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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권대웅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나혜석 ‘해인사 3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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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권대웅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나혜석 ‘해인사 3층 석탑’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화가에게 손은 붓의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시인에게 있어서 눈은 곧 붓이다. 절집 대웅전 앞마당엔 꼭 3층 석탑이 있게 마련이다. 석탑의 모양을 화가는 손으로 그린다. 반면에 시인은 눈으로 붓을 대신함이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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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권대웅

하얀 싸리꽃이 밤새

대웅전 앞마당을 쓸고 있다

한 잎의 풀처럼 달빛에 움직이며

마당을 쓸고 있는 저 소리

고요하고 고요하여라

봄밤
댓돌과 마당을 지나 돌계단까지

하얗게 쓸어내고 있는

저 싸리꽃 빗질 소리를 듣다가

아! 비로자나불

싸리꽃이 절 마당을 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꽃을 피우며 피워내며

저 달에 새겨진 경(經)을 읽는 소리였구나

그래서 마당이 그토록 밝고 환했구나

꽃향기가 났구나

나혜석 ‘해인사 3층 석탑’, 20세기, 목판에 유채, 개인 소장.이미지 확대보기
나혜석 ‘해인사 3층 석탑’, 20세기, 목판에 유채, 개인 소장.

시는 출판사(마음의숲) 대표이자 시인 권대웅(1962~) 시집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문학동네, 2017년)에 보인다. 시집 제목이 그냥 좋았다. 그런데 그게 목차엔 나오지 않는다. 할 수 없어 뒤적뒤적 구석구석 찾아보았다. ‘화무십일홍’에서 마지막 시 한 줄을 가져다가 시제(詩題)로 붙인 것을 나는, 겨우 마주쳤다.

그러면서 그림이 절로 그려지는 빼어난 시편들, 즉 서정시의 찬란한 세계를 시인의 고유한 붓으로 확장하고 있음에 적잖이 감탄사가 쏟아졌다. 아, 아!

실은 “돌 속을 흐르는 시냇물/ 물살에 흰 다리 살이 다 들여다보일 만큼/ 치마를 걷고/ 돌다리를 건너오고 있는/ 이 눈부신 햇빛/ 물속에 비친 부푼 치마 속으로/ 반짝이던 은빛 지느러미 지느러미/ 물소리 뚝 멈추고/ 멈춰선 구름/ 바짓단을 걷고 건너다가/ 마주친 그 풍경에 눈멀어/ 바람과 함께 그만/ 돌 속에 스며들었네”(‘벽화(壁畵) 1’ 전문) 같은 시의 경우에는 먼저 벽화를 그리고 완성한 다음에 시로 여백에 빼꼭하게 쓴 것 같다는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상상력을 독자에게 초대한다.

내 경우엔 나혜석의 그림 한 점, ‘해인사 3층 석탑’이 마치 한자 ‘시(詩)’라는 낱말로 보였다. 이처럼 오월이, 열렸다. 그것도 여름이 시작된다는 입하(立夏)와 함께. 입하가 지나면 이윽고 5·18이자 ‘부처님 오신 날(음력, 사월 초파일)’이 쓰윽 다가오니 이만하면 괜찮은 여름의 출발이지 싶다.

詩 - 이 한자가 나혜석, 그림이 들리다


우연일까. 코로나19로 겨울과 봄, 집콕 생활은 전년처럼 여전했다. 하염없이 길어졌다. 멍하니 방구석에 널브러져 독서하는 시간이 날로달로 많아졌다. 그때에 등줄기로 연신 땀을 적시게 한 근대사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羅蕙錫, 1896~1948) 시인이었다.

책에서 처음 ‘해인사 3층 석탑’을 보는 순간, 3층 석탑(言)에서 화가의 절규가 들리었다. 첨탑 꼭대기엔 해인사 대적광전 처마 절집(寺)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를 모두 합치니, 저 그림은 곧장, 한편의 ‘詩’가 되었다. 참고로 이 그림은 1938년 무렵, 완성된 거라고 전한다. 오늘날 현존하는 대적광전 사진을 가져다가 비교해 살펴보자면 몹시 닮았다. 다음이 그 사진이다.

경남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과 ‘3층 석탑’.이미지 확대보기
경남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과 ‘3층 석탑’.

대학생이나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연에서 나는 한자로 종종 비유해 청중에게 쉽게 설명한 바 있다. 이른바 ‘관심→관찰→관계→관리’의 ‘4관 인문학’에 대한 지론과 설명이 그것이었다. 여기에 간략히 소개한다.

1) 관심/恃

절집(寺)에 마음(心=忄)이 가닿는 것을 일러서 믿음, 신앙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한자로 ‘믿을 시(恃)’라고 읽는 거라고.

