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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면 시대 '우울' 극복한 현대발레…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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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면 시대 '우울' 극복한 현대발레…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프롤로그.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프롤로그.
아침은 세 겹 언덕 너머에서 온다/ 무관(舞冠)은 너와 나 사이만큼/ 농담(濃淡)을 오갈 회색을 두르고/ 김 밭 장대 피뢰침 몇 개 세워두었다/ 한고비 넘었을 뿐인데 숨 가쁘다/ 알카리성 토슈즈가 현대와 조우하고/ 울고 있어도 몸 시는 낭만으로 채워진다/ 살가운 온기는 옛 우물 같은 추억만 남길 뿐/ 한때 무리 지어 별 보러 왔던 곳/ 눈먼 자들의 도시에 기생하는 부도덕과 뻔뻔함/ 햇살이 끼자 비발디가 봄을 부른다/ 우리는 희망을 써내야 한다

신축년 이월 스무 나흗날 저녁 여덟 시,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 이지혜 발레 앙상블 주최·주관, 이화여대 무용과·발레블랑·이화발레앙상블 후원의 이지혜(이지혜발레앙상블 대표, 이화여대 무용과 초빙교수) 안무의 발레 「보이지 않는 것들」이 공연되었다. 자신의 춤에 색깔을 입혀나가며 퀼트 같은 그녀의 공연은 이화여대 발레의 전통을 이어오는 발레리나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공연이었고 바람직한 창의성과 기법으로써 목표를 달성했다.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경계와 고립.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경계와 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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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경계와 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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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경계와 고립.


이지혜 안무작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동인(動因)이며 오마주한 작품이다. 이 소설가는 현실 안에서도 자신의 경험과 꿈을 다양한 수사와 상상으로 경계를 허물며 문학의 밭을 일구어 왔다. 이지적 발레 안무가의 손길을 거친 「보이지 않는 것들」은 ‘전염병 시대’의 인간성 회복을 갈망한다. 역병이 도래하자 인간은 탐욕과 나태를 드러내고, 현실극복 의지가 상실된 채 방황한다. 인간은 실루엣 뒤의 익명의 ‘나’이거나 ‘우리’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지혜는 최근 몇 년 사이 신앙적 믿음을 견고히 하면서 안무적 뿌리와 행로를 밝히는 「길」 (<Her Story>·<Wandering>,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2016), 외부에서 호평을 받은 평론가가 뽑은 젊은 무용가 초청공연 「Beyond the Edge」(아르코예술대극장, 2017), 안무적 고향 ‘발레블랑’의 정기공연 「그 너머엔….」(서강대 메리홀 대극장, 2019)에 이르는 안무작을 발표하면서 전 방위적, 만능 발레리나로서의 기교와 이론적 논거의 틀을 굳건하게 축조해 오고 있다.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경계와 고립.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경계와 고립.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달콤한 무지.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달콤한 무지.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달콤한 무지.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달콤한 무지.

이지혜는 선화예고 실기우수자 졸업, 이화여대 발레전공 해외연수 장학금 수혜자였다. 그녀가 주목받는 발레 창작자가 된 것은 발레블랑 정기공연 「하얀 꽃잎으로...」(이화여대 삼성홀, 2014)부터이다. 이후 한국발레협회(KBA) 창작 페스티벌에서 「Lost the Present」(서강대 메리홀 대극장, 2015)를 발표하면서 비범한 창작적 소질로서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녀의 재능은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로부터 ‘주목할 예술가’로 선정되면서 비약적 전기를 이루게 된다.

이지혜는 이원(梨園) 너머, 전복적 가치를 지닌 미지의 발레에 대한 문제의식 제기와 방법론에 대해 고민해오고 있다. 팬데믹 상황에서의 대안적 발레, 불가항력의 현실 속에서의 이음을 재구성한 창작적 토대 구축은 양인(羊人)의 운명 같은 초식성 정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 용광로에서 불순물이 녹아 제거되어 순수 열정이 남고, 맑은 정신과 만난다면 파스빈더의 불안이 잠식했던 영혼은 사라지고, 이지혜에 의해 발레 혼(魂)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상실의 도시.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상실의 도시.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상실의 도시.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상실의 도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장면은 ‘프롤로그’, ‘경계와 고립’, ‘달콤한 무지’, ‘상실의 도시’, ‘애도와 희망’의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는 루이빌의 분위기를 불러오는 레이첼(Rachel's)과 묘한 기분으로 들뜨게 만드는 필립 글라스(Philip Glass)의 반복적 구도의 음악으로 시작된다. 여러 곳을 여행하며, 소소하게 즐기던 일상이 꿈길 같은 행복으로 비치는 영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바닥의 셔레이드 효과와 배경의 암시가 추상적인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부드러웠던 과거가 수용소처럼 변해가고 바닥이 파헤쳐지며 감추어진 인간의 마성(魔性)이 드러난다. 보이지 않는 상태는 모든 악에 대해 무기력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은유이다. 이지혜는 작품의 끝까지 '인본주의'에 대한 믿음과 '인간성' 회복에 대한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있다. 소품으로 등장하는 가변의 철제 벤치는 마음의 유동을 다스리는 균(均)이다. 이지혜는 이질의 공동체 속에서 두려움이 현실을 극복해낼 수 없기에 춤의 시편을 낭만적으로 그려낸다.

