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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흘려 지킨 자유의 땅 한국서 그들의 혼백은 편히 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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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흘려 지킨 자유의 땅 한국서 그들의 혼백은 편히 쉬고 있을까

김덕현 연천통일미래포럼 상임대표가 찾은 유엔군 화장장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610번지에 위치한 세계 유일의 유엔군 화장장. 이국땅에서 전사한 유엔군 병사들의 시신을 화장했던 시설이다.이미지 확대보기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610번지에 위치한 세계 유일의 유엔군 화장장. 이국땅에서 전사한 유엔군 병사들의 시신을 화장했던 시설이다.
올해는 휴전협정 68주년이다. 6·25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 어디 한 곳 격전지가 아닌 곳이 없었다. 특히 연천군은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는 지역이다. 연천군은 한국전쟁사에도 등장하는 수많은 전투들이 치러졌던 격전지였다.

이런 연유로 연천군에는 현충시설들이 많다. 38선 돌파 기념비와 6·25참전기념탑, 연천 유엔군 화장장 등이 그것이다.
이 중 연천 유엔군 화장장은 이국땅에서 전사한 유엔군 병사들의 시신을 화장했던 시설로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곳이다.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에 터를 잡은 유엔군 화장장을 찾아 그 의미를 새겨봤다.

2008년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408호로 등재된 연천 유엔(UN)군 화장장은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610번지에 위치해 있다. 이 유엔군 화장장은 한국전쟁의 와중에 전사한 UN군 전사자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1952년 건립한 임시 화장장이다. 이 화장장은 휴전 이후에도 짧게 사용되어 오다 전쟁 이후 폐기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남아있는 구조로 보아 하나의 큰 건물과 화장시설 등이 확인되며 주위에는 40년생 내외의 활엽수가 무성하게 자생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휴전이 진행되면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전개될 당시인 1952년 벨기에군과 영국군이 이곳의 금굴산 전투에 투입되면서 많은 유엔군의 희생이 뒤따랐다. 전선에서 희생된 유엔군의 유해를 화장해 본국으로 보내기 위해 영국군이 마련한 화장시설이었다. 이 화장터의 운영은 영국군이 휴전 이후에도 관리하였다고 한다. 전선에서 화장장이 필요할 정도였다면 그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지금도 남북은 155마일 전선에서 두 눈을 부릅뜬 채 서로를 노려보고 총부리를 겨누며 살얼음판 같은 평화를 겨우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몇 년 전에는 천안함이 폭침되어 수많은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 후 연평도에 무단으로 북한이 해안포를 퍼붓는 바람에 민간인과 군인들이 사망하는 등 전쟁 전이나 전쟁 후 아직도 긴장감은 그대로이다. 그리고 그 전쟁이 낳은 많은 상처들로 인해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들은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다. 이것은 이전의 우리도, 지금의 우리도, 이후의 우리도 아마 대한민국이 통일이 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쟁 초기에는 평온하기만 했던 연천


문화재청이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등록문화재 제408호 연천 유엔군 화장장 표지석.이미지 확대보기
문화재청이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등록문화재 제408호 연천 유엔군 화장장 표지석.


광복이 되고 38선이 그어졌을 때만 해도 연천은 북한의 김일성 치하에 있었다. 6‧25가 발발했어도 대부분의 연천 사람들은 전쟁이 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전쟁 초기에 파죽지세로 남쪽으로만 밀어붙였으니 당시만 해도 교통이 좋지 않은 데다 산골 마을 사람들이 전쟁이 났다는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그리고 38선 돌파를 해서 유엔군과 국군이 이곳을 점령하고 나서야 전쟁이 일어난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이어서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한 유엔군과 국군은 이제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이들을 기다린 것은 압록강을 건너 산속에 위장하고 숨어 있던 중공군 45만 병력이었다.

한반도의 전쟁에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이라는 이름으로 불법개입한 중공군은 인해전술이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또 다시 한반도를 두 동강내기 위해 거침없이 유엔군과 국군을 괴롭히며 남진해 내려왔으며 이미 서부전선은 이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고 함경도의 장진호 등에서는 이들을 맞아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었지만 이미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가상할만한 중공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또 다시 남북이 두 동강이 났다. 유엔군과 국군은 또 다시 서울을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른바 1‧4후퇴였다. 유엔군은 서울에서 150㎞ 떨어진 금강까지 후퇴했다. 서울은 다시 적의 수중에 떨어졌고 이에 따라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한국전쟁의 영웅인 맥아더 장군에 이어 리지웨이 장군이 국동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한국전을 총지휘하게 되었고 미8군사령관으로 밴플리트 장군이 부임을 하였다. 리지웨이 장군은 드디어 반격의 시기가 왔음을 깨닫고 수원을 거쳐 다시 서울을 재탈환한다. 그리고 즉시 중공군과 북한군을 몰아 38선 북쪽으로 밀어붙였고 또 다시 몇 개월 전 상황이 되풀이 되었다. 이때부터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되는 1953년 7월 27일까지 연천은 그야말로 격전지 중의 격전지가 되었다.

