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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김하예린 안무의 발레 'Pli, 시간의 시작'…시간의 흐름에 관한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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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김하예린 안무의 발레 'Pli, 시간의 시작'…시간의 흐름에 관한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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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예린 안무의 발레 'Pli, 시간의 시작'
이화여대 삼성홀에서 공연된 이화발레앙상블(예술감독 신은경) 기획공연 ‘A&Z’는 김하예린 안무의 발레 <Pli, 시간의 시작>이 선도했다. 인간의 삶의 시종은 온전히 시간에 묶여있다. 인간의 유한성에 비해 신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연대기적·공시적 시간의 동시성, 그 개념 속에 3시제가 공존한다. 창작의 동인(動因)은 시간의 무게이다. 시간의 지속성은 주름(Pli)과 연결된다. 안무가는 선형적 시간 안에서도 원형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름을 의미하는 Pli는 접힘과 펼쳐짐을 통한 생성을 사유한다. 철학적으로 들뢰즈의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적 해석이다. <Pli, 시간의 시작>에서 안무가는 무용에서의 Plié가 구부러짐과 펼쳐짐을 통한 동작의 움직임인 생성을 만들어내고, pli(주름)를 이미 내포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모든 세월과 시간을 의미하는 주름을 작품의 시작을 의미하는 ‘A’의 창조의 순간과 연결시킨다. 주름은 모든 시간의 출발점이자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서사이며 결정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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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예린 안무의 발레 'Pli, 시간의 시작'

유한한 시간 속에 ‘한순간, 바로 지금 여기에’ 나타나는 시간이 주름진 존재들로 표현된다. <Pli, 시간의 시작>은 표면적으로 한정된 시간 속에서 진행되지만, 유한한 시간 속에서 내부와 외부가 서로 침투, 상호관계를 맺는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시간을 표현한다. 인간의 탄생부터 무한의 가능 세계가 시작됨과 동시에 인간은 매 순간 새로운 상황이나 존재와 마주치고 극복해가며 시간의 굴레를 견디며 살아간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용기를 부른다.

시간의 시작과 인생 역정은 불특정, 비정형으로 열리며, 인간의 힘으로 살아가지만 불가피한 불수의 적이고 즉흥적인 통제 불가능한 상황과도 마주한다. 인간의 몸은 무수한 시간성을 담아낸다. 인류의 삶과 역사, 창조의 순간들은 연대기적 시간 속 특정 순간을 다시 상기시킨다. 작품은 창조주가 허락한 시간의 열림과 시간의 비정형적이고 자율적 순간들을 인간의 의지와 시간의 흐름 속에 의도한다. 새롭게 맞닿아 생성되는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이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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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예린 안무의 발레 'Pli, 시간의 시작'

주제 ‘A&Z’에 대한 생각과 시간에 대한 탐색 속에 <Pli, 시간의 시작>은 움직임과 이미지에서도 의도된 결정성과 즉흥적으로 발생하며 나타나는 비결정적 열림의 순간을 동시에 내포한다. 구체적으로 시각과 청각이 대부분 통제된 주름관 속에서 나타나는 무용수의 즉자적인 움직임을 리서치하였으며, 바로크 음악을 새롭게 해석한 Mucof의 현대음악 ‘Versailles’와 주름관 밖에서 움직이는 무용수와의 연결성을 탐구하여 창조, 생성의 순간을 나타낸다.