2) 관찰/時


절집(寺)에서 템플스테이. 하룻밤이 지나고 으레 아침식사를 한다. 일반적으로 점심식사를 마친 후에 퇴소하는 절차를 밟는다. 따라서 점심은 일반인이 입은 승복을 벗는 속리(俗離)의 시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속리란 속세를 떠남의 뜻도 지니지만, 속세를 만남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런 까닭에 일반인은 사복 차림으로 일상에 복귀한다. 절간에 있지 못하고 민간(民間)에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절집의 아침식사는 대략 오전 6시. 깊은 산속에 햇빛이 막 보일락 하는, 일출(日出)의 시간을 들려준다. 어둠에서 빛의 관찰을 요구한다. 즉 ‘때 시(時)’로 읽는데 시간 관념을 재촉한다. 그렇다. 사물의 관찰이란 해(日)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과정을 거치기에 이른다.

3) 관계/詩


화가에게 손은 붓의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시인에게 있어서 눈은 곧 붓이다. 절집 대웅전 앞마당엔 꼭 3층 석탑이 있게 마련이다. 석탑의 모양을 화가는 손으로 그린다. 반면에 시인은 눈으로 붓을 대신함이 차이점이다. 그냥 단순하게 보이는 석탑(石塔)으로 바라보는 것은 ‘관계 맺기’의 실례에 해당한다. 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 말씀, 혹은 탑을 수없이 빙빙 돌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자의 염원의 말, 즉 말씀 ‘言’ 자가 새겨진 것으로 ‘관계 맺기’를 종용한다.

예컨대 목판화가 이철수(李喆守, 1948~) 작가의 <나무에 새긴 마음>(컬처북스, 2011년)에 등장하는 ‘감은사지에서 듣는다’를 보라. 판화 그림이 3층 석탑 모양인가, 아니면 말씀 언(言) 자를 새긴 것인가. 작가는 독자에게 ‘관계 맺기’를 불쑥 요구한다. 화답이 어서 오길 기다리는 모양새다.

이철수 ‘감은사지에서 듣는다’, 1998년 作.이미지 확대보기
이철수 ‘감은사지에서 듣는다’, 1998년 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졸저 <공자와 잡스를 잇다>(멘토프레스, 2011년)에서 다음과 같이 ‘詩’라는 한자를 설명한 바 있다.

‘詩’ 이 한자는 청각적 요소(言)와 시각적 요소(寺)가 잘 어우러진 아이덴티티(identity)를 보여주는 형성문자입니다. 자형의 핵심은 장소(Place)로써 ‘寺’에 있지요. 寺는 공공기관을 뜻하는 ‘관청 시’자로도 읽습니다. 다른 하나는 풍광 좋은 산 중턱의 사찰을 뜻하는 ‘절 사’자로 읽기도 합니다. (같은 책, 188쪽 참조)

그런 까닭에 나혜석의 ‘해인사 3층 석탑’은 나와 관계 맺기에 있어서는 그림의 메시지가 ‘詩’로 문득 읽혀지는 것이다.

4) 관리/持


절집의 최고 경영자를 우리는 ‘주지 스님’이라고 흔히 부른다. ‘주지’를 한자로 옮기자면 ‘住持’가 맞다. 절의 대소사를 총괄하는 최고 경영자 스님으로 봐야 한다. 이렇듯 관심→관찰→관계의 수순을 통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출 때, 비로소 관리, 즉 경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시장이든, 절집이든 하여간에.

그림, 시와 어떻게 만나는가?


나혜석의 ‘해인사 3층 석탑’에 대한 3명의 작가 설명을 차례로 먼저 살펴보자. 이유리 작가는 <화가의 마지막 그림>(서해문집, 2016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쩐지 “딸랑” 하고 풍경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그림이다. 짙은 녹음을 뒤로 한 채 경상남도 합천의 유서 깊은 사찰 해인사의 삼층석탑이 단정하게 서 있다. 그 오른쪽 곁에 해인사 석등이 서 있고 뒤에는 본당 대적광전이 부분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작품 제목에도 나와있다시피 삼층석탑이 그림의 주인공이지만 구도상 중앙에 놓였다는 것 말고는 그다지 두드러진 면이 없다. 오히려 배경과 혼연일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애써 튀지 않게 자제하며 그린 듯하다. 게다가 해인사 대적광전은 단청이 화려하기로 유명한 건물이건만 그림에서는 청회색 계열로 수수하게 본모습을 감추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화가로 알려진 나혜석이다. 연구가 더 이뤄져야겠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나혜석의 마지막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연하겠지만 그림을 그릴 당시 나혜석은 해인사에 머물고 있었다.
(같은 책, 73쪽 참조)

실제 현장(해인사)을 답사해 다녀보고, 나혜석의 그림과 비교를 꼼꼼하고 면밀하게 대조하면서 관심→관찰→관계를 형성하는 작가의 안목에 대해 우리는 감탄을 거듭하게 될 것이다. 나는 “딸랑”하고 풍경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그림이란 이유리 작가의 독보적인 해석과 상상력이 무척 좋았다. 시적인 접근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자인 권대웅 시인의 ‘하얀 싸리꽃’과는 이질적인 요소로 시각적인 접근이 아닌, 여자인 작가의 청각적인 요소에 의지하여 천착하는 무게 중심이 잡혀 있음이다. 유감스럽게도 조상인 작가의 책 <살아남은 그림들>(눌와, 2020년)에는 ‘해인사 3층 석탑’이 그림 소개로 실리지가 않았다.

