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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가을 향기 속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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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가을 향기 속을 걷다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시월이다. 마침내 그대 없이도 살고 싶은 시월이 온 것이다. 한껏 투명해진 9월의 햇살이 시월로 접어들며 황금색을 띠기 시작한다. 생의 마지막에 이른 한해살이풀들은 꽃 진 자리에 어느새 작은 씨앗들을 내어 달고 바람에 흩뿌려댄다.

매일 걷는 공원 산책로의 계수나무 잎이 잎 가장자리부터 노랗게 물들어 가며 달콤한 달고나 향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바람을 타며 수런대는 나뭇잎들의 내밀한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내 안에도 가을이 스며드는 것만 같다. 볕 바른 곳에 서 있는 모과나무도 여름내 간직해 온 모과 열매에 푸른빛을 지우고 청명한 시월의 하늘에 돋을새김 하듯 조금씩 노란색으로 익어가며 향기를 더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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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엔 늦더위가 남아 있어 아직도 여름처럼 덥다. 물든 잎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머지않아 나무들은 저마다 색색으로 물들어 세상의 풍경을 황홀하게 바꾸어 놓을 것이다. 기후와 태양이 내리쬐는 시간으로 계절을 인지하는 식물들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때맞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잎을 물들이고 미련 없이 내려놓는다. 거기에 비하면 슬픔과 기쁨의 계절을 쉬 알아차리지 못하는 나 자신이 훨씬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한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듯이 슬픔의 계절이 지나가면 기쁨의 계절이 온다는 것을 기억만 해도 삶이 이렇게 팍팍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단풍나무 산책로를 벗어나 천변으로 내려서면 머리를 풀어 헤친 억새꽃들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눈부시다. 억새꽃이 핀 천변에 앉아 조용히 일렁이며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복잡하던 마음이 이내 편안해진다. 강 건너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에 피어나는 뭉게구름이 그림처럼 예쁘다.

나는 구름을 좋아합니다. 그것들은 착하고 조용한 동지처럼 너무나 친근하지요.”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란 책에서 읽었던 구름에 대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내가 SNS에 올린 구름 사진을 보고 나의 글벗은 한정판 날씨라고 했다. 자연의 변화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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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 산책로를 귀에 이어폰을 꽂고, 마스크에 까만 선글라스까지 쓰고 조깅을 하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겠지만 그는 새소리나 물소리, 바람 소리는 물론 예쁜 꽃이나 그 꽃이 풀어놓는 향기도 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곤 한다. 불쑥 그를 불러 세워 잠깐만 멈춰 서서 주변을 한 번 둘러보라.”고 감히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물론 생각만 했을 뿐 행동으로 옮긴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이다. 각박할수록 바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게 인생이다.

경사진 둑을 따라 들국화가 무리지어 피어 있다. 흔히들 뭉뚱그려 들국화라고 부르는 꽃들이다. 하지만 실은 들국화란 이름의 식물은 없다. 산과 들에 피는 국화과의 식물을 그리 부르는 것뿐이다. 우리가 들국화라 부르며 무심코 지나쳤던 노란 색의 산국과 감국, 보라색 개미취와 쑥부쟁이, 그리고 흰색의 구절초가 모두 국화과의 식물이다. 구절초에는 산구절초, 남구절초, 포천구절초 등도 있다. 향기가 맑고 그윽해서인지 국화과의 꽃에는 늘 벌과 나비의 방문이 잦다. 나비가 보고 싶다면 나비를 찾기 전에 국화과의 꽃을 찾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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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천변에서 부쩍 많이 눈에 띄는 게 가시박이다. 생태계 교란식물 중 하나인 가시박은 귀화식물로 1990년대 북미에서 오이 재배를 위한 대목으로 들여왔는데 번식력이 강해서 순식간에 다른 식물들을 덮어버린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들여왔다가 골칫거리가 되어 버린 가시박의 운명도 얄궂지만 사람이든 식물이든 지나친 욕심은 스스로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모쪼록 욕심을 내려놓고 향기 속에서 여유를 찾는 가을이기를.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