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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뿌리를 찾아서①] 122년을 버텨온 거목, 우리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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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뿌리를 찾아서①] 122년을 버텨온 거목, 우리은행

우리은행의 뿌리 ‘대한천일은행··· 설립 122년 역사지닌 최초의 민족은행
독립운동에도 앞장···국채보상운동줌심· 독립운동자금 관리 역할 감당
또 다른 뿌리 ‘한일은행’···끈질기게 이어온 '민영 은행'의 꿈
한빛은행에서 우리은행으로···최악의 외환위기를 '쇄신'으로 극복
“미래경쟁력은 해외에서”···글로벌 초일류 금융기관'으로 도약

1899년 '대한천일은행' 최초 본점 상상도 및 표지석 [자료=우리은행]이미지 확대보기
1899년 '대한천일은행' 최초 본점 상상도 및 표지석 [자료=우리은행]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아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인 없는 대화다"면서“역사는 반복된다”고 주장했다. 지나간 역사를 공부해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뜻이다. 아울러, 미래에 대한 조언 역시 과거 속에 담겨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재는 코로나19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이 높은 시기다. 미증유의 감염사태로 한치 앞도 예측하기 힘들다. 보다 명확한 경제 전망을 위해선 과거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드워드 카아의 주장대로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경제전망을 예측하기 위해선 금융, 특히 그 중에서 은행의 역사부터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설립된 지 무려 122년 된 우리은행의 역사는 그 자체로 한국 금융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특히 본지는 일제강점기, 1997년 외환위기 등 수많은 위기를 극복해 온 우리은행의 발자취를 통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조언을 얻고자 한다.

◆가장 곧고 깊은 뿌리 ‘대한천일은행’


우리은행의 역사는 1899년 1월 30일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에 근간을 두고 있다. ‘화폐융통(貨幣融通)은 상무흥왕(商務興旺)의 본(本)’이라는 고종황제의 뜻에 따라, 황실의 내탕금과 정부관료, 조선상인 등이 납입한 이른바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가 ‘대한천일은행’이다. 당시 조선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후로 일본을 비롯한 서구열강으로부터 금융 자본 침탈 등 경제적 침투를 당하고 있었다. 외세의 금융 침탈을 막고자 ‘민족은행’ 설립에 대한 욕구가 불타오르는 시기이기도 했다.

‘대한천일은행’의 초대 행장은 오늘날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탁지부 대신을 지낸 민병석이 역임했다.1902년 3월에는 2대 은행장으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이 취임했다. 영친왕은 ‘조선사람 이외에는 대한천일은행의 주식을 사고 팔 수 없다’고 명시하면서 그 정체성을 공고히 했다. 대한천일은행은 일제의 금융 침탈에 저항하는 금융의 전초 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1907년부터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의 중심이었으며, 독립 운동 자금을 관리하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이 대한천일은행의 본점 앞에서 열린 것은 그만큼 상징성을 지닌 탓이다.

1920년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 [자료=우리은행]이미지 확대보기
1920년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 [자료=우리은행]

하지만 이같은 대한천일은행의 민족은행으로서의 행보는 결국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저지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대한천일은행은 조선총독부의 강압으로 1911년 2월11일
상호가 ‘조선상업은행’으로 바뀌게 된다. 주요 경영진 자리도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1912년 4월 1일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와 합병 한데 이어 1923년 6월 30일 원산상업은행과 합병,1924년 8월31일 조선실업은행과의 합병, 1925년 9월15일 대동은행 과의 합병 등 계속된 일본계 은행들과의 합병이 이어지며 일제의 입맛에 맞는 경영 체제로 바뀌어간다. 이는 1945년 광복 전까지 계속된다.

