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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최하림 '유리창 앞에서'와 앙리 마티스 '대화(The Convers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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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최하림 '유리창 앞에서'와 앙리 마티스 '대화(The Conversation)'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살다 보면 느닷없는 이별 통보를 받기 일쑤다. 이것은 대화의 단절로 이어진다. 너와 나를 금세 낯선 타인으로 만든다. 머쓱하게 방치한다. 그렇다. 서로가 가닿을 수 없는 경계선을 긋는다. 분단국가 38선처럼. 비무장지대로 전환된다. 여기, 그런 느낌을 주는 서늘한(?) 그림이 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가 그렸다는 라는 명화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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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앞에서 / 최하림

우리들 삶의 소란스러움은

거리와 시장 언저리에서 떠난다

그리고 그 시간의 어머니들의 머리는

어느 때보다도 빛나고 요란스럽다

그리하여 밤으로 달려가고 있는 제 가정家庭의 슬픔을

벗어나려는 여인들이여 허리 구부린 여인들이여
나는 오늘 별들처럼 총총하고 싶어서

없는 유리창의 유리를 닦고 있다

앙리 마티스 ‘대화(The Conversation)’,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에르미타슈 국립미술관.이미지 확대보기
앙리 마티스 ‘대화(The Conversation)’,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에르미타슈 국립미술관.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리낄 것 없이 사랑할 권리, 이 세상에는 사랑이란 단 한가지뿐이다. 여자의 몸을 껴안는다는 것, 그것은 또한 하늘에서 바다로 내려오는 신기한 기쁨의 빛을 자신의 몸에 껴안는 것이다.”

이 문장을 나는 가끔 연필로 베낀다. 필사(筆寫)를 해본다. 세계적인 소설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03~1960)가 쓴 산문집 <결혼·여름>에 글이 보인다. 이 문장이 그냥 좋았다. 아주 오랫동안.

작가들의 대화법


겨울철, 집콕 생활을 했다. 그때에 인기 소설가 김금희(金錦姬, 1979~ )의 장편소설 <복자에게>(문학동네, 2020년)를 서가에서 처음 꺼냈다. 펼쳤다. 밤을 새우며 봤다.

이게 얼마 만인가. 설렘과 흥분의 도가니로 한 권의 소설책을 하룻밤 사이에 나, 재미나게 본 적이 과거엔 있긴 있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강, 권여선, 김금희 등은 관심이 간다. 주목해 봄직하다. 그들을 신경숙·공지영 이후로 거의 20년 만인가, 처음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가슴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 그런 까닭에 평단은 ‘좋은 작가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늦었지만 나도, 그것을 인정한다.

고고리섬으로 전학을 간 건 1999년이었다.

김금희 소설<복자에게>의 첫 문장이다. 고고리섬은 제주도에 대한 열렬한 관심과 애오라지 사랑, 선망어린 환상 등이 빚은 가상의 섬을 말함이다. 말하자면 지도엔 없는 그런 섬이다. 어쨌든 소설에 등장하는 그 섬의 안내, 설명은 이렇다.

“고고리섬은 최남단 마라도보다 조금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 시간이면 다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봄의 청보리밭으로 유명한 섬이었다. 고고리는 이삭이라는 뜻의 제주어였다. 섬은 여객선 선착장이 있는 북리와, 주택을 비롯한 섬의 기반시설들이 갖춰져 있는 동리로 나뉘었다.”(같은 책, 11쪽 참조)

작가가 만든 가상의 섬. 고고리섬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만약에 좋은 사람이 생기는 그런 봄이 오면 청보리밭 펼쳐지는, 그곳이 문득 가고 싶었다. 섬은 온통 파랑의 쪽빛이 바닷물로 출렁거릴 것이다. 그 고고리섬은 어디 한 군데도 막힌 곳 없을 것이다. 시야가 탁 트이는 기막힌 풍광을 보여줄 것만 같았다.

아무튼 고고리섬. 섬의 동서남북을 좋은 친구와 함께 마냥 걷고 싶어졌다. 독서 후에 일어난 해찰이다. 상상력이다. 병적인 후유증, 뭐! 그런 거다.

