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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김수영 ‘봄밤’과 정선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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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김수영 ‘봄밤’과 정선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아름다움을 많이 보고 또 생각할수록 사람은 장수한다, 라고 난 무릇 주장하고자 한다. 점잖은 체면 차리고자 속내를 감추는 것을 미덕으로 삼은 조선의 선비의 단명(短命) 함은 그래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자연이나 사람의 아름다움이란, 그 생기(生氣)를 본래 지니고 있다.



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정선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 18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개인 소장.이미지 확대보기
정선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 18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개인 소장.

“참 이상하지. 이 감정은 뭐지…”

사월 초 봄밤. 그렇듯 말했는가. 무튼 이십 대 커플이 보였다. 커플은 분당 신기초교 운동장에서 농구공을 튕기며 놀았다. 그들이 순간 그림 같다, 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도시 분당. 분당에 사는 사람들은 한때 이렇게 자랑했다. “하늘엔 천당이 있고, 땅에는 분당이 있다”라고 말이다. 말하자면 중국인들의 그 흔한 사랑, “상유천당(上有天堂) 하유소항(下有蘇杭)”과 맥락이 통한다.

그나저나 천당 아래의 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의 중국 관광을 나 언제쯤이면 갈까나. 예전 같으면, 시큰둥할 일도 사랑에 빠지는 봄밤이 오면 날마다 새롭게 보이는 법이다. 이게 다 화초(花草) 덕뿐이다. 그런 ‘봄(見)’이 좋다. ‘봄(春)’이 우리들 곁에 왔다. 와주니 고맙다. 또한 잠시 머무르니 어찌 우리들 집콕만 하랴. 이 환장할 봄날에.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별안간 시구가 입에서 툭 터진다. 봄날은 간다. 봄이 왔는데, 봄인 줄을 모르면, 그의 마음에 봄이 어찌 생기겠는가. 그렇다. 봄(春)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봄(見)까지도 우리들은 어쩌면 즐겨야만 하리라. 남은 세월이 그리 많지 않아서다.

옛 그림 속, 미인 왕소군의 출세! 출새?


나는 아름다운 사람(美人)을 봄처럼 자주 보았다. 중국 한나라 원제 치세의 미인 왕소군(王昭君)의 사연을 천 년 뒤에 듣고서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虯)는 붓을 들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시를 종이에 적었다. 그 유명한 ‘소군원(昭君怨)’이 그것이다. “오랑캐 땅 흉노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했는데/ 봄이 와도 봄 같진 않으리라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는 시구는 지금까지 명문장이 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 후기의 화가 담졸(澹拙) 강희언(姜熙彦, 1710~1784)은 옛 사람 치고는 비교적 장수를 누렸는데, 그는 붓을 들어서 미인도 <소군출새(昭君出塞)>을 그려냈다. 다음이 그것이다.

강희언 ‘ 소군출새(昭君出塞)’, 종이에 수묵담채, 23.1×26cm, 개인 소장.이미지 확대보기
강희언 ‘ 소군출새(昭君出塞)’, 종이에 수묵담채, 23.1×26cm, 개인 소장.


이 그림을 두고서 미술평론가 윤철규는 이렇듯 말했다. 다음이 그것이다.

“강희언이 그린 그림 속 왕소군은 실제 모습대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는데, 사실 그 이전의 그림 속에서 여인이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 이전의 그림에서는 여인을 아름답게 그리기는커녕 전혀 그리지 않았을 정도였어. 초상화의 나라라고 하는 조선 시대를 통틀어 보아도 여인의 초상화는 서너 점에 불과하지. 조선 시대에 여자는 자신의 얼굴을 함부로 보여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야.” (윤철규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 151~152쪽 참조)

아름다움을 많이 보고 또 생각할수록 사람은 장수한다, 라고 난 무릇 주장하고자 한다. 점잖은 체면 차리고자 속내를 감추는 것을 미덕으로 삼은 조선의 선비의 단명(短命) 함은 그래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자연이나 사람의 아름다움이란, 그 생기(生氣)를 본래 지니고 있다. 조부모(祖父母)에게 손자와 손녀와 함께 지낼 시간을 많이 허락하는 것. 그것이 나는, 효도의 실천 즉 궁행(躬行)이라고 확신하는 편이다. 한 방에서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와 자란 경험이 있는 손자나 손녀의 경우 품성이 대부분 바르고 못된 구석이 적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나 며느리 된 입장에서 최대한 자기 자녀를 자주 부모에게 보여줌으로써 효도를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느닷없이 아프고 병드는 까닭에도 봄(春)을 누리지 못하는 봄(見)이 한몫을 한다. 내 생각에는 시인이나 화가는 여느 평범한 사람과 달리 자연이나 사물, 혹은 사람에게서 아름다움 면을 잘 발견하는 것이 그 차별화 된 특징이지 싶다.