해방 후 1950년 4월 24일에야 조선상업은행은 상호를 ‘한국상업은행’으로 변경하며 일제의 잔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상호를 바꾼 상업은행은 당시로는 혁신적인 행보를 보였다. 회계기와 출납기 등을 도입하는 등 업무의 기계화를 적극 추진했으며, 1956년에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59년에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여성 만을 위한 은행 영업점 ‘숙녀금고’를 개설해 여성의 사회 진출도 도왔다.1960~70년대에는 급격한 산업화 흐름과 경제개발 계획에 발맞춰 중화학 공업 발전을 위한 정책 금융 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특히 국내 자금 조달을 위해 ‘예금제일주의’를 내걸고 강력한 저축운동을 펼쳤으며, 해외로 진출한 수출기업 지원에도 앞장섰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의 또 다른 주인공은 당시 상업은행이었다.

또 다른 뿌리 ‘한일은행’…끈질기게 이어온 민영 은행의 꿈

우리은행의 또 다른 뿌리는 ‘한일은행’이다. 한일은행은 ‘조선신탁주식회사’와 ‘조선중앙무진주식회사’를 전신으로 한다.

1932년 조선신탁주식회사' 본점 [자료=우리은행]이미지 확대보기
1932년 조선신탁주식회사' 본점 [자료=우리은행]

조선신탁주식회사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공칭자본금1000만원, 불입자본금 250만원으로 1932년 12월 설립된 신탁회사다.자본금은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이 각각 30% 정도씩 출자했으며 나머지는 동일은행, 호남은행 그리고 최창학, 방의석 등 조선인과 조선내 일본 기업인이 출자했다. 영업분야는 금전신탁과 토지 등 부동산신탁 그리고 유가증권신탁 등 세 부분 이었다. 회사설립 후 영업 실적이 급증했는데 창립 6개월 후인 제1기말에 총수탁재산이 200 여 만원이었지만 1940년 상반기에는 4400 여 만원, 1945년 3월에는 2억5400여 만원으로 급증했다. 주로 기업 금융 부문에서 강세를 보였다. 이후 1946년 상호를 '조선신탁은행'으로 개명했다가 1950년 '한국신탁은행'으로 바꿨다. 1954년10월 한국상공은행과 합병해 '한국흥업은행'으로 거듭났다. 이후 1958년 은행민영화에 따라 한국흥업은행의 대주주였던 정부가 소유주식을 삼성물산 계열에 매각하면서 1960년 1월 '한일은행'으로 재탄생 된다.

하지만 민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민간 지분은 정부에 회수 돼 4년 만에 다시 '국영화'의 길을 갔다. 이후 1963년 한일은행은 외국환 업무를 시작하며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했다. 1968년에는 시중은행 최초로 도쿄지점을 개설하는 등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1년에 한일은행은 다시 '민영화'라는 열매를 딸 수 있었다. 나아가 리스사를 설립하고, 증권사를 인수하는 등 본격적인 확장 행보에도 나섰다.

반면,당시 무진회사는 금융기관으로부터 비교적 소외된 도시 노동자와 영세 상공업자의 자금을 융통하는 등 중소 금융을 담당하던 회사였다. 조선인 회사도 있지만 대부분이 일본인 회사였다. 중일 전쟁 후 전국의 무진회사가 통합되면서 조선유일의 무진회사로 남은 ‘조선중앙무진주식회사’(1936년 설립)는 조선신탁과 식산은행이 대주주로 사실상 특수 금융기관의 하나로 변질됐다.

1960년대 '한일은행' 본점 [자료=우리은행]이미지 확대보기
1960년대 '한일은행' 본점 [자료=우리은행]

◆외환위기 늪, ‘쇄신’으로 극복

승승장구하며 성장하던 상업은행과 한일은행, 두 은행은 거대한 시련에 부딪히게 된다. 1997년 아시아 전역을 강타한 외환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외환위기가 국내에 몰고 온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1997년 1월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한보, 삼미, 진로, 기아 등 당시 재계 수위권 대기업들의 부도가 연달아 터졌다. 그해 11월 우리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까지 신청했다.

