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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조용미 ‘꽃 핀 오동나무 아래’와 김득신 ‘출문간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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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조용미 ‘꽃 핀 오동나무 아래’와 김득신 ‘출문간월도’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흰 배꽃이 마치 눈처럼 떨어진다 해서 ‘이화우(梨花雨)’라고 했던가. 이매창이 지었다는 시의 일부를 여기에다 옮겼다. 배꽃에 자신의 심사를 기대어 러브 스토리를 잔잔하게 읊는 시가 남정네 얼음 빗장 마음을 그만 녹인다. 이와 같이 조용미의 시는 독자의 마음에 이녁을 문득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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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핀 오동나무 아래 / 조용미


꽃 핀 오동나무를 바라보면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하다

하늘 가득 솟아 있는 연보랏빛 작은 종들이 내는

그 소릴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오동 꽃들이 내는 소리에 닿을 때마다

몸이 먼저 알고 저려온다

-

무슨 일이 있었나 내 몸이

가얏고로 누운 적이 있었던 걸까

등에 안쪽을 받치고 열두 줄 현을 홑이불 삼아 덮고

풍류방 어느 선비의 무릎 위에 놓여

자주 진양조로 흐느꼈던 것일까

-

늦가을 하늘 높은 어디쯤에서 내 상처인 열매를

새들에게 나누어 준 적도 있었나

마당 한켠 오동잎 그늘 아래서

한세상 외로이 꽃이 지고 피는 걸 바라보며

살다 간 은자이기도 했을까

-

다만 가슴이 뻐개어질 듯

퍼져 나가려는 슬픔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꽃 핀 오동나무 아래 지나간다

-

무슨 일이 있었나 나와 오동나무 사이에

다만 가슴이 뻐개어질 듯

해마다

대낮에도 환하게 꽃등을 켠

오동나무 아래 지난다


김득신 ‘출문간월도’, 18세기, 종이에 담채, 개인 소장.이미지 확대보기
김득신 ‘출문간월도’, 18세기, 종이에 담채, 개인 소장.


조용미(曺容美, 1962~) 시집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문학과지성사, 2004년)에 시가 나온다. 해마다 5월이 오면 “꽃 핀 오동나무를 바라보면/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경지에 닿고 싶어진다. 시 읽는 기쁨은 그래서 그 지점부터 후끈 달아오른다.

나무 박사, 오동나무를 말하다


우리나라 나무 문화재 연구 분야 국내 최고 권위자인 박상진 교수의 <우리 나무의 세계- 2>(김영사, 2011년)에 따르면, 꽃이 아름다운 나무도 아니고 약으로 쓰이는 나무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일이 열리는 나무도 아니고 생활에 쓰이는 나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가로수로 심는 나무인가 하면 아니고, 정원수로 가꾸는 나무인 줄 알았는데 아니란다. 그렇다고 해서 만나기 어려운 귀한 나무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단지 ‘재목으로 쓰이는 나무’에 속할 뿐이다. 하여간 ‘오동나무’에 대한 박상진 교수의 해박한 설명은 이렇다. 다음이 그것이다.

“오동나무는 어느 날 갑자기 뜻밖의 장소에서 만날 수 있다. 아파트 정원이나 마당 구석, 담장 아래, 나무를 베어 버린 신설 도로 옆 등 햇빛이 잘 드는 공간이면 어디든 자람 터의 가림이 없다. (중략) 세상만사는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빨리 자라다 보니 목질이 단단하지 못하다는 단점이 생긴다. (중략) 나무는 가볍고 연하여 가공하기 쉬우며, 무늬가 아름답고 잘 뒤틀어지지 않는다. 습기에도 강하며 불에 잘 타지 않는 성질까지 있다. (중략) 오동나무의 여러 가지 쓰임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옛날 악기 재료이다. 소리의 전달 성능이 다른 나무보다 좋아서다. (중략) 오동나무는 꽃의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 없다. 봄의 끝자락인 5월 말경 가지 끝에 원뿔모양의 꽃대를 내밀고 손가락 길이만 한 종 모양의 통꽃이 연보라색으로 핀다. 꽃통의 끝은 다섯 개로 갈라지며 향기가 진하다. 열매는 익으면서 밑으로 늘어지고, 10월에 끝이 뾰족한 달걀모양으로 껍질이 변화면서 회갈색이 된다. 초겨울에 들어서면서 둘로 갈라지고 안에 들어 있던 날개 열매들은 겨울바람을 타고 제 갈 길을 찾는다.” (같은 책, 395~399쪽 참조)

