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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이성복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와 귀스타브 카유보트 '창가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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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이성복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와 귀스타브 카유보트 '창가의 남자'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시적 화자로 창밖을 내다보라. 그러면 그림 속의 한 남자가 된다. 그 남자의 시선으로 저 멀리 그녀에게 자꾸 향하고 기울게 된다. 핑크빛 원피스의 그녀가 오스만대로 가운데에 서 있다. 광장 길 정중앙에 문득 멈춰있다. 고개를 푹 숙였다. 길바닥에 약간 떨어뜨린 상처로 아픈 모습이다. 반면에 창가의 남자는 그녀를 붙잡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마치 황제가 된 듯이 그녀로부터 초연한 뒷모습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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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 이성복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강이 하늘로 흐를 때,

명절 떡쌀에 햇살이 부서질 때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감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창가의 남자(A Young Man at His Window)’,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이미지 확대보기
귀스타브 카유보트 ‘창가의 남자(A Young Man at His Window)’,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이 그림을 보면 한 편의 시가 놓이면서 과거의 치욕이 들린다. 아팠다. 시를 느릿느릿 줄을 따라서 손톱으로 강물을 슬쩍 만지듯 튕기자면 왈칵 눈물이 주르륵 쏟아질 것만 같다. 행복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조용필의 노래 ‘창밖의 여자’(1978년 作)가 그림처럼 보였다.

그런 소중했던 향수의 시간을, 난 지금도 온전히 가지고자 열망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창밖으로 여자를 이별하고는 혼자가 되어도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냥 좋았던 것이다. 그렇다. 한 여자는 떠났어도 시와 그림은, 늘 내 곁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매 썩 괜찮은 하루를 또, 나 기필코 살아내게 된 것이다.

창가의 남자, 창밖의 여자

19세기 프랑스 파리. 그 도시를 가장 아름답게 붓질로 그렸다는 인상주의 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984)의 그림은 어쨌거나 내 취향일 것이다. 강물처럼, 꽃과 나무가 있는 오르막의 산책길처럼 빛과 녹색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그런 남자가 되고 싶었다. 창밖을 간혹 바라보며 무언가를 물끄러미 오랫동안 나, 응시하고 싶었다.

카유보트의 <창가의 남자>를 자세히 보라. 그림을 보자면 시인 이성복(李晟馥, 1952~ )이 쓴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의 시적 화자가 덧칠된다. 화자가 된 그 남자의 목소리는 저음이라서 언뜻 침묵한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곧 들릴 테다. 그 남자의 첫 마디는 이렇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시적 화자로 창밖을 내다보라. 그러면 그림 속의 한 남자가 된다. 그 남자의 시선으로 저 멀리 그녀에게 자꾸 향하고 기울게 된다. 핑크빛 원피스의 그녀가 오스만대로 가운데에 서 있다. 광장 길 정중앙에 문득 멈춰있다. 고개를 푹 숙였다. 길바닥에 약간 떨어뜨린 상처로 아픈 모습이다. 반면에 창가의 남자는 그녀를 붙잡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마치 황제가 된 듯이 그녀로부터 초연한 뒷모습을 선물한다. 검정색 양복을 입었다. 힐끗 보이는 흰색의 셔츠에서 빛이 난다. 이런 남자의 뒷모습이란 참으로 근사하다. 이 얼마나 멋진가. 심플하고 매혹적인가. 또한 남자다우며 낭만적인가.

이와 관련, 화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우지현이 쓴 두 번째 책 <혼자 있기 좋은 방>(위즈덤하우스, 2018년)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다음이 그것이다.

카유보트는 창에 세상을 담는 화가였다. 언젠가 프랑스의 작가 조리 카를 위스망스가 그에 대해 ‘파리의 빛을 그리는 화가’라고 예찬한 바 있듯이, 그는 빛, 바람, 날씨, 계절, 도시 풍경 그리고 사람들의 삶과 내면까지 캔버스에 담으며 아름다운 세계를 구축했다.