은행들 역시 당시 기업들의 연쇄 도산으로 부실채권이 늘면서 어려움에 직면했다. 특히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은 기업 금융 중심으로 영업을 펼쳐왔던 만큼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에 대한 충격이 더 컸다. 결국, 1997년 말 기준 BIS(국제결제기준)비율인 8%에도 못 미치는 미달로 정부로부터 경영개선권고까지 받게 된다. 결국 이를 극복하고자 내 놓은 양 은행의 극약 처방은 '합병'이었다. 1999년 1월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은 대등한 합병으로 ‘한빛은행’이란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합병 과정에서 양사는 엄청난 규모의 구조조정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특히, 대규모 공적자금까지 지원받게되면서 한빛은행은 예금보호공사의 완전한 자회사가 됐다. 다시 '민영화의 꿈'은 요원해진 것이다.

1970년대 '한국상업은행 본점(왼쪽)'과 1980년대 '한일은행' 본점 [자료=우리은행]이미지 확대보기
1970년대 '한국상업은행 본점(왼쪽)'과 1980년대 '한일은행' 본점 [자료=우리은행]

이 같은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서 한빛은행이 내민 카드는 ‘쇄신’이었다. 한빛은행 창립 당시 김진만 초대 행장은 “한빛은행은 새로 창립된 은행이다.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라는 말을 강조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부수고 새롭게 구축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한빛은행은 부실자산과 고정자산을 정리하고, 투입된 공적자금을 활용해 자본도 확충했다. 또한 전산시스템과 신용리스크관리 시스템을 개발했으며, 성과급제를 도입하는 등 성과주의 문화를 은행 전반에 걸쳐 정착 시키고자 쇄신을 단행했다.

결국, 한빛은행은 출범 3년 만에 당기순이익(2001년) 7129억 원을 기록하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2002년에는 평화은행을 흡수 합병해 지금의 '우리은행'으로 거듭났다. 이후 20여 년간 국내 최고 은행 자리를 향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우리은행은 연내 '완전 민영화'를 앞두고 또 다시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국내 최고(最古)의 은행, 세계로 뻗어나가다

“미래경쟁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글로벌 시장에서 판 가름 날 것으로 판단했다”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강조한 말이다. 손태승 회장은 이 말과 함께 우리금융이 가진 해외 네트워크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2021년 '우리은행' 본점 [자료=우리은행]이미지 확대보기
2021년 '우리은행' 본점 [자료=우리은행]

올해 3분기 기준 우리은행의 누적 순이익은 1조 9867억 원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위기 상황 속에서도 역대 최고 실적을 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은행권에선 최근 몇 년 새 저금리·저성장 기조가 이어지고 장기화되면서, 은행의 국내 영업 부문에선 성장에 한계에 왔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우리은행 역시 국내 최고(最古)의 은행임에도 '신성장 동력'을 해외에서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우리은행은 2014년 인도네시아 소다라은행 인수를 시작으로 캄보디아 여신전문금융사 말리스(Malis) 인수(2014), 미얀마 여신전문금융사 신설(2015), 필리핀 저축은행 웰스뱅크(Wealth Bank) 인수(2016), 베트남 현지법인 신설(2016) 등 약 6년 만에 450여 개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확보했다. 해당 국가 내 지점들 역시 지속적으로 신설해 대면 거래를 강화하는 동시에 국내 영업방식인 부동산 담보대출, 우량고객 신용대출, 할부금융, 신용카드 등을 현지에도 보급해 현지 내 금융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또한 EU지역에도 진출 교두보를 마련코자 2018년 10월에 유럽법인을 설립했다. 이른바 유럽금융벨트(런던지점-유럽법인-폴란드사무소)를 구축한 것이다.이어서 폴란드지점 개설과 멕시코법인 설립도 추진 중이며, 이를 통해 동유럽 영업도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손태승 우리금융그룹회장은 “우리은행은 122년 역사의 민족 정통 은행으로 지금껏 고객의 한결같은 지지와 성원 속에서 성장해 왔다"며 "앞으로도 고객신뢰는 물론, 은행 선배들의 경험과 지혜를 발판으로 대한민국을 넘어 '글로벌 초일류 금융기관'으로 도약해 나갈 것이다”고 강조했다.


신민호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sho634@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