이 상세한 글을 통해서 우리는 쉽게 조용미 시인이 바라보는 시세계로 입장할 수 있다. 나무 박사는 꽃을 ‘원뿔 모양’으로 설명하는 것에 반해 시인은 “연보랏빛 작은 종”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상력에 독자가 되면 감탄을 끙, 신음소리 지르듯이 한번쯤은 그저 입으로 자아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치지 못하는 지점, 예컨대 “하늘 가득 솟아 있는 연보랏빛 작은 종들이 내는/ 그 소릴 오래전부터 들어왔다”라는 부분까지 들어가면, 일반인과 다른 시인의 감성이란 것이 무심코 느껴져서 상당한 거리감이 무릇 생겨난다. 아, 시인이란 예술가란….

그렇다. 똑 같이 ‘꽃 핀 오동나무 아래’에 서 있더라도 누구는 종소리를 듣고, 또 누구는 종소리를 듣지 못하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시를 읽고,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는 행위에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변화와 탈출을 기대하는 노림수와 더불어 상상력과 감성을 공부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나무 박사가 본 것은, 우리도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다. 하지만 시를 읽지 않고서는 어찌 우리가 상상력과 감성까지 갖추고 또 배울 수가 있으랴.

시의 1연을 읽고, 우리는 이제 2연으로 숨을 연거푸 크게 몰아쉬게 된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하다”는 구절이 드디어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나 내 몸이/가얏고로 누운 적이 있었던 걸까”에서 아연 가야금이나 거문고 악기의 재료로써 쓰인 바 있는 ‘나’와 ‘오동나무’를 동일시하는 겹눈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의 화자는 “등에 안쪽을 받치고 열두 줄 현을 홑이불 삼아 덮고/ 풍류방 어느 선비의 무릎 위에 놓”인바 있는 과거사를 더듬더듬 회복하여 추적하게 된다. 이생이 아닌, 나의 전생을 말이다. 또한 이 전생은 풍류방 어느 선비의 무릎 위에서 ‘러브 스토리’로 꿈을 확장한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나와 너는


임진왜란 당시 전북 무안에는 유명한 관기(官妓)가 있었다. 시도 잘 짓고 노래도 잘 해서 사대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이름을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이라고 했던가. 어느새 애인이 생겼다. 애인이 누군가.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이라고 했다.

