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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가을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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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가을의 속삭임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때아닌 한파주의보에 놀란 사람들이 서둘러 겨울옷을 꺼내 입어도 자연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여름을 건너온 나무들이 물들기도 전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추위에 푸른 잎을 떨구는 나무가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엷어진 가을 햇볕을 쬐며 조금씩 가을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나는 아침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초등학교 교정에 서 있는 느티나무와 대왕참나무의 변화를 살피며 곧 지나가 버릴 것만 같은 가을을 마주한다. 여름내 초록 그늘을 드리우던 느티나무는 햇살을 빌려 수천수만의 이파리들을 점차 밝은 노랑으로 물들이고, 산책로에 줄지어 선 대왕참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빨갛게 불타오르는 중이다.

흔히 사람들은 가을을 두고 색(色)의 계절이라고 한다. 연둣빛 봄을 지나 초록 일색인 여름을 건너 가을에 다다르면 숲의 나무들은 울긋불긋 물들며 온갖 색의 향연을 펼친다. 저마다 잎 속에 감춰두었던 마지막 색을 발하며 색색으로 물들어 한데 어우러져서 가을만의 고유한 색은 규정할 수도, 찾을 수도 없다. 마치 가을이란 시공간은 색색의 물감을 뒤섞어 놓은 커다란 팔레트와도 같다. 신기한 것은 그 현기증 나는 색의 향연이 수많은 악기가 어울려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오케스트라처럼, 무질서의 카오스가 아닌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매혹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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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낮은 곳에서 시작되어 높은 곳을 향해 가지만 가을은 높은 산정으로부터 물들기 시작하여 사람의 마을로 향한다. 그래서 가을을 빨리 만나고자 한다면 사람이 거리를 떠나 높은 산을 찾아가야 한다. 하지만 바쁜 일상을 벗어나 일부러 산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은 게 우리네 삶이다.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자연의 계절은 우리가 게으르거나 무심해도 탓하는 법 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녀가기 때문이다. 다만 오고 가는 계절을 놓치지 않고 제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선 좀 더 부지런하고 늘 오감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러 먼 산을 찾아갈 수 없다면 가까운 숲이라도 찾아가면 지친 심신을 달래고 좀 더 가을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미국의 환경심리학자 카플란(Kaplan)은 일상에서 누적된 심신의 피로를 풀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장소의 조건으로 일상으로부터 탈출감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적당한 면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숲은 카플란이 말한 이 네 가지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초록 생명으로 가득한 숲은 잿빛 도시의 일상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맑고 쾌적한 숲의 공기는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아름다운 꽃과 자연경관은 우리의 시각을 사로잡는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는 우리의 귀를 씻어주고, 꽃향기, 숲 내음은 코를 벌름거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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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색으로 물들어가는 단풍에 눈길을 빼앗기다 보면 자칫 놓치기 쉬운 게 가을의 소리이다. 사람들로 붐비는 등산로를 벗어나 숲속을 거닐어 보라.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따르는 낙엽 밟히는 소리…. 낙엽귀근(落葉歸根)이란 말처럼 해를 두고 쌓인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기까지 이리 정겨운 소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절로 귀를 열게 된다. 그 낙엽 위로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낙엽 지는 소리,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가 귓바퀴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그러고 보면 가을은 색의 계절보다는 소리의 계절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찬란한 자신의 색에 취해 자만하는 법 없이 가을바람에 기꺼이 길을 내어주며 흩날리는 낙엽들의 방하착(放下著)은 내 마음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을 끊임없이 흔들어댄다. 일상에 지친 사람이라면 잠시라도 고요한 숲에 들어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볼 일이다. 곧 가을이 들려주는 속삭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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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