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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이성부 '벼'와 구스타브 클림트 '황금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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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이성부 '벼'와 구스타브 클림트 '황금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초상'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한국의 선진화와 민주적인 정치화는 '벼 같은' 민중들의 삶의 태도에서 지금의 꽃을 피운 것이다. 이성부의 시 는 1970년대부터 그것을 우리들에게 이미 황금빛으로 보여주었던 바다.

벼 /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구스타브 클림트 ‘황금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초상’, 19세기, 패널에 유채, 개인.
구스타브 클림트 ‘황금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초상’, 19세기, 패널에 유채, 개인.


“<주역>이란 경(經)이다. 길을 내자는 경이다. 귀에도 길을 내고 코에도 길을 내고 입에도 길을 내서 모두 통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경이란 경은 모두 길을 내자는 것이다. 사람은 길을 가야 한다. 길을 가야 사람이지 길을 가지 못하면 짐승이다.”

다석(유영모) 선생의 제자인 현재(김흥호, 1919~2012) 목사님의 말씀이다. 김흥호(金興浩)의 <주역강해>(사색, 2001년)에 그 말이 보인다. 죽비로 어깨를 맞은 것처럼 얼얼하다. 뼈아프다!

마흔 초반, 내가 처음 이성부(李盛夫, 1942~2012) 시인의 시와 만났을 때의 느낌 또한 그러했다. 충격이었다. 얼어붙은 감성의 바닥에 모세의 기적처럼 한 줄기 길이 뻥하고 뚫리면서 환하게 열린 것만 같았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여기서 벼(禾)는 의인화와 시적 긴장을 통해서 ‘사람(人)’의 모양새와 심리를 모두 인격으로 갖춘 셈이다.

시의 출산은 1974년이다. 세월이 지나 2020년, 가을철이 들어서 다시 읽어도 시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침이 고인다. 흥분이 인다. ‘벼’가 새롭게 읽힌다. 그렇듯 보이면서 다가온다.

벼(禾)라는 한자는 쌀 나무(木)에 나락이 자란(丿) 꼴로 그림을 해부할 수 있다. 다가 아니다. 농부(人)가 쌀을 생산하기 위한 각고의 수천 번의 땀과 노력(千)을 자형의 상징으로 달리 볼 수도 있어서다. 이처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막힌 구석이 뚫린다. 길이 열리는 것이다.

가을엔 단풍 보다 벼가 황금색으로 더 아름답다


편지를 쓰는 사람도 예쁘다. 붉어지는 단풍(丹楓)을 굽어보는 산 정상에 오르는 여행도 좋긴 하다. 하지만 최고의 압권은 들녘에 서서 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는 황금색 풍경만은 좀 못하다.

내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고 나서 어머니가 중국집 창 너머로 누렇게 순금색으로 보이는 들판을 쳐다보면서 만면에 웃음 짓는 얼굴로 “좋다, 좋구나!”를 화두로 꺼내는 것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래서 너도 나이가 든다, 라고 하는 것이다.

약 한 달 전인가. 집에서 가까운 화성 병점의 중식당 ‘장강’에서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오붓하게 저녁을 자장면으로 먹은 적이 있다. 식후(食後),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들녘은 환상적인 황금빛이었다. 누렇게 벼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한참을 그냥 서 있었다. 그러면서 가을엔 단풍 보다 벼가 황금색으로 더 아름답다, 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가’라는 글자는 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쏟아지고 번개가 번쩍이는 태풍을 그린 것 같고 ‘을’이라는 글자는 달이 뜨고 고요한 호수에 달빛이 깨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라고 말한 김흥호 목사님의 말씀이 참 시적이다, 라고 연필로 책의 여백에다 초서(抄書)를 했더랬다.

글을 읽고 한글로 ‘가을’을 쓰는 기분이나 마음가짐은 신선하고 남다르다. 더불어 ‘가을’을 뜻하는 한자 ‘추(秋)’ 자를 여러 번 쓰고 베끼는 해찰의 시간은 어지간한 TV 드라마보다 훨씬 재미있다. 유익한 시간이었다.

秋, 이 낱말에 숨은 시크릿


인문사회과학 연구자 우석영이 쓴 <낱말의 우주>(궁리, 2011년)엔 이런 글이 보인다. 다음이 그것이다.

+ 火 . 가을, 가을의 다른 이름, 가을의 대표 이름은 성숙이다. 곡식의 성숙이요 정신의 성숙이다. 곡식이 성숙하는 계절이니, 사람의 정신도 성숙함이 마땅한 계절이 가을이다. 곡식이 무르익는 것처럼, 사람의 정신도 무르익어 생각으로, 말로 터져나옴이 마땅한 계절이 가을이다. (중략) 이 낱말에 숨은 그림은 ‘벤 곡식[禾]을 볕[火]에 말리는’ 풍경이다. 곡식을 수확한 후의 풍경이다. (같은 책, 190쪽 참조)

한자 추(秋)에 대한 낱말 풀이가 흥미롭고 날카롭다. 이와 같이, 이성부의 <벼> 또한 상식 속의 인습을 깨려는 계몽적(啓蒙的) 시의(詩意)가 다분히 민중(民衆)을 향하고 있다. 70년대의 박정희 독재 정치와 새마을운동을 나는 십대 소년 시절, 구국의 영웅적인 행보로만 어렴풋 기억하고 있었다. 다 흘러간 옛날이 지금은 되었지만~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4연의 시(전문)에서 승(承)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이란 구절이 농민과 민중을 청자(聽者)로 설정한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서민의 마음을 오롯이 대변하는 것처럼 시가 읽힌다. 여기서 엄밀하게 청자(聽者)는 정치 지도자를 염두하고 있음이다. 따라서 김흥호 목사의 지적처럼 “길을 가야 사람이지 길을 가지 못하면 짐승”들이 잘 농사한 벼를 망친 당시의 사회를 비판함을 엿볼 수 있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시의 전문에 있어서 전(轉)에 속하는 이 부분은 ‘KO 펀치’로 결정타가 아닐 수 없다. 정치인이 아주 우습게 여기는 서민과 농민, 민중은 수탈과 폭정의 가을에도 불구하고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있는 존재로서 비가 쏟아지고 번개가 번쩍이는 태풍 속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 경지의 내공 소유자라는 점을 환기 시키고 있다.