어젯밤 꿈을 꾸었어요

이녁은 술 한 병 손에 쥐고 한 손에는 매화

가지를 들고 계셨지요

-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웃으시며 제게 다가오셨어요

어질어질한 기운으로

부스스 일어나 이녁이 건네는 꽃

-

가지를 잡으려는 순간

몸서리치며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곤 비몽사몽간에

혼곤한 취기에 싸여

-

박명에 닭이 홰를 치기까지

몸을 엎치락뒤치락했지요

임진년 왜구가

새까맣게 밀려오고

이듬해 봄 의병을 모아

서애 선생(유성룡)을 돕겠다며

떠나실 적,

-

이녁의 두루마기 뒷자락에 비처럼 흩날리던

배꽃을 기억합니다

-

그 한순간이 억겁마냥 까마득하고

아련하여

간 심장이 멈추는 듯했습니다

-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성큼성큼 큰 걸음 옮기시던

이녁이 밟는 황토 먼지가 내려앉는

-

배꽃과 뒤섞여 분분하였지요

-

울며 잡고 이별했지만

풍전등화의 사직 앞에 이녁을 눈물로 어찌

붙잡을 수 있었겠습니까

-

사사로운 정으로 어찌 이녁의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었겠습니까


흰 배꽃이 마치 눈처럼 떨어진다 해서 ‘이화우(梨花雨)’라고 했던가. 이매창이 지었다는 시의 일부를 여기에다 옮겼다. 배꽃에 자신의 심사를 기대어 러브 스토리를 잔잔하게 읊는 시가 남정네 얼음 빗장 마음을 그만 녹인다.

이와 같이 조용미의 시는 독자의 마음에 이녁을 문득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연인의 입장이 되어서 ‘꽃 핀 오동나무 아래’에 서보고 싶은 충동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기에 넘침도 전혀 부족함도 없이 알맞다. 따라서 ‘나’와 만나는 ‘너’를 이녁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슬그머니 전해준다. 하여 “무슨 일이 있어나 나와 오동나무 사이에/ 다만 가슴이 뻐개어질 듯/ 해마다/ 대낮에도 환하게 꽃등을 켠/ 오동나무 아래 지”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아주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게 선물한다. 좋은 시가 가지는 힘이다.

‘그’와 결혼을 약속했다면, 꼭 가봐야 할 최애 장소 ‘무금당’


경북 경주 안강읍 양동마을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의 독락당이 있다. 독락당은 옥산서원과 더불어 매우 유명하다. 이번 여름휴가에 그곳을 찾아갔다. 독락당이 보이는 길목 입구에는 홀로 ‘무금당(無琴堂)’이 자리를 잡고 있다. 당호의 뜻을 살피자니, ‘풍류가 없는 집’으로 풀이가 되겠다.

요컨대 당호가 품은 뜻이란 기생을 불러서 가야금을 치거나, 자칫 학문에 방해가 되는 거문고 따위를 일체 접하지 않겠다는 회재 선생의 결연한 의지가 돋보임이다. 그게 퍽 인상적이었다. 궁극에 그 깊은 뜻이 사랑하는 ‘아내 외엔 쳐다보지 않고 공부하는 집’이라는 의미가 전해지니 ‘무금당’이란 이름이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당호가 한마디로 기막히다. 신혼부부가 집을 얻어 서재를 꾸밀 때 방의 이름으로 안성맞춤이다. 이 때문이다.

일주일 전이다. 그곳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다. 먼저 온 젊은 커플이 보였다. 남자는 광주가 고향이고 여자는 경주에 산다고 그랬다. 스물여덟의 남자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고, 스물아홉의 여자는 초등학교 행정실에 근무하고 있다고. 그러니 사내 커플인 셈이다.

둘은 결혼을 약속하고 연애중이란다. 이곳을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용히 물었다. 당호의 의미를 아냐고. 그건 잘 모른다고 답했다. 해서 나는 주책없이 또 장황히 설명을 했던 바다. 그랬다. 설명이 끝나자, 둘의 눈빛이 빛났다. 옆에 활짝 핀 배롱나무 꽃처럼 환해졌다. 눈빛이 핑크빛으로 스며듦과 동시에 별처럼 반짝였더랬다.

그렇다. 결혼까지 생각하는 이성이 곁에 지금 있거든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무금당’이란 그곳을 꼭 찾아가야 한다. 다음은 이녁을 향해서 ‘무금당’의 의미를 설명하면 된다. 그러자면 상대는 감동할 것이다. 일체 유흥을 끊겠다고 약속하려고 들 것이다. 따라서 어렵사리 방문한 효과는 기대 이상이 될 게 자명하다. ‘나’와 ‘너’ 사이. 그 연애의 감정을 뜨겁게 달구어 줄 것이 분명해지니 어찌 아니 경주 안강읍 양동마을로 연인들이 찾지 않으랴.

