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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뿌리를 찾아서⑩] 대구은행, 최초의 지방은행에서 '백년은행'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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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뿌리를 찾아서⑩] 대구은행, 최초의 지방은행에서 '백년은행'을 꿈꾸다

‘내자동원’ 기치를 가진 최초의 지방은행, “대구의 돈은 대구은행으로”
경기침체 극복 위한 내실화···지역밀착과 경영디지털 경쟁력 강화
백년은행을 꿈꾸는 패스트 팔로워··· 지역과 함께 혁신의 문 두드려

1967년 10월 7일 대구은행 임직원 창립기념식 [사진=DGB대구은행]이미지 확대보기
1967년 10월 7일 대구은행 임직원 창립기념식 [사진=DGB대구은행]
“DGB대구은행은 코로나19 시대 지역민의 생명을 지키고 안전을 보호 하는 헌혈 버스, 의료진과 같이 코로나19를 극복하는 지역 경제의 핏줄이 되겠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린 지난 2020년 10월 임성훈 DGB대구은행장이 취임하며 던진 화두다.

최초의 지방은행인 대구은행은 수도권 자금 이탈로 말라가던 지역 경제의 아픔에서 탄생했다. 대구은행은 지역 기업과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자금을 공급하는 말 그대로 ‘핏줄’이었고, 석유 파동이나 외환 위기 등으로 지역 경제가 휘청 거릴 때에는 버팀목이었다. 그리고 지금, 대구은행은 반세기 동안 쌓아온 지역민과의 유대를 무기 삼아 새로운 ‘백년은행’을 꿈꾸고 있다.

◆‘내자동원’의 기치를 가진 최초의 지방은행, “대구의 돈은 대구은행으로”


대구는 섬유 산업의 중심지로 근대 산업 경제의 태동을 알린 지역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대구지역 내 공장 등 산업 기반을 철저히 파괴한다. 이로 인해 1945년 14.9%에 달하던 전국 내 예금 비중이 1960년 8.7%로 급락하는 등 수도권으로의 자금 이탈 현상이 가속화된다.

1967년 10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의 예금 1호 접수 모습 [사진=DGB대구은행]이미지 확대보기
1967년 10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의 예금 1호 접수 모습 [사진=DGB대구은행]

이는 1960년대 경제 개발 계획과 맞물려 지방은행의 필요성을 증대 시켰다. 이에 정부가 1967년 1월 지방은행 설치를 천명하자, 대구 상공업계는 대구은행의 설립을 추진했다. 그리고 그 해 10월 7일 대구시 중구 동문동에서 최초의 지방은행인 ‘대구은행’이 그 서막을 열었다. 대구은행의 경영목표는 '내자(內資) 동원'과 '지역 환원 금융체계'였다. 지역민 역시 대구은행의 탄생에 성원을 보냈다. 대구은행은 개업 첫날에만 예·적금 3억1100만원, 대출금 9000만원에 달하는 등 진기록을 써 내려 간다.

지역밀착형 소형점포 중심 전략은 대구의 서민과 영세 상공인들이 대구은행을 ‘우리의 은행’이라고 인식하게 만든 원동력이 됐다. 대구은행은 1969년 9월 ‘대구의 돈은 대구은행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까지 내걸고 시중은행과 차별화된 지역 대표 은행의 이미지를 강화했다. 그 결과 설립 3년 만인 1970년에는 예금이 50억원, 1971년엔 100억원, 1972년엔 200억원을 돌파한다.

1975년 1월 4일 대구시 금고업무 개시 [사진=DGB대구은행] 이미지 확대보기
1975년 1월 4일 대구시 금고업무 개시 [사진=DGB대구은행]

성장세도 이어졌다. 대구은행은 1975년 대구시, 1976년엔 포항시의 시금고 업무를 전담했다. 1977년에는 증권업 허가를 취득했다. 또한 여섯 차례에 걸친 저축 운동을 통해 대구은행은 설립 10년 만에 예수금 1000억원을 돌파했다. 10차에 걸친 증자를 통해서 자본금이 150억원으로 확대되는 등 성장세도 이어갔다.