미남 조원재. 미술을 사랑해서 ‘미술관 앞 남자’가 된 남자. 줄여서 ‘미남’이라는 프로필을 소개하는 조원재 작가의 베스트셀러 <방구석미술관2-한국>(블랙피쉬, 2020년)에는 ‘해인사 3층 석탑’ 그림이 나온다. 다음은 그것에 대한 설명이다.

사천 다솔사, 공주 마곡사 등 곳곳의 절을 떠돌다 수덕여관으로 다시 돌아오곤 하던 혜석은 합천 해인사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그림을 남깁니다. (중략) 캔버스가 아닌 합판을 구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그녀의 생활이 얼마나 궁핍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또, 누가 봐도 ‘그림이 좀 이상하다’ 느낄 정도로 투박하고 불안정한데요. 이미 이전부터 발생한 수전증과 무너져가는 심신의 영향이 그림에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작품만 놓고 보면 그녀의 예술세계는 이미 과거의 세밀함을 잃고 저물어 버린 것일지 모릅니다. (중략)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어떤 감정이 망가져가는 심신을 뚫고 나와 합판 위에 전사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해인사 3층 석탑>에서는 어딘가에 있지만 볼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불공을 드리며 탑을 하나둘 쌓아올리는 떨리는 손이 그림을 통해 전해집니다. (같은 책, 90~92쪽 참조)

위와 같이, ‘미남’이란 조원재 작가의 그림에 대한 설명은 화가 개인사를 추적하고 나열하면서 상상력이 부재한 설명에 그쳐서 실망스럽지만 그럼에도 이혼녀이자 자기 아이를 키울 수 없었던 한 엄마로서 나혜석의 심정이 3층 석탑을 공들여서 쌓았다는 논리의 정연함은 나혜석 그림이 어둡게만 보이는 이면을 밝힌 것 같아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나혜석은 동료들과 여성계의 시위 확산을 모색했다. 3월 8일 체포됐고 5개월여 옥고를 치른다. 유학 당시 오빠 소개로 만난 열 살 연상의 변호사 김우영이 변론을 맡았고 그 인연이 1920년 4월 정동예배당의 결혼식으로 이어진다. (중략) 남편이 베를린에서 법 공부를 하는 동안 파리에서 그림을 배우던 나혜석이 천도교 교령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최린과 불륜에 빠진다. (중략) 훗날 이혼의 빌미가 됐다. <자화상>은 나혜석이 파리에서 머물던 1928년쯤에 그린 것이다. 화풍이 서구적인 것이다. (중략) 나혜석은 더 이상 아이들을 만날 수도 없었다.

악착같이 그림에 매달렸고 열심히 글을 썼다. 그러던 중 절개를 버리고 일제에 타협한 최린이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라는 고위직에 오른 1934년, 나혜석은 그 유명한 ‘이혼 고백서’를 발표한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지금도 하기 어려운 소상한 자기고백을 통해 정조관념의 남녀평등을 얘기했다. 더불어 최린을 향해 거액의 정조 유린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한다. 실제로 위자료 일부를 받아낸 나혜석은 프랑스로 가려 했으나 여권 발급 문제로 조선에 주저앉는다. (중략) 주변의 따가운 시선 속에 나혜석의 인생은 시들어갔다. 자식들을 못 보는 불행 속에서 그는 수덕사·해인사·다솔사·마곡사·통도사 사찰을 전전하며 살았다. (중략) 그녀는 1948년 서울 원효로 시립자제원에서 ‘무연고자’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공작새처럼 살았던 나혜석은 그렇게 떠났다. (조상인 <살아남은 그림들>,18~20쪽 참조)

서울경제신문 기자 조상인 작가의 시선에 의지해 나와 동향(수원) 출신인 나혜석이 살다간 거리 신풍초등학교 인근과 동수원 나혜석 거리를 괜히 무작정 걷고 싶어졌다. 그러면서 ‘오월’은 무엇보다 가정·가족·어버이·어린이·광주·부처님 등의 말(言)이 가슴을 달리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런가 하면 대웅전 앞마당에 놓인 3층 석탑의 나 또한 합장하면서 빌고 싶어졌다.