오동나무 아래, 개 짖는 소리


앞의 그림은 조선 후기의 화가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작품으로 <출문간월도(出門看月圖)>라고 한다. 한자의 뜻은 ‘문 밖에서 달을 보다’가 되겠다. 화면 중앙을 차지하는 커다란 오동나무 위로 휘영청 보름달이 밝았다. 화면의 오른쪽엔 소담한 초가집이 보인다. 삐걱 대문을 열고 나온 소년이 개와 달을 보고는 실망한 눈빛인데 제법 힘깨나 쓰게 생겼다. 소년은 왜 사립문 밖으로 나온 걸까. 까닭이야 뻔하다. 개 소리가 요란했기 때문이다. 그 시끌벅적함의 이유를 찾고자 막상 나와서 보니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다. 왜냐하면 개가 짖는 이유가 보름달을 보고 컹컹 짖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허허, 이거 참~”

그림 감상에 도움을 주고자, 그린 이는 화제시를 푸른 오동잎 아래에다 잔뜩 빼꼭하게 적었다. 뭐라고 쓴 것일까. 한시는 이렇다.

一犬吠 (일견폐)

二犬吠 (이견폐)

萬犬從此一犬吠 (만견종차일견폐)

呼童出門看 (호동출문간)

月挂梧桐第一枝 (월괘오동제일지)

우리집 개가 짖자

옆집 개가 짖어댄다

(이윽고) 동네에 개들이란 개들이 내 집 개를 좇아서 컹컹 짖어대는구나

아이를 불러 문 밖에 나가 보라고 했더니만,

“(아버지) 보름달이 벽오동나무 제일 높은 가지에 걸려있어요”


뭐, 대충 이런 뜻이다. 한마디로 천지간이 개소리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세상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시끄럽다는 뜻을 교묘하게도 그림으로 감추고 글로 녹아낸 것이리라.

이와 관련, 고연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 교수는 ‘개’에 대해서 이렇게 일찍이 설명한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우리 옛말에 ‘개’가 붙으면 천한 것이다. 지천의 개나리, 먹지 못하는 개살구와 개머루, 쓸데없는 개꿈 등. 요즈음 쓰는 말로 개망신, 개수작, 개죽음 등이 그 전통을 잇고 있다. 중국 당나라의 유종원(柳宗元)은 개에게 비루한 시기심(猜)이 있어 해를 보고 눈을 보고 짖는다고 하고, 시기심이란 모든 악(惡)의 근원이라 경계하였다. 조선후기 학자 위백규(1727~1798)는 개가 비천한 이유와 개 같은 사람의 속성을 말했다.” (고연희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문화일보, 2012년 12월 7일)

사람 눈엔 안 보이는 것이 개 눈엔 보이는가 보다. 그림 속에서 개가 (사람 눈에는) 아무 것도 아닌, 보름달의 형세를 보고 놀라서 짖어대자 동네의 온갖 개란 개들이 따라서 짖어대는 것을 풍자하기 위해서 그려낸 것이다. 하필이면 그것도 벽오동나무 아래에서 말이다. 벽오동나무는 무언가. 벽오동나무는 자고로 봉황이 깃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개판치는 소리만 요란하니 화가의 속내는 지금 세상이 태평성대가 아닌 것에 불만을 품은 것이고 정치가 개판인 당시를 풍자한 것이 아니고 또 뭐겠는가. 따라서 이 작품의 제작연도가 궁금해진다. 확인해 보니, 영조 30년(1754년)이라고 하는데, 뭔가 맥락이 시원스럽지 못한 면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립문 안에서 아이를 불러 밖을 내다보게 한 장본인은 과거급제에 실패한 서생이 아니고 뭐겠는가.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니 더 이상 왈가왈부로 따지지는 마시라. 입장이란 게 곤란하니까)

여하튼 또 한 사람의 유명한 나무 박사인 강판권 교수는 ‘벽오동나무’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말했던 바이다. 다음이 그것이다.