◆경기침체 극복 위한 내실화…금융 개방과 함께 ‘초일류은행’으로

1980년 초 석유파동과 10·26사태로 인한 혼란은 대구경제를 극도로 침체 시킨다. 특히 대구의 주력 산업인 섬유류에 대한 주요국의 수입규제 강화는 많은 기업들을 도산 및 휴·폐업 시킨다.

대구와 한 몸이었던 대구은행의 경영 악화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1982년 대구은행은 마이너스 영업익을 시현했으며, 연체 대출 비율도 7.2%로 전년(4.8%) 대비 1.5배 가량 늘었다. 이때 대구은행의 선택은 혹독한 ‘감량’이었다. 배당률, 신규채용, 조직 등 모든 것을 축소한 끝에 대구은행은 불황의 여파에서 벗어난다.

1985년 8월 13일 유망중소기업 및 중견수출기업 초청 간담회 [사진=DGB대구은행]이미지 확대보기
1985년 8월 13일 유망중소기업 및 중견수출기업 초청 간담회 [사진=DGB대구은행]

불황에서 벗어난 대구은행은 다시 지역 경제에 눈을 돌린다. 1983년부터 3년간 57개 기업을 발굴해 318억원을 지원했으며, 1985년에는 2년간 중견수출기업을 선정해 63억원을 지원한다. 또한 영세한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1985년 ‘대구리스’를 설립했으며, 신기술의 기업화를 시도하는 중소기업 창업을 유도하고자 ‘대구창업투자’를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1986년에는 ‘계약고특별증대운동’, ‘창립 19주년 기념 저축 증대 운동 등을 펼친 결과, 그해 말 지방은행 최초로 수신고 1조원을 돌파한다.

1990년대 금융자율화는 대구은행의 새로운 성장 발판이었다. 울산·부산·마산을 비롯해 일본 도쿄에 사무소를, 서울 강남에 역삼동 지점을 개설하며 영업구역을 넓혔다. 1991년에는 지방은행 최초의 종합온라인시스템을 구축했으며, 1992년에는 기업체를 대상으로 펌뱅킹 서비스를 실시한다.

1993년 9월 2일 고객 및 지역민 초청 금융실명제 설명회 [사진=DGB대구은행] 이미지 확대보기
1993년 9월 2일 고객 및 지역민 초청 금융실명제 설명회 [사진=DGB대구은행]

이밖에 현금카드 즉시 발급 제도와 ‘무전표’ 제도를 도입하고 ‘대은금융경제연구소’와 ‘대은파이낸스’를 설립하는 등 시대를 앞서 나가는 행보를 보인다. 그 결과 대구은행은 창립 30주년인 1997년, 수신고 10조원을 달성하는 등의 성과를 이룩하지만, 그 해 불어 닥친 외환위기는 대구은행을 다시 시련에 빠트린다.

◆외환위기, 지역밀착 경영과 변혁으로 극복…지방의 위상 높이다


1997년 외환위기는 대기업의 연쇄부도를 촉발 시켰다.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삼미, 진로, 대농, 기아 등이 도산했다. 이는 금융기관의 부실화를 초래했다. 특히 대구·경북 최대 건설업체 청구 그룹의 부도는 보성, 영남방직, 금성염직 등 지역 중소기업의 연쇄 부도를 유발했다. 그 결과 1998년 대구은행의 부실규모는 9156억원으로 불어난다.

결국 대구은행은 또 한번의 감량에 들어간다. 1998년 홍콩·도쿄·뉴욕 3개 해외 사무소를 폐쇄 했으며, 대구리스를 폐업시킨다. 1999년에는 세 차례에 걸쳐 1027명을 감축하는 구조조정도 단행했다.

1997년 4월 19일 지역경제도우미통장 판매 실시 [사진=DGB대구은행] 이미지 확대보기
1997년 4월 19일 지역경제도우미통장 판매 실시 [사진=DGB대구은행]

하지만 지역민들은 대구은행의 위기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대구은행이 유상증자를 위해 전개한 ‘대구은행 주식 갖기 운동 통장’ 판매에 지역민의 동참이 이어졌다. 이를 통해 1999년 대구은행은 1000억원을 증자 하는데 성공하며 생존 기반을 다지게 된다.

