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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박준 ‘삼월의 나무’와 정선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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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박준 ‘삼월의 나무’와 정선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자식이 결혼하는 나이(50~60세 사이)쯤 되면 우리는 이제 심리적으로 그동안 멀기만 했던 ‘그 숲’을 찾아야 한다.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그곳에서 경쟁으로 지치고 소모한 감정의 낭비와 구멍 뚫린 상처투성이 자기(自己) 마음을 달래어 위로받고 치유를 받아야만 되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나’를 소중하게 아끼고 다루고 잘 사용하는 방법이다

삼월의 나무 / 박준


불을 피우기

미안한 저녁이

삼월에는 있다

겨울 무를 꺼내

그릇 하나에는

어슷하게 썰어 담고

다른 그릇에는

채를 썰어

고춧가루와 식초를 조금 뿌렸다

밥상에는

다른 반찬인 양

올릴 것이다

내가 아직 세상을

좋아하는 데에는

우리의 끝이 언제나

한 그루의 나무와

함께한다는 것에 있다

밀어도 열리고

당겨도 열리는 문이

늘 반갑다

저녁밥을 남겨

새벽으로 보낸다

멀리 자라고 있을

나의 나무에게도

살가운 마음을 보낸다

한결같이 연하고 수수한

삼월도 따뜻한 기운을 전해주었으면 한다


정선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18세기, 종이에 수묵, 국보 216호, 삼성미술관 리움이미지 확대보기
정선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18세기, 종이에 수묵, 국보 216호, 삼성미술관 리움


시인 박준(朴濬, 1983~ )은 아직 젊다. 하지만 그가 그려내는 시의 붓놀림은 결코 어리거나 젊어 보이지 않는다. 놀랍다. 시작 내공이 무슨 조선의 화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이 말년에 이르러 그렸다는 명작 <인왕제색도>를 눈앞에 두고서 보는 듯 무거우나 가볍고 신비스런 그런 느낌이 문득 생긴다.

“아는 만큼 즐기고, 배운 만큼 쓰면 된다.”

고전평론가이자 인문학자 고미숙의 말이다. 고미숙이 쓴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북드라망, 2012년)에는 이런 글이 보인다. 다음이 그것이다.

계절의 변화를 보라. 봄(목)·여름(화)·가을(금)·겨울(수), 그리고 각 사이에 들어있는 환절기(토). 이것이 오행의 걸음이다. (중략) 청춘(목)은 봄이고 중년(화)은 여름, 폐경 이후(금)는 가을, 육십 대 이후(수)는 겨울이다. 각각의 마디를 넘는 시기에 토(土) 기운이 작용한다. 잘 산다는 건 이 과정을 다 제대로 밟는다는 뜻이다. 청춘은 청춘답게, 중년은 중년답게, 노년은 노년답게…… 고대 인도에서는 바로 이런 원리에 맞춰 인생을 구분했다.

학습기/가주기/임서기/유행기가 그것이다. 학습기는 봄이다. 배우고 익히는 청년기를 뜻한다. 가주기(家住期)는 사랑과 결혼, 가족과 직업을 일구는 중년의 삶이다. 물질적이고 형식적인 것을 번성케 하는 여름에 해당한다. 임서기(林棲期)는 숲에서 명상을 하는 기간, 곧 가을이다. 자식은 이미 자랐고, 사랑의 폭풍은 잦아들었으며, 직업에서의 성취도 한 마디를 지났다.