휴전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양측은 한 치의 땅, 한 개의 고지라도 더 빼앗기 위해 그야말로 사투를 벌이는 처절한 마무리 전쟁이 필연적이었다. 전쟁 전에는 북한 공산치하에 있던 연천이 격전지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접한 철의 삼각지대와 맞물려 있고 만일 이곳에서 밀리면 동두천까지 밀리는 상황에서의 연천이 격전지가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곳 금굴산을 잃으면 연천은 또다시 전쟁 전의 경우와 같이 북한 김일성 치하가 된다. 그래서 그 어느 곳보다도 연천은 최대의 격전지였으며 이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중요한 문화유적지나 사찰 등은 하나도 남김없이 피폭 소실되었다. 수복이 되어 연천으로 돌아오니 남아 있는 건물이라고는 연천역 앞의 급수탑만이 유일했으며 하다못해 비석이나 석물들도 온통 총탄 자국으로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금굴산을 적에게 빼앗기지 않고 사수한 덕분에 현재의 휴전선은 38선보다 20㎞ 훨씬 북쪽 지역인 현재의 태풍전망대와 강서리 고잔리를 중심으로 휴전선이 그어졌다. 아군과 유엔군측의 작은 승리였다. 어쩌면 연천군민들은 6‧25가 오히려 축복이 아닐까 하는 역발상도 해 본다. 만일 6‧25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 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 이어지는 3대 세습 독재인 공산치하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금굴산 전투로 세워지게 된 전시 임시 화장장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장군 동상.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서부전선을 지킬 수 있었다.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장군 동상.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서부전선을 지킬 수 있었다.


유엔군의 기습적인 인천상륙작전으로 패퇴하는 공산군을 쫓으며 서부전선은 주로 유엔군이, 산악지역인 동부전선으로는 주로 한국군과 미군이 퇴각하는 공산군의 뒤를 쫓으며 전투를 벌였다. 압록강까지 진격하던 유엔군과 국군은 중공군의 불법개입으로 또 인해전술로 거머리 같이 달려드는 중공군에 밀고 밀리고 하다가 정전협상이 개시됐고 상대방 군들은 서로 정전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협상 중에도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다며 그야말로 뺏고 빼앗기는 일진일퇴 속에 많은 장병들이 전사를 했다.

금굴산은 중요 전략적 요충지이자 군사적 요새로 이곳을 적에게 내 줄 경우 연천은 전쟁전의 38선 즉 한탄강 이남으로의 휴전선을 정할 수밖에 없는 매우 중요한 지리적 조건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고지였다. 지금의 백학면과 미산면, 왕징면, 군남면은 물론 연천과 전곡이 적의 수중에 들어 갈 수밖에 없는 절대 절명의 고지인 것이다.

금굴산 점령하면서 휴전선은 훨씬 북쪽으로 이동


결국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금굴산을 차지한 영국군과 캐나다군, 미 제3사단은 그 여세를 몰아 금굴산으로 부터 약 20㎞ 가량 북쪽인 고왕산(강서리)과 마량산(고잔리)에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며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고 이곳 전투에서 전사한 유엔군들의 시신은 이곳 화장장을 거쳐 본국으로 그 유해가 송환되기에 이른다.

당시 이 화장장은 영국군이 시멘트와 주변의 막돌을 이용해 담장을 쌓듯 30~50㎝ 두께로 쌓아 7m 정도 높이의 허튼 쌓기로 굴뚝과 화덕을 임시로 만들었으며 이에 대한 관리도 영국군이 하면서 휴전 직후까지 사용하였다. 이 화장장 시설은 전쟁 당시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6·25전쟁사에 있어 유엔군 참전 상황에 대한 실증적 자료이며 생생한 현장으로 마땅히 그 보존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반드시 재조명 되어야 할 유엔(UN)군 임시 화장장


연천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전쟁 전의 38선과 전쟁 후의 휴전선이 맞물려 있는 유일한 곳이다. 여기에서 생각해 낼 수 있는 아이템이 바로 안보관광산업이다. 특히 전시 임시유엔군 화장장은 전 세계 어디에도 그 예를 찾기 힘든 또 우리나라 어디에도 없는 좋은 관광 아이템이다. 지금은 각 나라의 외교관들이 자기 나라를 선전할 이벤트 꺼리가 없어서 혈안인 실정이며 우리는 6‧25의 혈맹이라는 좋은 소재와 또 다만 이런 좋은 소재를 두고도 이제껏 활용도 하지 않은 채 시간만 허송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유엔(UN)군 화장장의 복원과 함께 이곳에서 화장되어진 병사들의 국가와 출신지역과 병사들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고 참배할 공간을 만들어 수시로 참배를 할 수 있도록 별도로 참배 장소를 설치하며 6‧25를 상징하는 각종 조형물의 설치, 참전 16개국의 국기와 각 나라를 상징하는 로고를 세우고 그들 나라의 대사, 또는 영사관이 참배할 수 있도록 잘 정비하여야 한다.


김덕현 연천통일미래포럼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