봄이라 해도 태양은 여름 못지않게 뜨거웠다. 그늘 하나 없는 섬을 다친 다리를 끌며 걷자니 몸 전체에서 땀이 났다. 야트막한 언덕에는 돌담으로 경계를 쌓은 제주식 무덤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모는 그중 작은 무덤들은 아이들의 것이라고 했다. 옛날 섬에는 아이들의 사망률이 높았다고. 죽을 이유는 얼마든지 많지 않겠니. 그 어리고 어린 것들이 말이야. 제주에는 아예 그렇게 가여운 애기들을 가리키는 설룬애기라는 말이 있고 서럽고 불쌍한 엄마를 가리키는 설룬어멍이라는 말도 있다. 슬픔이 반복되면 그렇게 말로 남는 거야. 나 같은 어린아이들이 죽을 수 있다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던 나는 고모의 말에 콧날이 시큰했다.

“야, 너.”

생각에 잠겨 터덜터덜 걷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용인대 호랑이 체육관’이라고 적힌 추리닝을 입은 여자애였다.

“너 보건소 의사 선생님네로 이사온 애지?”

말하는 모양으로 봐서는 나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첫 만남에 말을 놓아도 되나. 이게 이 섬 어린들의 예법인가. 나는 기분이 상해서 못 들은 척 발을 끌면서 계속 걸었다. 걔는 내가 대화를 거절하는데도 개의치 않고 아예 따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다 매점까지 같이 가면 없는 돈을 털어 아이스크림을 사줘야 하나, 걱정부터 들었다.

그렇게 동행 아닌 동행이 이어지는 동안 그애는 끔찍이도 말이 많았다. 어디서 났는지 짧은 밧줄을 손가락 사이에 꼈다 뺐다 하면서 야 너 이거 아냐? 이거 에델바이스다, 야 너 이거 아냐? 저 새 가마우지다, 야 너 이거 아냐? 이거 고넹이돌인데 여기 올라가면 태풍 온다, 야 너 이거 아냐? 하며 잘난 척을 했다. (같은 책, 18~19쪽 참조)

소설의 스토리 전개는 이런 식이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절친(고복자와 이영초롱)의 첫 만남이기도 하다. 섬이 고향인 고복자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부득이 서울에서 시골 섬으로 전학 온 이영초롱의 ‘대화(對話)’라는 것이 그렇듯 ‘야 너 이거 아냐’로 포문을 연다. 이 장면이 몹시 매력적이었고 인상적이었다. 마치 TV 화면에서 드라마로 직접 보는 듯, 눈앞이 집중되면서 색감이 ‘파랑’으로 선명했다. 한편의 명화(名畵)처럼.

살다 보면 느닷없는 이별 통보를 받기 일쑤다. 이것은 대화의 단절로 이어진다. 너와 나를 금세 낯선 타인으로 만든다. 머쓱하게 방치한다. 그렇다. 서로가 가닿을 수 없는 경계선을 긋는다. 분단국가 38선처럼. 비무장지대로 전환된다. 여기, 그런 느낌을 주는 서늘한(?) 그림이 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가 그렸다는 <대화>라는 명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림을 보자. 죄수 복장의 남자와 상복 차림의 검정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나온다. 그 두 사람은 시의 한 줄처럼 “없는 유리창의 유리”를 닦지도 않을뿐더러 절묘하게 창 밖으로 비켜나 있는 그런 모습이다. 창 안에는 멀리, 녹색의 나무와 적색 계열의 꽃 핀 정원이 등장한다. 추측컨대 계절은 봄에서 여름의 길목을 향하는 5월인 듯하다.

바깥으로 외출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는 꼼짝 않고 서 있거나 혹은 앉아 있다. 응시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런데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입을 꽉 다물었기 때문이다. 응시는 하되 침묵(沈黙)으로 일관하는 분위기다. 정적(靜寂)의 시간으로 남녀는 서로 대치중이다.

이 명화 작품은 앙리 마티스가 1908년에 처음 그리기 시작해서 무려 5년 만에 완성했다. 사이즈(177 x 217㎝)가 제법 크다. 그림에는 유리창이 보이지 않는다. 뻥 뚫린 난간만이 보일 뿐이다. 검정색 난간을 자세히 살피자. 검정색 프레임엔 프랑스어 글자가 ‘NON(안돼)’이라고. 감상자의 시선에도 얼핏 보일 것이다. 당최 무엇이 ‘안 된다’라고 화가는 숨긴 걸까.