서울에서 태어난 시인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을 모르는 우리 시대의 문학청년이 과연 있었던가. 추측컨대 아마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김수영 또한 봄밤이 지나고 초여름이 시작이 되었던 1968년 6월 15일. 그 밤 귀갓길에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머리를 다치는 사고만 없었더라고 한다면 제 생명을 다하는 복록을 실컷 누렸을 텐데 운명의 장난인지 비교적 단명(短命) 함으로 기록이 되었으니 이 점은 생각을 거듭할수록 몹시 분해진다.

김수영 시에는 이런 시가 문득 보인다. 그 일부를 옮긴다.

“오래간만에 거리를 나와 보니/ 나의 눈을 흡수하는 모든 물건/ 그 중에도/ 빈 사무실에 놓인 무심한/ 집물 이것저것// 누가 찾아오지나 않을까 망설이면서/ 앉아있는 마음/ 여기는 도회의 중심지/ 고개를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 태연하다”
(<거리> 부분)

이 시를 나는 오랫동안 입속에서 자전거 바퀴 돌리듯이 굴렸다. 저 치열한 봄(見)의 긍정이 어쩌면 더 많은 봄(春)을 누리려는 세세한 삶 속에 아름다움을 더 많이 발견했을 텐데, 하는 그러한 아쉬움이랄까. 그림처럼 펼쳐지는 한편의 좋은 아름다운 시의 풍작을 졸지에 가로막았을 터이다.

어쨌거나 앞서 소개한 한편의 아름다운 시 <봄밤>을 두고서 김용택 시인은 ‘필사하고 싶은 시’로 우리들에게 추천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권여선은 아예 소설 <봄밤>을 지어 청춘의 사랑이 아닌 중년의 사랑을 소설 속 주인공 영경과 수환을 통해서 그림 같이 보인 바 있다.

나는 종종 말한다. 그림은 그리움이라고. 그리움은 아름다운 것을 추억하는 거라고. 아름다움을 두고두고 눈으로 보고 싶어서 화가는 붓을 들어 올리는 거라고. 이렇게 말하면 내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듯이 공감이 되고 울림이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좋은 시 한편을 여기에 소개한다. 가만가만 조용히 읽어보시라.

좋은 그림은 그리움이 살아, 한편의 시가 된다


어떤 그리움은 문득 아름다움으로 번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작곡가에게 음악으로 들리고 화가에겐 보여서 그림이 된다. 그것들은 마치 아름다운 한편의 시처럼 어느 날 우리들에게 다가와 활짝 봄꽃을 피우게 마련이다.

여기에 좋은 그림은 그리움이 살아, 한편의 시가 된 것을 그대로 옮긴다.

그리움 / 신달자


내 몸에 마지막 피 한 방울

마음의 여백까지 있는 대로

휘몰아 너에게로 마구잡이로

쏟아져 흘러가는

이 난감한

생명 이동


이 시를 찬찬히 읽으면 꼭 그림이란 그리움이란 것을 실은 화자가 말하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마음 바닥에서 치고 올라오는 ‘흥(興)’을 가슴에서 마주치게 된다.

다시 앞에서 소개한 그림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으로 돌아가서 자세히 살피자. 한눈에 봐도 우리들은 알 수 있다. 저편 언덕(필운대)에 왜 18세기 조선의 선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는가를. 그렇다. 그들은 봄(春)은 만나는 봄(見)을 즐기고자 이른바 봄나들이 나온 것이 분명하다.

경전과 시를 달달 외우던 습관이 배어서 선비들은 상상컨대 각자 ‘봄, 꽃, 만남’이란 주제로 즉석에서 시 짓기 대회를 열었을 테다. 서 있는 양반이 준비한 시를 낭송하자 맞은편에 있는 좌중들이 고개를 복사꽃 꽃핀 언덕에 돌린 것을 보면 그리 감동을 줄만한 구석이 없는, 형편없는 시를 낭송하는 게 틀림이 없을 테다.

“그대의 시가 꽃보다 못하다니… 쯧쯧쯧.”