제1장; ‘경계와 고립’, 무거운 침묵이 형벌의 판결문처럼 자리 잡는다. 도시는 염병의 여파로 차가운 회색으로 가라앉는다. ‘치료 불가’의 극한상황에서 인간은 결속한 듯 보이지만, 이내 서로를 경계하고 외부의 강제 없이 자신을 고립시키며 이 위기가 끝나면 만나자는 약속을 남발한다. 자신에게 유폐된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경쾌함을 유지한다. 무리에서 이탈하지만, 곧 방향성을 상실한다. 자신을 감싸주던 보호막은 사라지고, 고독의 숲으로 진입한다.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상실의 도시.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상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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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상실의 도시.

제2장; ‘달콤한 무지’, 인간들은 절망이 쓰나미로 넘어오기 전에 보호의 울타리를 세운다. 그들은 의무와 책임은 외면한 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인지하는 달콤한 무지(Sweet Blindness)에 빠져든다. 벽을 허물고 인간다움을 갈망하는 소수는 지쳐간다. 상황과 달리 브람스의 선율이 일상의 평화를 구가한다. ‘절망은 너의 것’으로 넘기지만 불안을 잠재울 수 없다. 무지개처럼 달콤한 상상을 심어주기 위해 사탕에 묻히는 색소가 독이 된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다.

제3장; ‘상실의 도시’, 생명 존중과 인간성이 상실된 텅 빈 도시 속, 어둠 속에서 인간들은 죽음에 이르는 감염의 공포에 전율하며 서로 연민을 느낀다. 미나리처럼 휘어져 가며, 감정이 메마른 몸짓으로 분수대의 물줄기처럼 일직선으로 우뚝 설 당당한 인간들의 모습과 노 마스크 시대의 선언을 기다린다. 코로나바이러스로 폐쇄된 성이 치료 약이 발견되면, 심학규처럼 눈을 뜰 수 있단 말인가? 신판 발레 ‘심청전’의 상상은 성문을 열고 ‘자유’라는 틀을 확장한다.

제4장; ‘애도와 희망’,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자면서 꾸는 꿈속에 이 세상은 여전히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안무가는 역병의 엄습에 대한 경계를 공감하고 위로함으로써, 우리 삶의 터전과 인간성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부드럽게 상큼하게 피력한다. 가정의 현실화, 뻔뻔함이 정의로 둔갑하는 세상에 이성과 윤리의식의 실종, 이기심 팽배, 무책임한 사람들을 고발하는 기교 충만의 발레는 현재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사명감을 보여주는 의로운 작업이었다.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에도와 희망.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에도와 희망.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에도와 희망.이미지 확대보기
이지혜 안무의 「보이지 않는 것들」 에도와 희망.

「보이지 않는 것들」은 너와 나를 뺀 다수의 입장을 조망한다. 절연이 아니라 변주를 바라는 동양적 사고를 가변의 벤치가 감당해낸다. 이지혜의 독무는 다양한 움직임의 수사로써 군무와 차별화되고 적절한 진법 운용은 변동의 미학을 보여준다. 세 겹의 코트가 벗겨지고, 두려움은 분산된다. 텅 빈 버스나 지하철 영상은 공허의 의미를 확장한다. 의상을 통한 심리변화와 바른 의식 고양은 두 여인의 긴장감을 이끄는 움직임에서 드러난다. 춤은 모든 것을 씻어내는 빗소리로 마무리된다. 안무가 이지혜는 교훈적 서사로 교육적 성과를 달성했다.

이지혜는 이화여대 무용과 및 동 대학원 무용박사로서 이지혜 발레앙상블의 대표이자 이화발레앙상블과 발레블랑 단원이다. 또한 충남대·한성대·경성대·청주교대·선화예고 등에서의 교육과 한국무용교육학회·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국제기독교무용협회·한국발레연구학회·한국현대무용진흥회 등의 이사 경험은 자신을 단련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한국무용교육학회 ‘무용교사연구상’(2019),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심사위원 특별상’(2019), 한국발레연구학회 ‘한국발레아카데미상’(2020) 수상으로 자신의 진가를 높혀가는 교육자이자 발레 안무가이다.

출연: 이은미, 정수민, 배민지, 이정은, 김서희, 최유진, 현민지, 이지혜


장석용 글로벌이코노믹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