화가의 의중(意中)은 뻔하다. 남녀 사이. 즉 부부(夫婦)의 깡마른 대화를 사뭇 걱정한 것이다. 바깥 정원의 풍경처럼 꽃과 나무처럼 잘 어우러질 수 있는 대화가 이어지길 바라는 진정성을 메시지화 그림에 붓질을 한 셈이다. 이와 관련 인문학에 정통한 채운 작가는 <철학을 담은 그림>(청림출판, 2015년)에서 일찍이 설명했다. 설명에는 긍정의 시선과 따뜻한 마음이 녹아들었다. 다음이 그것이다.

앙리 마티스의 <대화>를 볼까요? 두 남녀가 마주보고 있습니다. 무척 단순해 보이지만,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침묵과 정적, 그리고 두 사람 사이를 감싸는 공간의 공기가 상당히 신비롭게 표현된 작품이지요.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합니다. 앉아 있는 여성이나 서 있는 남성이나 최대한 예의를 갖춰 상대의 침묵에 귀 기울입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침묵의 대화를 한참 응시하다 보면, 창밖에 핀 붉은 꽃처럼 그들의 소리가 저 파란 공기 속에서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아니 어쩌면 느리고 낮게 깔리는 이들의 대화가 저 바깥으로까지 퍼져 꽃을 피웠는지도 모르지요. 이토록 그윽하고 아름다운 대화라니요! (같은 책, 279쪽 참조)

이 글을 읽고, 다시 그림을 찬찬히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그림 속 남녀는 곧 말문을 열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아무튼 채운 작가의 설명은 삶에 지친 우리들의 마음을 조금은 다독이며 청량하게 가시게 해주는 힘이 있다. 다시 말해, 타자와의 소통을 가능케 독자를 초대한다. 특히 이와 같은 글은 독자는 메모를 해봄직하다.

니체를 인용하자면,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모르는 것,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례’입니다. 자신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을 배려할 수 없고, 스스로 행복할 수 없다면 단 한 사람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충분히 ‘이기적’이 되어야 합니다. 타인의 말과 시선에서 벗어나 고독 속에서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말이죠. (같은 책, 67쪽 참조)

남녀의 만남을 우리는 흔히 ‘LOVE’라고 한다. 이런 만남은 첫 사랑이 되기도 한다. 또한 밤하늘의 별보다도 더 많은 이별을 종종 낳게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남녀는 결혼까지 골인하기도 한다. 다음 수순이 결혼의 가장 큰 문제가 되는데, 그것은 ‘대화의 부재’에서 원인을 제공한다. 틈의 간극이 일어나고 커다란 구멍까지 생겨난다.

남녀가 막상 부부로 살면 왜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일까. 그 시간이 결혼기념일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짧아만 지는 것일까. 의문이다. 아무튼 대화의 부재에 익숙한 부부들은 변명을 하긴 한다. 소위 말하는 ‘의리와 정’을 내세운다. 정말 그런 것일까.

요컨대 대화의 부재는 이혼이란 파국을 통과의례로 이어진다. 이 때문이다. 우리는 이따금 부부로서 산책을 나설 줄 알아야 한다. 서 있지만 말고, 앉아 있지만 말고 저기 녹색과 파랑의 ‘숲’을 찾아가고 집 마당의 ‘정원’에서 걷고 말을 주고받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 앙리 마티스의 <대화>라는 작품은 그것을 우리에게 시사해주고 있는 셈이다.

가정(家庭)이란 파란의 ‘숲’


녹색이나 파란색은 자동적으로 각성 상태를 낮춰준다.” (수 스튜어드 스미스 <정원의 쓸모>, 90쪽 참조)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야지 건강해진다. 그렇다. 만고불변 진리이다. 내가 건강해야지 나부터 행복할 수 있다. 가정을 잃고서 나는 한동안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우연히 숲과 정원을 찾는 날이 늘어나면서 시나브로, 단잠에 빠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전보다 매우 나는 건강해졌다고 자신할 수 있다.

‘숲’이 준 선물이었다. 그때부터다. ‘숲’이란 말을 난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느 날에는 ‘숲’을 한자로, 나는 쓴다. 가령 이렇듯 말이다.




