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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쥐방울덩굴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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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쥐방울덩굴을 보며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모처럼 비가 내리고 있다. 연일 40℃ 전후를 오르내리는 폭염으로 한껏 달구어진 대지의 열기를 식히며 비가 내리고 있다. 무더위와 함께 찾아온 코로나 4차 대유행으로 몸도 마음도 지쳐만 가는 이 마당에 내리는 단비가 아닐 수 없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풀과 나무들도 비를 반기는 듯 다소곳이 비를 맞으며 생기를 찾아가는 모습이다. 담장 위의 능소화와 배롱나무 꽃이 빗방울의 간질임을 견디지 못하고 이따금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지만 여전히 고운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시대, 문밖을 나설 때면 마스크는 필수품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입과 코를 막고 있는 마스크는 잠시만 써도 금세 인중이 축축해주고 들숨과 날숨이 불편하다. 인적이 드문 외진 곳에선 잠시 마스크를 내리고 심호흡을 해 보기도 하지만 주변에 사람이 나타나면 황급히 마스크부터 챙겨 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벗을 수밖에 없는 경우는 다름 아닌 새로 피어난 꽃을 마주할 때이다. 꽃들이 뿜어내는 향기가 매혹적이기도 하지만 야생의 꽃들과 마주하는 공간은 인적이 드문 자연 속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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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꽃을 찾아 먼 길을 떠나는 일이 쉽지 않은 요즘은 궁여지책으로 자전거를 타고 주변의 꽃들을 보는 것으로 꽃에 허기진 마음을 달래곤 한다. 천변을 따라 자전거의 페달을 천천히 밟으며 스치는 풍경 속엔 참으로 많은 꽃들이 보인다. 어제 보았던 꽃들이 지고 난 자리엔 어김없이 새로운 꽃들이 얼굴을 내어민다. 나처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거나 조깅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무더위를 피해 그늘진 다리 밑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는 노인들도 있다. 제각기 다양한 모습이지만 단 하나같은 게 있다면 너나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19가 가져다 준 서글픈 세상의 일면이다.

꼬리명주나비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천변에 조성해놓은 쥐방울덩굴 서식지에선 꼬리명주나비 애벌레들이 화려한 우화의 시간을 기다리며 열심히 잎을 갉아먹는 중이다. 꼬리명주나비 애벌레를 처음 보았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다. 호랑나비과에 속하는 화려한 꼬리명주나비와는 달리 온통 까만색의 애벌레는 여느 애벌레보다도 징그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리도 징그럽고 흉측한 모습의 애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는지 의아한 생각마저 들었다. 환골탈태란 나비의 변태를 두고 생겨난 말인 듯도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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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명주나비 애벌레들에게 잎을 갉아 먹힌 쥐방울덩굴 상부는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데도 덩굴 속엔 어느새 작은 초록풍선 같은 쥐방울 열매가 달려 있다. 아낌없이 자신의 잎을 내어주면서도 자신의 소명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쥐방울덩굴이 새롭게 보였다. 그에 비하면 나비로의 비상을 위해 아귀아귀 잎을 갉아 먹는 애벌레들이 너무 염치없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작은 애벌레에게 염치를 기대한다기보다는 자연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픈 마음이 내재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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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의 사전적 정의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떠오른 화두가 ‘배려’다. 마스크를 쓰고 거리 두기를 하는 것도 코로나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생각과 함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자 하는 배려심의 발로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혼자 있을 때는 마스크를 내렸다가도 누군가 나타나면 황급히 마스크를 챙겨 쓰는 것은 염치를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쥐방울 덩굴처럼 자신을 내어주며 폭염 속에서도 코로나 극복을 위해 헌신하는 의료진들을 생각하면서 하루하루가 힘들더라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고자 다짐을 하게 된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