그림 속에서 서 있는 양반은 이제 입을 다물 수밖에. 그림에서 시낭송 소리가 별안간 뚝 끊긴 것이다. 이를 건너 언덕에서 잽싸게 특유의 스케치로 잡아챈 조선 최고의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놓치지 않고 “시가 꽃보다 못하니, 봄꽃이나 감상하시지”라고 농담을 건네는 듯 사람보다 꽃을 아름답게 수놓기 바쁜 붓놀림을 눙치면서 보여준다.

이 그림과 관련하여,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의 설명은 해박하다. 그곳에 가고 싶다, 라는 마음이 들뜨도록 부추긴다. 초대한다.

현재 필운대는 배화여고 건물이 들어서는 바람에 전망이 가려지고 공간이 옹색해졌다. (중략) 조선 시대 많은 문인이 그러했듯이 겸재 정선 또한 필운대에 올라 춘경(春景)을 만끽했던 모양이다. 봄 향기를 가득 품은 <필운대상춘>이 그 좋은 사례다. 한양을 꽃과 버드나무의 봄, ‘춘화류(春花柳)’라 노래했듯이, 필운대 아래 서촌 마을과 도성 안에는 연두색 봄버들과 분홍빛 꽃들이 만발해 있다. 옛 서울의 봄을 얘기할 때, 첫손에 꼽히는 그림이다. (중략) 고운 비단에 세필의 깔끔한 수묵담채화 소품이다.
(중략)
필운대의 소략한 산주름을 따라 그려진 농묵의 듬성한 ‘丁’자형 소나무들의 솔밭은 정선의 정형화된 진경화법을 드러낸다. (중략) 그림 속 필운대 마을과 남산에는 분홍빛 꽃나무들과 어울린 연녹색 버드나무가 가득하다. 버드나무는 복사꽃과 함께 도연명과 관련된 나무다. 도연명이 낙향해서 살았던 집 앞 개울가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어 도연명이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일컬었다는 것이다. 버드나무는 부드럽게 휘어지는 식물로 유연하게 대처하는 소통의 의미도 지니고 있어, 문인 선비의 모범적인 삶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태호 <서울 산수-옛 그림과 함께 만나는 서울의 아름다움>, 29~31쪽 참조)

연녹색 버드나무가 가득한 춘경을 즐길 수 있는 장소는 지금도 ‘천지 삐까리’로 많다. 이를테면 경기도 수원 연무동 방화수류정이 제법 운치가 있어 볼 만하다. 수원과 가까운 의왕시 왕송저수지는 봄밤을 데이트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고, 혹은 경산 반곡지 등은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 서넛 더불어 소풍을 가듯이 봄나들이를 한번쯤 해봄직한 명소임에 틀림없다.

봄 중에 가장 아름다운 때, ‘삼삼’


겸재 정선의 <필운대상춘>이란 그림 속에서 연녹색 버드나무와 분홍빛 꽃(살구꽃, 복사꽃)들의 대거 등장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 때는 아마도 음력으로 3월 초에 해당하지 싶다.

이와 관련,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가 쓴 <한시 마중>(태학사, 2012년)에 좋은 글이 얼른 보인다. 다음이 그것이다.

아름다운 봄이다. 봄 중에 가장 아름다운 때는 음력 3월 3일 무렵이다. (중략) 지금은 삼월삼짇날이 잊힌 명절이지만, 과거에는 1월 1일 설날, 5월 5일 단오, 9월 9일 중양절과 함께 매우 큰 명절이었다. 삼짇날은 상사일(上巳日)이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음력 3월의 첫 사일(巳日)이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음력 3월 3일을 상사일이라 하였다. 또 이날은 답청일(踏靑日)이라고도 하는데, 절기가 이즈음이 되면 교외에 나가 푸른 풀을 밟고 놀던 풍속이 있었다. 간혹 청명절(淸明節)과 겹칠 때도 있는데, 이때가 가장 아름다운 봄이다. 삼짇날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를 위한 날이다. 삼짇날에 조상 사당에 바치는 음식으로는 화전이 있었고, 화전을 장만하지 못하면 쑥떡으로 대신하기도 하였다. 특히 쑥떡은 중국인에게는 낯선 음식이었다. (같은 책, 229~230쪽 참조)

신축년 올해의 달력을 살피자니, ‘삼삼’한 그 날이란 4월 14일로 확인이 된다. 또한 이 날은 나의 절친 초등학교 친구의 생일이기도 하다. 수요일이니 ‘수’자로 시작되거나 끝나는 수제비 혹은 칼국수를 먹는 것이 나의 철칙이지만 떡집에서 특별히 쑥떡을 사서 친구를 불러내서 답청놀이를 낮에 실컷 해봐야 되겠다.