이젠 후반의 생 혹은 죽음을 위한 깊은 사색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숲으로 들어가 존재와 우주를 통찰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행기(流行期)는 만행기(卍行期)라고 하는데 표표히 천하를 떠돌며 지혜를 나누어 주는 시기이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의 씨앗이 되어 세상에 뿌려지는 시절, 곧 겨울이다. 그야말로 인생과 자연이 고스란히 겹쳐지는 생의 주기이다.
(같은 책, 46쪽 참조)

임서기, ‘숲’으로 들어가려는 박준의 시


정선의 <인왕제색도>의 ‘인왕제색(仁王霽色)’이란 말은 ‘인왕산의 비 갠 모습’을 화폭에 담았음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다음의 시를 보자면, 박준의 ‘오늘’은 이미 여름에 장마가 시작되기 직전에 막 도착했다, 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챌 수 있다. 따라서 학습기는 아니다. 가주기와 임서기 중간쯤에 와 있다. 박준의 ‘숲’이 그것이다. 예컨대 고미숙의 말을 빌리자면 임서기, ‘숲’에 들어가려는 ‘나’가 보인다. 시인이 도착함을 시에서 우리가 목격할 수 있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

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셋이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

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

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가을이 오면


― ‘숲’ 부분

서울 출생인 박준 시인의 ‘숲’이 나는 막연히 산(인왕) 아래 동네에 있지 싶다. 궁금증 하나, ‘셋’은 누구인가.

시의 화자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고 했으며,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라고 적었는데 그것들은 서른의 ‘나’와 마흔의 ‘나’ 그리고 쉰 이후의 ‘나’로 나잇살 주름이 잡히면서 겹쳐진다. 그러니까 “셋이 함께 장마를 보”는 것은 동시에 한 사람(?)인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학습기, 가주기, 임서기의 ‘나’와 대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속세와 속리 사이를 번갈아 오간다. 가로지르고 횡단하면서 사유(思惟)의 깊이와 넓이의 시공간을 확장한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가을이 오면”이란 시구를 통해 나는 시인이 아직은 그 ‘숲’에 차마 들어가지 못함을 확인하고 위안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준은 세계를 향한 발산(發散)함이 적은 편이다. 오히려 수렴(收斂)함이 문제이다. 오행에서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다.

유독 수(水)와 금(金)의 기운이 드세다. 차분함과 날카로움의 그것이 시의 성격을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게 만듦에 치중한다. 편안함과 아늑함이 적잖이 왕성하다. 그렇듯 느껴지니 걱정이다. 박준 시인은 젊다. 아직은 말이다. 그렇기에 속세를 등지는 ‘숲’으로 벌써 들어가서 안 된다. 일흔이 지난 나이, 겸재 정선처럼 ‘비가 그친 산’을 굳이 그려내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우려(憂慮)를 괜히 나는 꼰대가 되어 해본다.

잠시, 삼월, 이라고 발음해볼까요? 삼. 입안에 살짝 물기가 돌죠. 나무 속에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잎들처럼 말이죠. 월, 그곳에 깃든 숨 한 방울처럼 말이죠. 삼월은 조금 쌀쌀하고 조금 따뜻해서 “미안”을 품고 있고, 여전히 불이 되는 순간을 아는 마음이어서 삼월의 나무는 한결같이 연하고 수수하지요. (이원 <시를 위한 사전>, 191쪽 참조)

박준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 2012년)에서는 고 허수경(1964~2018) 시인은 발문 제목을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며 시인은 시를 쓰네’라고 의미심장하게 붙인 바 있다. 세계의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존재가 시인의 운명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이원(1968~ ) 시인은 “시인은 별걸 다 걱정하는 사람이지요”라고 수줍게 말한 바 있다. 허수경, 이원은 박준과 달리 여자이고 나이로는 한참 누나이다. 아니다. 이모가 되는, 뻘이다. 이모와 조카가 허물없이 지내면 조카는 이모의 나이로 세상을 보고 사회를 소비하는 면이 아예 없진 않다.

앞의 시, ‘삼월의 나무’는 27행 10연으로 시가 비교적 호흡이 긴 편이다. 시인 이원의 책 <시를 위한 사전>을 읽다가 박준의 시를 만나서 시집을 서가에서 찾아야 했다. 이원의 안내에 따라, 시의 전문을 입말로 소리를 내면서 나는 찬찬히 여러 차례 반복해 읽어 보았다. 처음과 달리, 시가 입체적으로 곁에 다가왔고 머물렀다.