카유보트가 창을 통해 이상적인 세계상을 형성해갔듯이, 힘든 시절에 창을 보며 마음을 다잡고 다시 꿈꿀 수 있었듯이, 또 그의 그림 속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창은 우리를 세상과 단단하게 연결해준다. (중략) 일상의 공간에서 저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인지하게 한다. 세상으로 향하는 자그마한 통로, 이 투명한 유리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비록 세상살이가 춥고 두렵고 막막하고 그래서 숨고만 싶더라도 끝끝내 창을 닫지 않는다면, 다시 열 수만 있다면, 싱그러운 햇살처럼 반짝이는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이제 정말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해야겠다. 햇살과 바람이 가져다줄 기쁜 소식을 맞이하며.
(같은 책, 90~91쪽 참조)

1978년. 그때의 나는 까까머리 중학생 2학년으로 우리 나이로 고작 열다섯이었다. 내 고향 경기도 수원과 아주 가까운 화성 출신의 조용필(趙容弼, 1950~ ) 가수를 무척 흠모하면서 마냥 좋아했더랬다. 그가 불렀던 대중가요. 이를테면 <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등을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틈틈이 가수 흉내를 곁들여서 마구 불렀으리라.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손

돌아서 눈감으면 강물이어라

한줄기 바람 되어 거리에 서면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조용필의 노래는 지금에 와서 들어도 여전히 울림이 있어 좋다. 아름답다. 깊고 감성적이면서 호소력이 짙어서 내 가슴이 쩌릿해지고 아파서 애절하게 된다. 그림 속 남자처럼 창가에 우뚝 서서 검정색 톤의 양복을 갖춰 입고 두 발을 어깨넓이로 벌리고 두 팔은 바지춤에 감추고 가끔은 노래를 부르고만 싶다. 그런 내 뒷모습을 상상해 보는 시간은 열다섯 소년 시절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십 대 청춘시절, 연애를 뜨겁게 나눴던 나와 이별한 그 여자를 굽어보게 한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왜 송곳에 찔린 것처럼, 성난 불에 덴 것처럼, 짠 소금을 문 입술처럼 아프고 무섭고 맛은 짜고 쓰기만 했던 것일까.

지난 과거는 “돌아서 눈감으면 강물”처럼 다 흘러간다. 다시는 붙잡진 못한다. 그러니 어쩌랴. 그냥 놓아줘야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줘야 한다.

살다 보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저만치 간 것을 뒤늦게 알아채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를 드러낸다.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사랑하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에 맞닥뜨릴 때 상처의 자국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문다. 깨끗해 보이게 마련이다.

아주 가끔은 강에 간다. 저수지나 호숫가를 찾는다. 그곳에서 새벽과 아침 사이에는 안개가 사물을 가린다. 껴안는다. 이 긴 포옹이 막 풀릴 즈음에 강물처럼 안개도 사라지고 저만치 흘러간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잠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라는 시인의 절창(絶唱)이 서른에는 몰랐고, 마흔이 되어서는 흐릿하나 비로소 다가왔다. 아무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먼지처럼 쌓여서 우리의 인생을 만들고 나의 일생이 되어 무늬를 만드는 것 같다.

어느 학자가 “독서독락, 시생애”(讀書獨樂, 是生涯)라고 그랬던가. 아무튼 그림과 시를 책으로 만나서 읽고 홀로 즐길 줄 아는 경지, 아직은 먼 길이지만 이것이 내 인생이 되길 나는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김애란의 소설 <바깥은 여름>(문학동네, 2017년)에 등장하는 명문장을 나는 기억한다.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되는 것”(같은 책, 20쪽 참조)이 어쩌면 우리네 삶의 현장인 것을.

창가의 남자가 되어서, 혹은 창밖의 여자가 되는 입장이 되어서 우리는 각자 혼자가 되어 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알고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 별 볼 일의 내 사랑을 만나는 인생이란 게 한때에 지나지 않고 그리 많이 허락되지도 않는 것이니 그 남자(그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에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사랑해야만 미련이나 후회가 아마 없을 게다.

사월의 노래, ‘비처럼 음악처럼’


이십 때 초반에는 잘 몰랐고, 내 나이가 서른이란 터널을 막 지나면서 사랑하게 된 대중가요가 있다. 이미 작고한 가수 김현식(金賢植, 1958~1990)이 부른 <비처럼 음악처럼>이 그것이다. 이 노래를 난, 자주 차에서 듣는 편이다. 그것도 비오는 날이면 으레.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오 아름다운 음악같은

우리의 사랑의 이야기들은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오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오 아름다운 음악같은

우리의 사랑의 이야기들은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오 그렇게 아픈 비가 왔어요

오~ 오 오


절규에 가까운 노래의 가사가 실은 참 시적이다. 시적인 이 노랫말을 차 안에서 들으면서 내 휴대폰 메모장에 저장해 둔 이성복 시인의 ‘음악’을 찾아 꺼내게 되면 둘은 서로 친화력을 발휘한다. 잘 어우러지면서 쓱쓱 비벼진다. 전주비빔밥처럼. 아무튼 명시 ‘음악’은 이성복 시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문학과지성사, 1993년)에 나온다. 다음이 그것이다.