사람 인‘人’ + 한 일‘一’ + 설 립 ‘立’ 자를 내리 아래로 쓰자. 그러면 한글 ‘숲’과 비슷한 글자가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한자의 의미를 둬서 ‘숲’이란 글자를 읽으면 철학이란 생각이 뭉텅뭉텅 다가온다. 그 대강의 의미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내(人)가 꽃과 나무가 있는 정원. 혹은 숲에 문득 서(立) 있게 되면 지쳐 쓰러진 마음이 하나씩(一) 세워진다, 라는 뜻이 새겨진다.

그렇다. 산과 강, 들녘의 피어나는 꽃과 나무, 강물이나 구름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면 마음속에 깃든 미움은 점차 비워지고 사라진다.

어느새 심신의 안정감이 돋보이는 파랑 색감의 사랑이 폐부에 꽉 들어찬다. 이것은 나의 체험이기도 하다. 숲에서 깨우친 일종의 배움이었다. 그럼에도 뭔가 허전했다. 부족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한구석이 찜찜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오경아 작가의 <안아주는 정원>(샘터, 2019년)이란 책을 보면서 답을 찾는 글을 마주쳤다. 여기에 소개한다.

정원은 숲이나 산과는 달리 인간의 통제에 의해 관리되는 공간이다. (중략) 정원은 인간의 주거 공간에서 세심한 통제와 관리에 의해 식물과 곤충, 동물이 조화롭게 존재하는 공간이다. 자연의 질서가 아닌 인간의 질서로 만들어진 것이다. (같은 책, 142쪽 참조)

이거였다. 허전함을 내가 느꼈던 이유가. 나는 집(家)에 정원(庭園)을 꾸며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꽃 화분 몇 개를 꽃가게에서 구입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하면 내 집 정원을 만들 수 없는데도.

아무튼 오경아 작가의 책을 통해서, 나는 조만간 내가 생활하는 집에 서투르지만 직접 정원을 꾸미고자 할 것이다. 그럴 생각이다. 이렇게 해야만 소위 말하는 ‘가정(家庭)’을 내가 통제하고 진짜 탄생시킬 수 있는 거니까.

이런 다짐의 마음은 벌써 10여 년 전에 작고하신 최하림(崔夏林, 1939~2010) 시인의 시를 펼쳐 볼 때마다 더욱더 간절해진다. 무시로 찾아든다.

앞에서 소개한 시 <유리창 앞에서>를 나는 무척 좋아하는 편이다. 이 시를 마치 산책하듯이 오르락내리락 걷다가 겹친 그림이 마티스의 <대화>였다.

총 8행의 시. 그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부분 “나는 오늘 별처럼 총총하고 싶어서/ 없는 유리창의 유리를 닦고 있다”라는 시구에 나는 전율하듯 흔들렸다.

“없는 유리창”이야 이제라도 만들면 된다. 하지만 시인처럼 수시로 닦지 않으면 유리창은 금세 지저분해진다. 선명함을 잃어서 그 유리창 너머로 자연을 타인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이 문제이다. ‘나’를 잃게 한다. 그리하여 ‘너’에게 가려는 길목에서 디딤돌이 되지 못하고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다.

남녀로서 사랑할 권리


시인은 시에서 유리창 앞에 서성인다. 유리창 너머 바깥에는 녹색의 나무가 자란다. 녹색의 나무 아래엔 작고 예쁜 붉은 색의 꽃이 피어나고 있다. 그런 가정을 시인은 상상하고 있다.

그 가정에 들어가면 모든 소음은 차단되고 아웃된다. “우리들 삶의 소란스러움은/ 거리와 시장 언저리에서 떠”나는 어스름의 저녁이 된다.

그리하여 “그리고 그 시간의 어머니들의 머리”를 아들로서 시적 화자는 퇴근길이면 습관처럼 회상하기에 이른다. 또한 어머니를 닮은 아내와의 결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한 모습이 다. 아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고 요란스”러운 표정의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를 맞이할 것이다. “그리하여 밤으로 달려가고 있는 제 가정家庭”에 모든 남편들은 안착하고 싶을 것이다. 안주(安住)의 삶을 온통 누리고 싶을 테다.

이와 반대로 결혼한 여성들은 어떠한가. 일탈과 바람을 어쩌면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의 경계를 “벗어나려는 여인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지게 된다. 경제적 불안정과 척박한 살림살이에 늙어서 “허리 구부린 여인”으로 노년을 맞이하고 있다.