박준의 시세계는 아직 ‘삼월’에 있었다. 다행이다. ‘나무’를 통해 시인은 발산을 준비 중이었다. 나무는 사주팔자 오행에서 목(木)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겨울 무를 꺼내/ 그릇 하나에는/ 어슷하게 썰어 담고// 다른 그릇에는/ 채를 썰어/ 고춧가루와 식초를 조금 뿌”리는 행위는 ‘가주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화(火)이 기운이 “불을 피우기/ 미안한 저녁이/ 삼월에는 있”음이 분명하다. 하물며 “멀리 자라고 있을/나의 나무”라는 부분과 만나면 ‘임서기’에 시인이 완전 진입한 상태가 아님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처럼 “현재가 미래에 도달할 것을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박준은 여전한 편이다. 그래서 마흔 이후에 세 번째 시집이 걱정이 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한다.

아무튼 먼 ‘숲’, 그곳에 가야만 한다


나무 인문학자 강판권(1961~ ) 교수의 <숲과 상상력>(문학동네, 2018년)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날카로운 통찰이다. ‘속세와 속리 사이’가 바로 그것이다. 다음과 같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속세라 부른다. 속세는 평범한 곳이고 고상하지 못한 곳이다. 그러나 인간은 속세에 살면서 끊임없이 고상한 어떤 곳을 찾아 나선다. 이같이 속세에서 벗어나는 것을 속리(俗離)라 하므로, 속리산으로 가는 길은 속세를 떠나는 여정인 셈이다. 그러나 속세와 속리는 애초부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속리산으로 간다고 해서 속세와 이별하는 것도 아니고, 속리산으로 가지 않는다고 해서 꼭 속세에 사는 것도 아니다. 떠나다는 뜻의 ‘리(離)’에는 ‘만나다’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속리산도 속세에서 떠난다는 것이 아니라 속세에 산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속세에 살지 않고서는 속세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책, 28~29쪽 참조)

그렇다. 만남이란 곧 이별하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기억이기도 하고, 그러한 이별은 우리에게 또 새로운 만남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이러한 인생살이가 다 속세에서 벌어지고 이뤄진다. 속세에서 우리가 버티고 살아야만 현실로 가능해지는 일이기도 하다. 강판권 교수가 충북 보은 속리산에서 속세를 보았다면, 박준은 태백산이 있는 태백에서 속세를 기다리고 기억하려고 애쓴다. 이를테면 다음이 그것을 보여준다.

태백에 가는 일을 좋아한다. 연고도 없이 나는 자주 태백에 간다. 서쪽으로 흐르는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와 남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못이 태백에는 있다. 곤드레며 곰취며 참나물 같은 향 좋은 산채들도 태백에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태백의 모습은 인가(人家)와 폐가(廢家)가 번갈아 서 있는 작은 마을들, 그 앞으로 검회색 하천이 좁게 흐르는 풍경이다. (중략) 나는 폐가가 을씨년스럽거나 흉물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그곳에서 불을 켜고 밥을 짓고 사랑을 하고 병을 앓기도 하며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보냈다는 것.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22~23쪽 참조)

박준의 시적 감정, 그 발산(發散)의 고장은 깊은 산골 도시 태백에 있다. 또 박준은 거기서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태백 “그곳에서”는 화(火)의 기운이 느껴지고 만져진다. 사람이 살던 인가와 폐가를 통해서는 실은 미세하지만 발산하는 목(木)의 기운까지 오롯이 감지되며 전달된다. 그렇다. “불을 켜고 밥을 짓고 사랑을 하고 병을 앓기도 하”는 보통의 삶은 우리가 서른과 마흔 사이, 가주기에 맞닥뜨린다. 그렇기에 그 흔한 사랑과 결혼, 가족과 직업을 일구는 중년의 삶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계절로 보자면, 여름(火)의 모습을 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내 자식이 결혼하는 나이(50~60세 사이)쯤 되면 우리는 이제 심리적으로 그동안 멀기만 했던 ‘그 숲’을 찾아야 한다.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그곳에서 경쟁으로 지치고 소모한 감정의 낭비와 구멍 뚫린 상처투성이 자기(自己) 마음을 달래어 위로받고 치유를 받아야만 되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나’를 소중하게 아끼고 다루고 잘 사용하는 방법이다. ‘운명(運命)’이란 말의 ‘운(運)’은 ‘내가 운전을 한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핸들을 돌려 숲이 보이는 길로 들어서 목적지에 무사히 닿아야만 한다.

