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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제동장치 없는 ‘집단사고’ 폭주 기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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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제동장치 없는 ‘집단사고’ 폭주 기관차

정책입안자, 확증편향에 함몰...보편타당성과 합리성 되살려야

인간의 심리적 행동을 경제학 관점에서 보는 행동경제학 이론 가운데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 있다.

영국 심리학자 피터 캐스카트 웨이슨이 내놓은 확증편향은 쉽게 설명하면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는 현상이다.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다른 정보는 무시하다 보니 ‘정보의 왜곡’이 생길 수밖에 없다.
슬기로운 우리 조상은 정보의 왜곡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로 돌아가 보자.

세종대왕은 어전회의 때마다 예조판서 허조(許稠)를 참석시켰다. 허조는 회의 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품을 지녀 대신(大臣)들이 기피한 인물이었다.

세종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허조를 회의에 참석시킨 것은 그를 통해 대신들이 빠질 수 있는 집단사고(group-think)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집단사고는 의사결정 때 만장일치를 도출하려는 속성 때문에 자칫 비합리적 결론을 내는 단점을 안고 있다. 특히 결속력이 강한 집단일수록 의견일치에 대한 의지가 강해 다른 이의 의견을 무시하는 ‘확증편향’에 빠질 수 있다.

세종대왕은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의 달인이었다. ‘악마의 변호인’인 데블스 애드버킷은 상대방 의견에 모순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반대 의견을 의도적으로 제시한다. ‘선의의 악역’이나 진배없다.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악마의 변호인은 우리의 오랜 역사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후손인 우리는 선조의 위대한 DNA를 되살리지 못하는 모습이다.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처럼 굉음을 내며 마주 보고 달리는 ‘추미애-윤석열 열차‘는 물론 경제정책에도 확증편향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전성을 보여 수십 년간 국내외에서 ‘에너지 효자’ 노릇을 해온 원자력발전을 모두 중단해 막대한 매몰비용을 초래한 탈원전 정책이 대표적인 예다.

이는 지구온난화를 초래하는 석유나 석탄 등 화석연료를 줄이고 원자력, 태양광 등 친환경 신재생 에너지 사용을 늘리는 합리적인 ‘에너지 믹스’와도 거리가 멀다.

국가가 마치 보모(保姆)처럼 일반 국민을 따라다니며 보호하는 ‘내니 스테이트(Nanny State)’도 예외는 아니다.

국민 입장에게 내니 스테이트는 ‘남는 장사’다. 국가가 국민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취급해 각종 복지정책을 쏟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이 있지만 국가가 국민의 자기결정권을 빼앗으며 펼치는 복지정책이 국민을 위한 최고선(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부의 ‘아낌없는 사랑’에 나라 빚이 4년 만에 300조 원이 더 늘어나는 등 국가채무 증가 속도는 이제 통제 불능이라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나라 곳간이 텅텅 비어가고 있는데 정책 입안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확증편향에 매몰됐으니 혀를 찰 수밖에 없다.

보편타당성과 합리성을 도외시한 선무당의 칼춤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날카로운 칼끝이 잘못 겨눠지면 그 피해는 국민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무당의 위험한 칼춤 놀이에 나라 정치와 경제가 휘청거리지 않도록 치밀하고 냉철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경영자는 칭찬만 받으면 좋은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의사결정의 첫 번째 원칙은 반대 의견 없이 최종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설파한 현대 경영학 창시자 피터 드러커의 충고가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 닿는다.


김민구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gentlemin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