과 불어오는 가울 향기를 품은 산들바람이 코끝을 간질인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에게서 멀어진 만큼 자연에 더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구기자 열매이미지 확대보기
구기자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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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풍등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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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부쟁이


들에 나서면 습관처럼 꽃에 먼저 눈길이 가곤 한다. 여름 꽃들이 물러간 자리엔 어느새 가을꽃들이 들어차서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길섶에 핀 붉은 여뀌꽃과 논둑, 밭둑에 은빛으로 빛나는 억새꽃, 연보랏빛 쑥부쟁이, 흰 구절초, 꽃며느리밥풀, 자주쓴풀, 투구꽃… 산을 오르며 만나는 가을꽃들이 하나같이 소슬하다. 어느새 싸리 잎엔 노란 단풍이 들기 시작했고 어느새 꽃빛이 초췌해진 물봉선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금세 터질 것처럼 씨앗주머니가 한껏 부풀어 있다. 산길에 흩어져 있는 알밤과 도토리, 붉게 익은 팥배나무 열매와 산사나무 열매가 꽃처럼 곱다. 가을은 묘지가 아름다운 계절이기도 하지만 열매가 아름다운 계절이기도 하다.

왕가위 감독의 홍콩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화양연화(花樣年華)는 꽃처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꽃의 시간이란 열매를 향해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苗而不秀者 有矣夫(묘이불수자 유의부) 秀而不實者 有矣夫(수이부실자 유의부)’라 했다. ‘싹은 틔워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꽃은 피우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놈도 있다’는 말이다.
억새이미지 확대보기
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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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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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삭

공자가 아끼던 애제자 안회가 서른 즈음에 죽자 이를 안타까워하며 했던 말이라고 한다. 열심히 학문을 닦아 뛰어난 제자가 그 배운 바를 펼쳐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안타까움이 오죽했으랴. 달리 생각하면 싹을 틔웠으면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하고, 꽃을 피웠으면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숨을 쉰다. 우리는 숨을 쉬는 것을 호흡이라고 한다. 호흡이란 숨을 내쉴 호(呼)자와 들이쉴 흡(吸)자가 합쳐진 말이다. 다시 말해 들숨과 날숨이 다름 아닌 호흡인 것이다. 목에 숨이 붙어 있는 것을 목숨이라고 한다. 그 숨이 멎으면 우리의 생도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한다. 목숨 가진 것들의 가장 확실한 미래는 죽음이고 화려한 꽃을 피우는 이유도 열매를 향해가는 과정이므로.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