속세를 떠나라, 그런 얘기가 아니다. 어차피 그러고 싶어도 우리는 속세를 쉬이 못 떠난다. 하지만 주말을 이용하여 우리는 숲이 있는 산과 강을 얼마든 찾아 나설 수 있다. 그곳에 가서 방전이 된 ‘나’를 충전시키고 다시 속세로 돌아올 수 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이다.

‘숲’, 리더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안다


‘숲’이란 글자는 한글로도 쓸 수 있지만, 한자로도 쓸 수 있다.

사람 인(人)+한 일(一)+설 립(立) 세 자를 동원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것을 백지에 써보라. 그러면 왜 ‘숲’이 되었는지 그 실체가 보일 것이다.

우리는 국민(國民)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국(國)’이란 낱말의 우주에는 ‘국인(國人)’이라는 말이 숨어 있다. 쉽게 말하자면, ‘국인’이라 함은 지리적으로 서울·수도권 중상류층을 의미함이다. 마치 공산국가에서 말하는 ‘인민(人民)’이란 개념이 ‘인(人)’를 리더 그룹으로 ‘민(民)’을 백성이자 추종자로 나누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자로 내려 쓴 ‘숲’의 자형이다. 자형의 뜻을 살피자면 이런 말이 된다. “리더(人)는 하나같이(一) 성공(立)한다”로 시크릿 압축파일을 풀어낼 수 있다. 그들이 잘 나가는 비밀이 ‘숲’의 장소에서 얻어진 파워임을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 집에다 ‘숲’을 놓고는 ‘정원’이란 이름으로 그럴 법하게 치장한다. 소유하고 있다. 허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형편 때문이다. 하지만 맘만 먹으면 내가 사는 가까운 곳에 자연이란 엄청난 ‘숲’이 웅크리고 있음이다. ‘숲’은 때때로 산의 모습을 하고 더러는 강을 끼고서 우리가 오길 기억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 엄연한 사실을 까맣게 잊어서는 안 된다.

삼월이 오면, 우수와 경칩을 지나서 봄비가 내리고 난 뒤에 너나 할 것 없이 정선의 그림, 국보 216호 <인왕제색도>와 조우하길 바란다. 실은 어느 산이든, 비가 그친 뒤에 찾길 바란다. ‘숲’으로 들어가길 희망한다. 나 또한 그럴 것이다. 그 숲에는 나의 부족한 기운 물(水)이 있고 나무(木)가 있다. 또한 바위(金)까지 잘 하면 만지고 돌아올 수 있다. 나의 분노(火)를 녹이는 흙길(土)을 한참 걷다가 보면 ‘미움’은 어느새 ‘사랑’으로, ‘슬픔’은 ‘기쁨’이 될 것이다. 물론 삼월은 “불을 피우기/미안한 저녁”이 일찍 숲에 깃드니 빨리 집으로 귀가해야겠지만.

삼월의 나무를 기다리면서 나는 서울 친구가 보내준 김장 무(동치미)를 꺼내 “그릇 하나에는/ 어슷하게 썰어 담”아 보고, 이윽고 “다른 그릇에는/ 채를 썰어/ 고춧가루와 식초를 조금 뿌”려 저녁 밥상을 차릴까 한다. “밀어도 열리고/ 당겨도 열리는 문”을 닮은 내 친구야, 네 덕분에 2월이 참으로 고마웠네!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

◆ 참고문헌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8.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난다, 2017.

이원 <시를 위한 사전>, 마음산책, 2020.

강판권 <숲과 상상력>, 문학동네, 2018.

이태호 <서울산수>, 월간미술, 2017.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북드라망, 2012.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