음악 / 이성복


비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라울 뒤피 ‘푸른 바이올린(Le Violin Bleu)’, 20세기, 종이에 잉크, 구아슈, 수채, 개인소장.이미지 확대보기
라울 뒤피 ‘푸른 바이올린(Le Violin Bleu)’, 20세기, 종이에 잉크, 구아슈, 수채, 개인소장.


프랑스 화가 라울 뒤피(Raoul Dufy, 1877~1953)가 그렸다는 <푸른 바이올린>을 가져다가 누군가 김현식의 노래를 연주한다면 정말 좋을 것 같고, 아니면 곡만 연주하되 시낭송을 이성복의 시로 대체해도 정말이지 좋을 것이다. 그렇다. 시에서 대중음악이 투명하게 보이는가 하면 그림이 아스라이 들려오기도 한다.

이에 대해, 안경숙 작가는 저서 <삶이 그림을 만날 때>(휴엔스토리, 2018년)에서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라울 뒤피의 <푸른 바이올린>을 보노라면 답답한 겨울옷을 벗어던진, 상큼한 봄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느낌입니다. 지중해 빛깔 같은 푸른색이 시원스럽지요. 무거운 겨울옷에서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은 것 같은 산뜻함, 현을 튕기면 금방이라도 울려 퍼질 듯한 발랄함이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중략) 붓끝에서 리듬을 타고 흐르는 간결한 파도며 그가 평생 즐겨 그렸던 소재인 음악은 그렇잖아도 미술의 이웃사촌 격인 음악에 호기심이 많던 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중략) 뒤피의 그림에서 평생 일관적으로 드러나는 주제는 역시 ‘파란색’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중략) 뒤피의 그림에 손을 대면 파란 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만 같습니다. (같은 책, 195~197쪽 참조)

그림 속에 푸른 바이올린은 강화도 석모도 바닷가에서 밤새 건져 올린 고기를 잡는 어부의 손끝처럼 독자를 향하여 그 마음에다 힘을 주기에 부족함이 하등 없어만 보인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기 딱 좋은 사월의 봄으로 번진다. 왼쪽 가슴께에 두근두근 스며든다. 올해 사월은 유독 봄비가 잦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성복의 뛰어난 시집을 수시로 서가에서 꺼내 껴안고는 달게 잠이 들었을 테다.

지난 주말이었다. 나는 여친과 함께 강화도 여행을 다녀왔다. 마지막 날이었던가.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지중해 풍의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카페 ‘산토리니’(www.santorinips.com)에서 잠시 머물렀다. 거기서 바라본 한낮의 바닷가는 라울 뒤피가 붓질로 그린 <르아브르 바다>가 보였다. 꽃밭 너머 해변에서 바다를 보고 비처럼 음악처럼 살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미소가 하늘의 색, 바다의 색처럼 푸르게 시원스럽게 쉼표를 찍고 있었다. 그렇다. 살면서 좋은 사람과 여행을 다닐 수 있는 것도, 좋은 시와 그림을 우연히 마주침하는 것도 실은 ‘소확행’이다.

여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은 ‘내가저수지’를 이른 아침에 그녀와 산책했을 때이다. 산책하는 가운데에 스페인의 시인이자 극작가, 화가로 아주 유명한 산티아고 루시놀(Santiago Rusiñol, 1861~1931)의 명화 <푸른 정원>의 분위기를 몹시 닮은 아름다운 정원을 마주치게 되었다. 딸의 이른 결혼으로 자기의 꿈을 현실로 옮길 수 있었다는 어느 여성 작가와의 만남은 앞으로 인연으로 이어질 것만 같다. 여성 작가는 화가 프리다 칼로를 좋아하고 존경한다고 수줍게 말했다. 꽃 핀 정원에다 물을 정성껏 뿌리면서.

산티아노 루시놀 ‘푸른 정원’, 캔버스에 유채, 20세기, 스페인 카달루나미술관.이미지 확대보기
산티아노 루시놀 ‘푸른 정원’, 캔버스에 유채, 20세기, 스페인 카달루나미술관.


강화도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여친에게 산티아고 루시놀의 <푸른 정원>을 보여주면서 또 그곳에 가보자고 졸랐다. 약속을 받았다. 그러면서 10년 후에도, “비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을 우연히 강화도의 내가저수지 여성 작가의 일상과 만남처럼 또 느끼고만 싶어졌다. 이것이 우리네 인생의 맛이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이성복 <남해 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이성복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1993.

우지현 <혼자 있기 좋은 방>, 위즈덤하우스, 2018.

안경숙 <삶이 그림을 만날 때>, 휴엔스토리, 2018.

김애란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 2017.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