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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여인의 삶에 보내는 헌사…탁지현 안무의 창작발레 'Lif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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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여인의 삶에 보내는 헌사…탁지현 안무의 창작발레 'Lif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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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현 안무의 'LIFING'
모래 위의 삶같이 슬프도록 아름답게/ 낙타의 걸음을 따라간다/ 연붉은 사막의 여명이 익숙하게 찾아오면/ 젊은 사자는 날쌔게 새벽을 박차고 나선다/ 때론 오아시스를 만나 행복했지만/ 대장정은 익숙해져야 내공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황혼이 느릿한 최면을 걸어오면/ 마법사의 피리에 따라 춤추는 코브라가 되었다/ 니체는 옹골진 가을을 훑어 온다/ 비 오는 날 동물원 옆/ 노란 비옷에 장화 신은 아이가 지나갈 것 같다/ 오늘도 음률이 발레를 맞이한다.

지난 8월 13일 저녁 7시 30분, 서강대 너른 메리홀에서 T-Arts Lab 주최·주관, 발레블랑, 이화발레앙상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문무용수지원센터 후원의 탁지현(T-Arts Lab 대표) 안무의 <Lifing>(라이핑)이 공연되었다. ‘삶은 계속된다’라는 뜻의 <Lifing>은 Life(삶)+-ing의 합성어이다. 탁지현은 <Lifing>을 통해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열정의 합체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삶을 관조한다. 여인의 삶은 정제되고 리듬을 타고 직조된다. 사유의 숲에서 만나는 그녀의 삶은 견고한 믿음의 틀에서 발레의 기본 속성을 견지하는 산조(散調) 적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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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현 안무의 'LIF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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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현 안무의 'LIFING'


T-Arts(예술적 시도의 Trial, 움직임 훈련의 Training, 무용 교육의 Teaching)의 신선한 모습을 보인 <Lifing>은 프롤로그에 이은 1장; ‘땅 위에 서다’ 2장; ‘춤추는 사자’ 3장; ‘방랑자와 그 그림자’ 4장; ‘오늘을 걷다….’ 의 4장으로 구성된다. 자전적 소설에 견주어지는 발레는 자신에게 느낌표가 되었던 내용이 줄기가 된다. 니체가 언급한 인간 정신의 세 가지 변화 ‘낙타-사자-어린아이(초인)’의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반추해나간 작품은 공기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견고함을 보인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논리에 준거함을 입증한다.

프롤로그; 암전 상태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커튼의 꽁지 부분만 보이면서 빛과 움직임이 새어 나온다. 하루가 시작되고 새소리, 파도 소리, 청소기 소리에 이르는 자연·인공 음(音)과 더불어 창과 탁자를 닦는 중년 주부(탁지현)의 현재적 일상이 묘사된다. 창세기적 범위를 자신으로 축소하고 현재를 살아간다. 기독교적 경건과 낭만을 물린 차가운 지성이 들어선다. 각자의 영역을 암시하는 원이 확장된다. 동양철학에서라면 우보(牛步)의 상징처럼 황소가 등장할 법한데 탁지현의 발레적 사유에는 니체의 ‘낙타’가 동화적 분위기로 슬며시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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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현 안무의 'LIF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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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땅 위에 서다’, 인간은 태어나고, 서게 된다. 잠옷 차림의 여인과 동일체처럼 보이는 아이는 모녀나 사제 사이로 성장할 것을 암시한다. 현재를 껴안은 현상, 우울이 낀 상상, 존재를 일으키는 힘에 관한 전개는 일반적 범주를 넘어선다. 익숙한 막스 리히터(Max Richter)의 ‘꿈’(Dream)이 골고루 공간에 퍼진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태어나길 계획한 이는 없다. 땅 위에 발을 딛고 서는 삶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시작된다. 숏컷 여인(탁지현)의 바른 삶의 연대기가 상상력의 율동을 시작한다. 여인은 단정하게 이 땅에 좌표를 설정한다.

