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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자작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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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자작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성탄절이 코앞이건만 거리엔 크리스마스 캐럴 대신 흉흉한 소문만 가득하다. 코로나 팬데믹이 눈보라처럼 휘몰아치고 있다. 가장 그립지만 가장 두려운 게 사람이 되어 버린 세태 속에서 간간히 나를 숨 쉬게 하는 것은 숲길 산책이다. 꽃을 좋아하는 나를 위로한답시고 이따금 안부를 전해오는 사람 중엔 꽃도 없는 이 추운 겨울엔 무슨 낙으로 사느냐고 묻기도 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올 한
해는 사람들의 거리를 피해서 숲으로만 떠돌았던 것 같다.

찬바람만이 거리를 배회하는 겨울밤, 누군가가 그리워지면 나는 종종 자작나무를 생각하곤 한다. 눈빛을 닮은 새하얀 줄기에 굽은 데 없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늘씬한 자태로 언제든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자작나무는 단연 겨울 숲의 여왕이다.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타는 의성어를 딴 자작나무 이름의 유래도 정겹다. 경북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는 기름기가 많아서 장기간 썩지 않는 특성을 활용해 자작나무 껍질에 그렸다. 자작나무를 한자로 '백화(白樺)'라고 한다. 촛불이 귀했던 시절 자작나무 껍질에 불을 붙여 화촉(華燭·결혼식용 초) 대용으로 썼기 때문이다. 시인 백석이 자작나무를 소재로 한 시의 제목도 다름 아닌 '백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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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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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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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나무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 백석의 시 '백화' 전문 -

시만 보아도 남쪽에선 귀한 나무이지만 백석이 살던 북녘에서는 자작나무는 흔한 보통의 나무였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안도현 시인은 '자작나무를 찾아서'란 시에서 '자작나무가 하얀 것은 자작나무 숲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때 묻지 않은 심성을 가졌기 때문' 이라며 '제대로 사는 삶'이란 '자작나무숲에 너와 내가 한 그루 자작나무로 서서/ 더 큰 자작나무 숲을 이루는 일'이라고도 했다. 멀리서 보면 숲을 이루어 하나인 듯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나무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 적당한 거리 두기가 바람을 통하게 하고 햇빛이 골고루 비치게 하여 숲을 키운다. 이제 우리도 나무에서 삶의 지혜를 얻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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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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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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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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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

낙엽이 진 나무를 보고 그 종류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다른 나무에 비해 쉽게 구별되는 자작나무지만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그 흰빛이 지워져서 콕 집어 자작나무라 짚어낼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잎이나 열매가 남아 잇지 않은 겨울에 나무를 구분하는 잣대 중의 하나는 수피(樹皮)다. 사람의 지문처럼 나무들도 저마다의 독특한 수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전원 속의 나무가 수피가 흰색이면 자작나무나 백송일 가능성이 크고, 수피가 매끄럽다면 배롱나무이거나 모과나무일 경우가 많다. 가로수 중에 수피가 버짐처럼 벗겨진 것은 플라타너스일 확률이 높다.

나무줄기를 감싼 부분인 수피는 나무의 보호역할을 한다. 나무의 내부로 침입하는 병균 등을 막아주고, 호흡작용을 하여 내부의 수분 증발을 조절한다. 또한 나무에 상처가 났을 때 회복하는 것도 수피의 역할이다. 그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피가 갈라지고 벗겨지는 이유는 나무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나무와 같은 고등식물은 물관부와 체관부 사이에 부름켜라 불리는 형성층이 있는데 이 형성층이 세포분열을 하면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껍질이 째지는 아픔 없이는 성장할 수 없는 것은 사람이나 나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성장에는 고통이 따른다. 봄을 기다리는 나무처럼 이 힘든 시기를 견뎌야겠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