어렵고 힘들고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서민들은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알지만 그리하여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이 피 묻은 그리움”이 이상적으로 그리는 정치는 “서로 어우러져/기대고 산다”라는 “이 넓디넓은 사랑”이 의미하는 성숙한 시민 의식에 평화 공존이 유대감으로 돈독하게 있음에 있다. 아울러 한국 정치는 살기 어려운 “햇살 따가워질수록/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이웃들에게 저를 맡”기려는 서민과 민중을 향해서 정치인은 계속해서 귀에도 입에도 코에도 눈에도 길을 열어나가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 한국의 선진화와 민주적인 정치화는 벼 같은 민중들의 삶의 태도에서 지금의 꽃을 피운 것이다. 이성부의 시 <벼>는 1970년대부터 그것을 우리들에게 이미 황금빛으로 보여주었던 바다.

‘너’ 자신을 알라


앞의 그림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황금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Woman in a Golden Dress)>이란 작품이다.

이 작품을 대하면 나는 가을이 떠오른다. 황금빛 들녘, 순금색의 벼가 무르익어 여인이 입은 옷의 장식이 되어 오마주로 겹쳐진다.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 표정을 하고 있는 여인의 얼굴에서 생각이 성숙해지는 눈빛만이 아스라이 매혹적일 뿐이다.

아, 그녀의 목에 진짜 순금목걸이가 걸쳐 있다. 열 손가락 어디에도 반지 하나 보이지가 않는다. 이 그림을 나는, 아는 지인에게 검색을 통해서 보여준 적이 있다.

지인은 현재 서울 개봉역 2번 출구 앞 한 상가에서 ‘우리동네금거래소’라는 간판을 달고 금장사를 하고 있다. 그는 ‘화(火)’ 사주를 갖고 태어났다. 사주팔자에 화(火)가 두 개 이상 되는 사람을 만나면 이상할 만치 언변이 좋은 편이다. 담백한 성격이라서 나처럼 토(土) 사주의 사람은 그에게 끌리게 마련이다.

2년 전이다. 지인이 창업한다고 해서 그의 사주팔자를 만세력으로 한 번 돌려 보았다. 창업주인 ‘그’는 전형적인 화(火) 사주였다. 해서 나는 금(金)을 이긴다고 보았고 창업 아이템을 잘 선택했다고 칭찬한 바 있다.

참고로 강호동양학자 조용헌이 쓴 <사주명리학 이야기>(생각의나무, 2002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수(水)가 많은 사주는 정력이 좋고 술을 좋아한다든지, 화(火)가 많은 사주는 언변이 좋고 담백하다고 보고, 목(木)이 많은 사주는 고집이 강하고, 금(金)이 많은 사주는 결단력이 있고 냉혹한 면이 있고, 토(土)가 많은 사주는 신중한 대신에 금전적으로 인색하다. (같은 책, 38쪽 참조)

사실 오행(수·화·목·금·토)이 팔자에 고루 있는 사람이 평탄한 삶, 보통의 생활을 누린다. 어느 한쪽이 많이 보이는 사주 소유자는 그만큼 캐릭터가 강한 성격이기 쉽고 고집도 강하다. 연예인은 기본적으로 화(火)가 많고 목(木)이 기대고 있다. 화와 목이 없는 사람은 쉽게 말해서 사교적이지 못하다. 사주에 금(金)이 없다면 공무원이나 군인, 경찰 생활에서 장수하기가 어렵다. 일주(日柱)에 임계(壬癸)와 같은 수(水)가 붙은 여성의 사주는 천상 여자이기 쉬워서 낭군을 잘 만나고 백두(白頭) 해로한다는 속설이 전한다. 평소 우유부단하다고 한다면 그의 사주엔 금(金)이 하나도 없다고 보면 된다.

아무튼 오행은 서로 어우러져 기댄다. 이상적인 조합과 조화를 일군다. 부부 궁합이 필요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마치 벼가 그런 것처럼, 사람도 또한 내가 부족한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의 상대를 통해 부족함을 채워야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물며 나에게 넘치거나 지나친 허물은 반대로 경쟁력이 되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조화에 있어서는 걸림돌로 잘 맞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고의 노력으로 넘침은 덜어내야 한다. 스스로 지나침은 베어낼 줄 알고 참을 줄 알아야 한다.

황금빛 들녘. 벼가 무르익는 가을이 오면 보는 것만으로도 부자가 된다. 마음이 부자여야 진짜 부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

참고문헌

이성부 <우리들의 양식>, 민음사, 2006.

김원호 <다시 읽는 한국의 명시>, 한나래플러스, 2013.

조용헌 <사주명리학 이야기>, 생각의나무, 2002.

우석영 <낱말의 우주>, 궁리, 2011.

김흥호 <주역강해>, 사색, 2003.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