2장; ‘춤추는 사자’, 시계 소리가 바쁜 현실을 묘사한다. 현재적 인물이 녹화된 군무 영상과 조화를 이루면서 스쳐 지나간다. 누구에게나 무서울 것 없이 포효하며 사자처럼 열심히 살아가던 ‘청년 시대’가 있었다. 세상에 던져진 청년들은 걷고, 달리고, 오르고, 춤춘다. 한동안 사자처럼 포효했지만, 인생은 알 수 없는 미로 같다. 수평으로 조명 띠가 그어지고 요란한 바이올린이 현대발레의 경쾌함을 이끈다. 에지오 보소(Ezio Bosso)의 2번 교향곡 ‘나무 아래, 목소리’(Under the trees, voices), 아벨 코르체니오스키(Abel Korzenioski)의 <싱글맨>의 OST 중 ‘어디에 가더라도’(Going somewhere)가 다양한 인적 진법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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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방랑자와 그 그림자’, 매덕(Madoc)의 「나선회의」(Disparition, 螺旋回位)가 해설로 들려온다. 중년 여인이 세상의 각박해짐을 느끼는 단계, 조신(操身)의 메시지는 많은 짐이 부려져도 낙타처럼 묵묵히 견뎌내며 걸어가는 것이다. 삶의 무게가 숫자로 다가온다. 빈백(bean bag)의 수사(修辭)가 진행된다. 사막의 언덕을 넘으면 ‘어린이’처럼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순간이 온다. 무수한 춤의 조합 속에 명문장(名文章)이 바람처럼 속삭인다. 니체의 초인은 해탈을 뒤집어쓴다. 안무가는 순응자적 삶을 선택하고, 순간을 미래에 두고 나심 탈레브의 안티 프래질(anti-fragile)의 시간을 생각한다. 현재까지 지속되는 유가적(儒家的) 여인의 삶은 니체의 사막론의 핵심에 다다른다.

4장; ‘오늘을 걷다...,’, 도입부와 상관을 이루는 사막의 바람소리, 영상은 낙타와 대상들의 이미지를 보여주곤 사라진다. 아벨 코르체니오스키(Abel Korzenioski)의 <싱글맨> OST 가운데 메스칼린(Mescaline, 흥분제)이 분위기와 만난다. 매리스 얀슨(Mariss Jansons)의 '쇼스타코비치 재즈모음곡 2번, 왈츠2'에 맞추어 각오를 다지는 여인들의 모습이 경쾌하다. 짐 리브스(Jim Reeves)의 ‘저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Welcome to my world)가 홀로서기의 의지, 안티프래질(anti-fragile)의 원리와 용해된다. 이 세상에는 충격을 받으면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것들이 있다. 곤경을 당하기 전보다 더 당당해진 자신, 견뎌냄을 이겨내고 나면 더 단단해질 것이라는 자기 최면이 진심이 담긴 움직임 속에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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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현 안무의 'LIF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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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현 안무의 'LIFING'


인간은 살아가면서 숱한 도전과 역할, 난관과 마주한다. 대전염병도 안티프래질(anti-fragile)개념과 연관된다. ‘쉼’의 도구로 사용하는 빈백(bean bag)은 수양의 정도에 따라 구조상 의미가 달라진다. 무거운 짐이라는 생각을 넘어서면 자신이 동반해야 하는 무엇임을 깨닫게 된다. 관조용 <Lifing>(라이핑)의 의미를 구축한 출연에는 탁지현을 비롯하여 김다애(독일 Staatstheater Nuernberg 무용수 역임), 서민영(안양예고 강사), 배민지(선화예중 강사), 최솔빛나라(바가노바 발레아카데미 강사), 이정은(국립국악고 강사), 유지수(발레블랑 단원), 김서희(인천예고 강사)에 이르는 이화여대 및 동 대학원 졸업의 발레리나가 주축이 되어 있다.

탁지현은 예원학교, 서울예술고(최우수상) 졸업, 이화여대 무용과(우등상) 및 동 대학원 무용학박사(Ph. D). 현)T-Arts Lab 대표, 이화여대 문화예술교육원 강사,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무용예술강사. 이화여대 무용학연구소 연구원, 한국무용교육학회 상임이사, (사)한국발레협회·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 이사, 이화발레앙상블· 발레블랑 단원(안무가, 무용수). 전)수원대 객원교수, 이화여대, 청주교대, 대구가톨릭대, 경성대, 인천예고 강사 역임. 경기도 장애인 평생교육 우수사례 발표 ‘무용 프로그램 우수상’(2019), (사)한국발레연구학회 ‘한국발레아카데미상’(2019), 한국무용교육학회 ‘무용연구교사상’(2015). 대표안무작으로는 <제2막-여자>(2021,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발레블랑 정기공연), <느린 풍경>(2018,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 발레블랑 정기공연), <조우(遭遇)>(2016, 이대 삼성홀, 발레블랑 정기공연), <...MaMa!!>(2015,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 한국발레연구학회 제30회 KBA창작페스티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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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현 안무의 'LIF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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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현 안무의 'LIFING'


탁지현 안무의 <Lifing>은 스치는 삶의 유의미한 퇴적층에서 채취해낸 창작발레이다. 탁지현은 무거운 짐을 인내하며 참아내면서 자신의 위치를 지켜내는 기독교적 삶을 지향한다. 보석의 단단함에 견주어지는 견고한 기독교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예술적 활동은 들뜸을 가라앉힌 발레의 맛을 느끼게 한다. 탁지현은 기교를 앞서는 발레적 영혼을 존중한다. 그녀는 <Lifing>을 통해 꽉 찬 발레적 진전과 격조의 지적 발레를 추구하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