이 점을 대부분 남편들은 분명히 안다. 그럼에도 내 아내를 어째서 사랑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사랑할 권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의미에서 여성으로서 그림을 바라보는 채운 작가의 희망적인 시선은 위기의 가정에 ‘대화가 필요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에 충분하다.

밤으로 달려가고 있는 제 가정家庭의 슬픔

이 구절에서 나는 거미가 되어 그물을 만들어 보았다. 그 색감이 ‘파랑’으로 물감처럼 번졌다. 청야(靑夜)! 즉 푸른 밤이 연상되었다. 그러면서 마티스의 그림에 청색이 많이 사용된 이유를 찾기에 이르렀다. 책 <파랑의 역사>(민음사, 2011년)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다음이 그것이다.

청색은 진하면서도 절제된, 그리고 멀찍이 보이는 느낌을 주면서 밤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주 미묘한 것이었다. (같은 책, 183쪽 참조)

자, 우리는 이제 시와 그림을 함께 놓고 다시 읽고 보도록 하자. 시인의 언어 절제와 멀찍한 시선의 감정이 비로소 이해가 되고, 또한 화가의 붓질이 왜 파랑을 유독 많이 사용하려는 것인지 그 비밀이 파헤쳐 질 것이다. 그렇다. 침묵의 절제와 서로에 대한 긍휼의 응시. 이것만이 남녀의 대화를 잇는 유일한 방법이고 부부로서 사랑할 권리가 될 것이다.

사랑이란 말의 한자, ‘思量’의 비밀


리카르드 베리 ‘북유럽의 여름 저녁’,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스웨덴 에덴보리 미술관.이미지 확대보기
리카르드 베리 ‘북유럽의 여름 저녁’, 20세기, 캔버스에 유채, 스웨덴 에덴보리 미술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란 낱말은 한자말에서 유래가 되었다. 한자말 ‘사량(思量)’이 오늘날의 ‘사랑’으로 변질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량이란,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과 상대방 입장을 헤아리려는 마음이 합친 결과물로 봐야 한다.

리카르드 베리의 <북유럽의 여름 저녁>은 십대 소녀와 소년, 혹은 결혼 전에 청년과 처녀가 통과의례로 치루는 첫 사랑, 첫 만남이 연상되는 풋풋하고 싱그러운 좋은 그림으로 보인다.

베스트셀러 <삶이 그림을 만날 때>(휴앤스토리, 2018년)의 안경숙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될 지는 알 수 없어도 언젠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둘만의 세상을 소중하게 만들어가야겠지요. 그 세상을 만드는 건 마치 정원을 가꾸는 것과 비슷하리라 짐작합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기대를 잔뜩 품고 첫 삽을 뜨며 씨앗을 심는 마음이랄까요. 적당한 따스함과 배려로 가꾸면 정원에는 꽃이 만발하겠지만, 지나친 관심과 간섭은 정원에 꽃을 피우기는커녕 싹을 틔워보지도 못하고 정원을 황폐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떤 정원을 만들 것인가는 전적으로 두 사람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중략) 사랑은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 것 아닐까요. 리카르트 베리(Sven Richard Bergh, 1858~1919)의 <북유럽의 여름 저녁>처럼 말이지요. 이 그림은 서로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각자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따로 또 같이’ 꿈을 가꾸고 함께 나아가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같은 책, 85~87쪽 참조)

결론은 이렇다. 안경숙 작가의 시선처럼 남녀의 사랑이란, 남녀의 결혼이란 것은 마치 집에 ‘정원을 가꾸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 하여튼 우리가 그것을 한편의 시와 명화를 통해서 뭔가 느낀 바가 있거나 조금은 배워야만 할 것이다. 요컨대 ‘사랑’이 아니라 ‘사량’을 말이다.

◆ 참고문헌


최하림 시선집 <나는 나무가 되고 구름 되어>, 문학과지성사, 2020.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결혼·여름>, 책세상, 1987.

김금희 <복자에게>, 문학동네, 2020.

채운 <철학을 담은 그림>, 청림출판, 2015.

안경숙 <삶이 그림을 만날 때>, 휴앤스토리, 2018.

수 스튜어드 스미스, 고정아 옮김 <정원의 쓸모>, 윌북. 2021.
오경아 <안아주는 정원>, 샘터. 2019.

미셀 파스투로, 고봉만·김연실 옮김 <파랑의 역사>, 민음사, 2017.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