요사이 5천보에서 1만보를 자주 산책하는 편이다. 의왕 왕송저수지 길이가 5㎞라고 한다. 7500보 걸음이 된다고 그런다. 생일을 맞이하는 친구와 함께 모처럼 산보를 나설 것을 상상하니 마음이 금방 설렌다. 나 또한 음력 3월 8일 생이다. 그러니 끼리끼리 어깨를 부딪히며 연녹색 버드나무가 바람에 휘청거리듯이 낡은이가 되지 않고 유연하게 늙은이가 될 것을 의사소통 해보리라, 맘을 굳게 다져본다.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Life's an awful business, isn't it)

이렇게 권여선 소설 <봄밤>의 첫 문장은 시작되고 있다. 여주인공 영경의 친언니 영선과 영미의 대화인데 50대 중후반 나이로 추측이 된다. 막내 영경과 달리, 이 둘은 아주 평범한 여성이자 아줌마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늙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낡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어 아쉬운 면이 없진 않다.

소설 속 주인공인 ‘알루 커플’인 영경과 수환은 소설에서 중증 알코올 중독과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로 요양원에 입원한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사실 이 둘은 첫 결혼에 실패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재혼한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의 사랑이 나에겐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으로 각인이 되었다.

더구나 영경이 요양원 밖으로 나가서 어느 지방 읍내 편의점에서 컵라면에 소주 한 병, 맥주 두 캔을 사가지고는 혼술을 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이 봄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아름다운 생


그 봄밤이 시작이었고 이 봄밤이 마지막일지 몰랐다. (중략) 맥주 두 캔과 소주 한 병을 비우는 데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몸은 오슬오슬 떨렸지만 속은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꽉 조였던 나사가 돌돌 풀리면서 유쾌하고 나른한 생명감이 충만해졌다. (중략) 컵라면에 물을 부으며 그녀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서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애타토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영경은 작게 읊조렸다. (중략)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중략) 촛불 모양의 흰 봉오리를 매단 목련나무 아래에서 그녀는 소리 내어 울었다. 울면서도 자신이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감정조절 장애 때문에 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권여선, 천승희 영역 <봄밤-Spring Night>, 68~72쪽 참조)

서로 반쪽을 잃은 상대를 통해 다시 반쪽을 충전하고 위로가 되는 재혼 부부의 마지막 봄밤이 담긴 권여선의 소설은 식상하지 않다. 담담하다. 맑다. 아름답다!

게다가 소설 속 여주인공 영경을 통해서 만나는 시인 김수영의 봄밤을 만나게 되면 희미해졌던 어떤 결의(決意)가 보름달처럼 차오르는 감정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 봄날이 오십대 후반, 우리들에게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이 봄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나, 살아야 하겠다. 죽을 만큼 그리워할 수 있는 상대가 곁에 왔으니 말이다.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이 봄밤이 다하기 전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연녹색 버드나무와 분홍빛 복사꽃이 피는 부암동 산모퉁이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저 멀리 동해 바다로 여행을 가서 바닥을 헤아려보고 받아주는 낮은 자세로 영원히 낡지 않을 것을 애써 서둘지 않을 거다. 아름다운 생을 위하여.

늘, 항상, 언제나 그랬다. 타인의 눈엔 출새(出塞)로 보이나, 정작 자신의 마음엔 출세(出世)인 것을 우리들은 잘 모르고 있다.

이게 '나'가 늙어가지 않고 자꾸만 낡아지는 원인을 제공한다.

◆ 참고문헌


김수영, 이영준 엮음 <김수영 전집 1-김수영 사후 50주년 기념 결정판>, 민음사, 2018.

김용택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김용택의 꼭 한번 필사하고 싶은 시>, 위즈덤하우스. 2015.

이종묵 <한시 마중>, 태학사. 2012.

권여선 <권여선 소설집-안녕 주정뱅이>, 창비, 2016.

권여선, 천승희 영역 <봄밤-Spring Night>, 아시아, 2014.

이태호 <서울 산수-옛 그림과 함께 만나는 서울의 아름다움>, 월간미술. 2017.

윤철규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 토토북. 2014.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