“아! 비로자나불”

그래서 그랬는가. 유독 권대웅 시인의 「비로자나불」을 필사하고자 했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입하(立夏)가 지나갔다. 곧 여름이다. 유월이 다 지나고 칠팔월이 오면 빨갛고, 하얀 싸리꽃을 시인처럼 상상하면서 나, 꼭 봐야겠다. “하얀 싸리꽃이 밤새/ 대웅전 앞마당을 쓸고 있다/ 한 잎의 풀처럼 달빛에 움직이며/ 마당을 쓸고 있는 저 소리/ 고요하고 고요하여라/ 봄밤”이라고 했는데 현실에선 어불성설(語不成說)!

부처님 오신 날. 새벽 아침, 스님들의 독경(讀經) 소리가 찬 공기를 타고 3층 석탑에 부딪히면 혹 “싸~리”로 들릴까. 아니면 “쏘~리”로 귓가에 쩌렁 풍경처럼 울릴까.

현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시를 오월에 낮게 읊조리면서 절집 마당을 산책하다 튓마루에 잠시 앉아 시퍼런 바닷물이나 강물을 끌어다가 놓고 거룻배(艇) 띄우고(進) 싶은 오월!

나혜석, 그녀도 승복을 벗고 가족과 단란한 행복을 꿈꾸면서 해인사 삼층 석탑에 빌었을까. 아니면 중국의 대시인 두보처럼 절 앞마당에 가정이란 배를 띄워 “낮에는 늙은 남편을 데리고 작은 배를 타보거나, 갠 날에는 자녀들이 강물에 멱 감는 것을 보”고 싶어서 그림에 시를 담았던 것은 아닐까. 아! 비로자나불이여, 내게도 단란한 가정을 허락해 주소서. 내 집에 싸리꽃향기, 그거라도 달빛 타고 오게 하소서.

괜찮은 하루를 내게도 안아주는, 시와 그림의 힘


위에 인용된 시, 권대웅의 <비로자나불>이 등장하는 ‘봄밤’은 언제일까. 추측컨대 오월이다. 그것도 올해처럼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이거나 혹은 부처님 오신 날이기도 한 음력 사월초팔일이 겹치는 주간에 그 봄밤일 것이다.

“싸리나무는 다 자라도 사람 키 남짓한 작은 나무다. 하늘 높이 쭉쭉 뻗어 아름드리로 자라는 큰 나무들이 볼 때는 정말 하찮은 존재로 여겨 우습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박상권 <우리 나무의 세계>, 513쪽 참조)

나혜석의 그림에는 싸리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권대웅의 시에서는 “하얀 싸리꽃이 밤새/대웅전 앞마당을 쓸고 있다”는 점이 확연히 다른 느낌을 주나, 그럼에도 어떤 간절함을 대상으로 그림과 시로 창작되었다는 점에서는 하염없이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상상력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언뜻 말이 안 되고, 그림이 구도에 맞지 않는 느낌을 갖기 십상인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시와 그림에 접근하고 실망할 수도 있으나 그 놀라운 치유력은 되풀이 시를 듣고, 반복해서 그림의 매력에 빠지게 하는 힘을 가졌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림이나 시는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이성복 <무한화서>, 93쪽 참조) 그렇기 때문에 세계와 자연과 사람과 사물 등을 새롭게 관찰할 수 있는 시각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시인의 말과 화가의 붓질에 휘둘리면서 독자로서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하얀 싸리꽃. 그것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현신. 보통 사람들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를 말함이다. 말하자면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우리들의 흐릿해진 눈엔 잘 보이질 않을 뿐이다. 이 점을 제대로 ‘나’가 깨우칠 때, 어쩌면 “아! 비로자나불/ 싸리꽃이 절 마당을 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꽃을 피우며 피워내며/ 저 달에 새겨진 경(經)을 읽는 소리”를 경청할 수 있을 테다. 막 오월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봄밤이었든, 여름밤이었든 간에. 머리로 시와 그림을 따지지 말고 메마르고 삭막해진 내 가슴에 물길부터 내어줄 일이다.

이렇게 하면, 괜찮은 하루를 ‘나’는 살아낼 수 있다. 시와 그림이 내게로 와서 ‘나’를 안아줄 것이다. 토닥토닥. 쓰담쓰담.

◆ 참고문헌


권대웅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문학동네, 2017.

이성복 <무한화서>, 문학과지성사, 2015,

이철수 <나무에 새긴 마음>, 컬처북스, 2011.

심상훈 <공자와 잡스를 잇다>, 멘토프레스, 2011.

이유리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서해문집, 2016.

조상인 <살아남은 그림들>, 눌와, 2020.

조원재 <방구석미술관2-한국>, 블랙피쉬, 2020.

박상진 <우리 나무의 세계 1>, 김영사, 201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