벽오동 하면 떠올리는 것이 봉황이다. 한국에 나와 있는 식물 관련 책에는 거의 예외 없이 봉황과 관련한 나무는 오동이 아니라 벽오동으로 적고 있다. (중략) 작자 미상의 글 “봉황새는 오랫동안 오지 않고 오동잎만 부질없이 무성하구나”에서는 오동나무를 언급하고 있다. (강판권 <역사와 문화로 읽는 나무사전>, 글항아리, 424쪽 참조)

그렇다. 작자 미상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오라는 봉황새는 오지 않고 오동잎은 부질없이 무성하기만 한데 느닷없이 졸지에 여기저기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니 마뜩지 않은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 심사가 그럴 게다. 이 핑계로 소년의 아버지, 선비는 과거급제를 못한 탓은 하지 않고 출사를 접고자 은사의 흉내를 낸 것이다. 그러니 은사 흉내로 계속 초가집에 살면서 앞으로도 남은 세월을 살고자 했으리라.

어쨌든 ‘꽃 핀 오동나무 아래’에 있든, 문밖에 오동나무가 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살든지 간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노력도 없이 감나무에 감이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봉황새가 나타날 리가 만무하다.

봉황새를 만나려면 어쨌든 자주 그 오동나무 아래로 걸어야 한다. 지나가야 한다. 수시로 방문을 활짝 열고 사립문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오동나무에 앉는 봉황새를 기필코 언젠가는 보게 될 테다. 아니 그런가. 어쩌면 이 또한 나의 흰소리, 개소리일지도….

꽃 핀 오동나무 아래. 그 자리는 집안에서 볼 수도 없고 차지할 수도 없다. 더욱이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공자 왈, 서책만 뚫어져라 본다고 봉황새가 짠하고 불쑥 나타나진 않는다. 게다가 어린 아이를 불러서 심부름을 시키는 선비라면 단 한 번도 꽃 핀 오동나무를 제대로 본 적도 없을 테다. 또한 꽃 핀 오동나무에 가슴을 한 번도 데이지 않아본 청춘남녀라고 한다면 어쩌면 연애하는 맛을 진정 모르게 될 테다. 그렇게 늙어갈 테다. 이를 어찌 안타깝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랴.

“인가의 연기 속에 귤과 유자는 차갑고/가을빛 속에 오동나무는 늙어가네(人煙寒橘柚, 秋色 老梧桐)”라고 당나라 시인 이백은 오언율시 시로 노래했다. 높은 누각에 오른 덕분에 건진 절창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고전 <천가시(千家詩)>에 수록된 명시이다. 조용미의 시는 ‘한국판 백가시(百家詩)’라고 평할 수 있는 오생근·조연정이 엮은 시집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문학과지성사, 2017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내년 오월엔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와 함께 ‘꽃 핀 오동나무 아래’에 나는 오랫동안 서성일 것 같다. 아니면 오는 가을날에 전남 담양으로 달려갈 테다. 최종 목적지는 ‘소쇄원’일 테다. 그 입구에 ‘대봉대(待鳳臺)’라는 정자가 있다고 한다. 정자 주변에는 봉황이 앉았다는 전설의 벽오동나무가 있고 봉황새가 마시는 맑은 샘물 ‘예천(醴泉)’도 있다고 하니 좀 마시고 나 돌아와야겠다.

◆ 참고문헌


조용미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문학과지성사, 2004.

오생근·조연정 엮음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문학과지성사, 2017.

박상진 <우리 나무의 세계-2>, 김영사, 2011.

강판권 <역사로 문화로 읽는 나무사전>, 글항아리, 2010.

사방득·왕상 엮음. 주기평 역해 <천가시(千家詩)>, 문학과지성사, 2020.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