안무가 김하예린은 시간의 굴레 속에서 인간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시련의 극복을 기독교적 삶과 성경에서 해답을 찾도록 암시한다. 태초에 빛이 있었고, 세월이 깨달음을 주었음을 주지시킨다. <Pli, 시간의 시작>에서 창조의 순간은 현재의 삶 속에서 약동하는 미지의 세계로 이동시키며, 새로운 α(알파)를 통한 무한한 연장으로 끊임없이 의미를 생성한다. 주제를 은유하는 제목이 신선도를 가져오는 작품은 프롤로그를 포함한 3장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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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예린 안무의 발레 'Pli, 시간의 시작'

프롤로그 : 빛과 이미지, 긴 뱀을 연상시키는 주름관의 모습과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인간의 진화와 같은 움직임이 실루엣으로 보여진다. 1장 : ‘태초에 흑암과 공허 속에 빛이 있었으며’ ; 작품에서 오브제이자 움직임의 즉흥성을 유도하기 위해 사용된 주름관(duct)은 잠재적 공간이자 통제 불가능한 시간을 형상화한다. 이때 주름관 안의 공간과 현실 공간의 유동적 구도 안에서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양 측면을 동시에 드러내어 특정한 시작의 순간을 포착한다. 카오스는 복잡한 질서를 뜻한다. 작품의 이미지들은 혼돈 속에 숨어있는 질서를 창발한다.

2장: ‘공유되는 시간’ ; 각자의 인생행로에서 인간 존재는 타자를 향한 열림의 상태로 시간을 공유하고 공존함을 표현한다. 공존 속에 자신의 의지대로 시간을 만들어가려는 인간의 태도와 한 편으로는 시간의 매혹적인 순간에 이끌리듯 살아가는 인간의 단상이 묘사된다. 무용수의 듀엣은 인간이 시간 속에 느끼게 되는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스팅(Sting)과 클라우스 노미(Klaus Nomi)의 콜드송이 사용되며 음악과 움직임에 있어서 환기나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 프로펠러 느낌의 회전 움직임과 사운드가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3장: ‘시간의 얼굴’ ; 연속적이고 다채로운 시간의 모습과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인간을 표현한다. 시간은 흔적을 남기는 것과 같이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순간까지를 담아낸다. 그 자리에는 주름의 접힘과 펼쳐짐을 따라 다른 여러 가능 세계들과의 만남으로 연결되며 유한자인 인간의 무한으로 이행되는 순간을 표현한다. 음악은 일상 속 모든 순간에 영감을 얻고 소리를 채집하고 음악으로 완성시키는 과정을 담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Ubi’를 사용한다.

시간성을 담아낸 영상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세계의 주름과 자연 문명의 주름, 시간의 주름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안무가가 영상을 작품에 투입시킨 의도는 상호표현의 관계가 사람사이의 표현뿐만이 아니라 모든 자연의 주름과 습곡, 부유하는 것들, 생성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들의 be-coming 되어감을 현실의 인간이 함께 사유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존재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 의미가 생성되어가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지층과도 같은 주름을 만들어 가는 세계의 변화와 흐름 속에 주름진 존재들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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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예린 안무의 발레 'Pli, 시간의 시작'


전혀 무관한 듯 보이지만 자신의 ‘시간의 흐름’ 속에 점차 변모하는 세계, 중첩되어 나타나는 현실의 순간, 시간 안에 달려가며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지속되는 어떤 흔적들을 찾아가는 가운데 신체로 마주한 두 손의 포개짐 속에 다시 신체의 주름이자 시간의 주름을 뜻하는 pli의 주름관으로 모든 사유가 종합된다. 마지막 장면은 작품에 사용된 주름관을 다시 한번 중첩시켜 바이탈 신호와 같이 모든 것들이 지속됨을 암시한다.

<Pli, 시간의 시작>에서 사용된 오브제와 영상, 무대 위의 존재들은 시간과 함께 무한한 변화와 생성을 표현하고 있다. 몸에 구현된 표현의 확장은 영상매체를 통한 확대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지나온 시간과 새로운 삶의 시작이 하나의 신체로 종합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김하예린, 윤승민이 연기해낸 <Pli, 시간의 시작>은 독창적 상상력과 상상적 도구, 조밀한 움직임 구성, 능숙한 기교로 현대발레의 실험적 일면을 제시함으로써 발레 발전에 일조했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