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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열매는 나무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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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열매는 나무의 미래다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2020년이 저물고 있다. 올해는 자신을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칭하며 함부로 자연을 파괴하며 겸손을 모르던 인간이 진화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의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확인한 한해였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회적 관계를 포기하고 거리두기에 나설 수밖에 없는 초유의 코로나 팬데믹 사태 속에서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고 좀 더 자연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일 년은 사람에 등 돌리는 대신 날마다 숲을 향해 걷던 해이기도 했다.

아파트 뜰에 가지 가득 선홍빛 열매를 달고 선 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잡아끈다. 사선으로 기운 오후의 햇살을 받아 홍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은 산수유 열매다. 때마침 직박구리 한 마리가 날아와 부지런히 가지를 옮겨 앉으며 열매를 쪼아댄다. 그냥 바라만 봐도 흐뭇한 풍경이다. 산수유나무는 꽃들도 사라지고 삭풍이 살을 에는 한겨울에도 어찌하여 꽃보다 고운 열매를 여전히 달고 있는 걸까. 붉은색은 새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색이다. 산수유 열매의 붉은 색은새들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유혹의 목적이 단순히 새들의 허기를 메워주기 위한 자비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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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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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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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바늘

가장 이기적인 게 가장 이타적이란 말처럼 기꺼이 새들의 먹이가 되어줌으로써 자신의 씨앗을 보다 멀리, 더욱 넓게 퍼뜨리기 위한 나무의 전략이다. 산수유뿐만 아니라 찔레나 낙상홍, 백당나무, 가막살나무, 괴불나무 열매들이 붉은 색을 띄는 이유이기도 하다. 달콤한 열매로 허기를 채운 새들은 멀리 날아가서 배설을 통해 그 씨들을 퍼뜨린다. 새들은 열매를 먹고 겨울을 날 힘을 얻고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나무가 베푼 은혜에 보답한다. 자고로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발이나 날개가 없는 식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씨앗을 세상에 퍼뜨리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간다. 콩과식물들은 꼬투리가 비틀려 터지는 힘으로 씨를 퍼뜨리고, 히어리나 풍년화는 열매 속에 든 발사 장치를 이용하여 씨앗을 날린다. 물봉선은 살짝만 건드려도 껍질이 폭발하며 씨를 사방으로 흩어놓고 단풍나무나 민들레는 바람의 힘을 빌려 멀리 날아가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수생식물들은 흐르는 물에 실려 이동하기도 하고 도둑놈의갈고리나 도깨비바늘 등은 짐승들의 털에 슬쩍 달라붙어 먼 곳으로 쉽게 이동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나무를 비롯한 식물들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경계를 허물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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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작살나무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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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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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나무 열매

처음 꽃을 대할 때는 꽃이야말로 풀이나 나무의 절정이라 생각했다. 어떤 이는 꽃은 한낱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일 뿐이고 진정한 절정은 열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풀이나 나무에게 절정은 꽃의 날도 아니고 열매의 날도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꽃은 열매를 꿈꾸며 피고 열매는 꽃을 꿈꾸며 익어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생도 그러하겠지만 풀이나 나무들 역시 살아 있는 순간순간이 모두 절정의 순간이다. 생의 어느 한 부분을 특정하여 절정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수많은 순간순간들이 이어져야 비로소 한 생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꽃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겨울은 사계절 중에 가장 심심한 계절이다. 숲으로 난 길을 따라 한 시간 이상을 걸어도 특별히 눈에 띄는 게 없다. 무성하던 잎들을 모두 내려놓고 깊은 잠에 빠진 듯한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명상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나무들이 끝내 포기하지 않은 열매를 찾아보는 것도 겨울 숲 산책에서 얻을 수 있는 쏠쏠한 재미다. 그 열매들이 새들의 먹이가 되어 주고 먼 훗날 푸른 숲을 이루는 상상을 하면 매운 겨울 추위도 견딜만 하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