2002년 2월 2일 DGB봉사단 발대식 [사진=DGB대구은행]이미지 확대보기
2002년 2월 2일 DGB봉사단 발대식 [사진=DGB대구은행]

2000년 들어 새로운 천년을 맞은 대구은행은 지역밀착 경영 구현을 위한 ‘K-프로젝트’를 수립하고 인터넷 뱅킹 시스템을 가동한다. 이듬해엔 기업 영업 센터를 신설하고 기업여신지원시스템(CRMS)을 구축하는 등 고객 중심의 영업전략을 펼친다. 2002년 금융권 최초의 봉사단은 지역사회를 위한 대구은행의 행보를 더욱 가속 시킨다.

2006년에도 대구은행의 성장은 이어졌다. 지방은행 최초로 총자산 20조원을 돌파했으며, 총수신은 18조원, 총대출은 13조원에 달했다. 동아백화점과의 제휴로 신용카드 고객은 100만명을 달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한국 경제는 저성장 기조에 접어든다. 이에 대구은행은 지역 밀착 마케팅을 강화하고 차세대 시스템 ‘넥스피아’를 구축해 생산성을 높였다. 그럼에도 지역 내 성장과 점유율은 정체됐고 지방은행으로의 한계는 명확했다. 결국 대구은행은 비은행업 진출과 새로운 성장동력을 탑재하기 위해 2011년 5월 DGB금융지주를 출범시킨다.

2011년 5월 17일 DGB금융지주 창립 기념식에서 하춘수 DGB금융그룹 회장이 북을 치고 있다. [사진=DGB대구은행]이미지 확대보기
2011년 5월 17일 DGB금융지주 창립 기념식에서 하춘수 DGB금융그룹 회장이 북을 치고 있다. [사진=DGB대구은행]

◆백년은행을 꿈꾸는 패스트 팔로워…지역과 함께 혁신의 문 두드려


DGB금융그룹은 출범 이후 ‘메트로아시아캐피탈’을 인수했으며, ‘DGB데이터시스템’을 설립했다. 여기에 기존 자회사인 대구신용정보와 카드넷이 더해지자 본격적인 그룹 시너지가 발생한다.

2013년 11월 13일 한국수출입은행과 포페이팅 업무협약 체결식 [사진=DGB대구은행]이미지 확대보기
2013년 11월 13일 한국수출입은행과 포페이팅 업무협약 체결식 [사진=DGB대구은행]

2012년엔 외환 영업과 수출입 기업에 대한 지원이 확대됐다. 같은 해 12월에는 최초의 해외 영업지점인 상해지점을 설립해 해외 진출 확대에도 나섰다. 2015년 대구은행은 2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해, 내부등급법 승인을 받는다. 또한 ‘신(新) DGB스마트뱅킹시스템’을 독자 구축하며 혁신에 불을 당겼다.

2022년 1월 3일 DGB금융그룹이 메타버스 시무식을 개최했다. [사진=DGB대구은행]이미지 확대보기
2022년 1월 3일 DGB금융그룹이 메타버스 시무식을 개최했다. [사진=DGB대구은행]

특히 대구은행은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아닌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를 표방하며 디지털 전환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지방은행으로써 대형금융사나 빅테크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지니기 어렵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했다. 대신에 검증된 기술을 빠르게 습득하면서 최신 기술을 보유한 핀테크와의 협업을 통해 디지털 경쟁력을 높여간다는 전략을 마련했다. 이를 위해 대구은행은 핀다, 토스, 카카오페이, 페이코, 페이북 등 다양한 핀테크 플랫폼과의 제휴를 맺었다. 그들이 지닌 핵심 디지털 경쟁력을 체화 하면서 대구은행만의 디지털 퍼포먼스 구현에 나서고 있다.

주목할 점은 대구은행의 디지털 전환이 단순 IT기술의 도입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구은행은 ‘지역민의 은행’을 표방하며 55년간 성장해 온 은행이다. 특히, 지역의 감성과 디지털과의 연결 및·융합을 지향하며, 이를 통해 고객의 삶에 함께 동참하고자 한다.

임성훈 대구은행장이 승합차량을 업무용 차량으로 쓰며 모바일플랫폼인 'IM뱅크' 알리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사진=DGB대구은행] 이미지 확대보기
임성훈 대구은행장이 승합차량을 업무용 차량으로 쓰며 모바일플랫폼인 'IM뱅크' 알리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사진=DGB대구은행]
대표적 결실이 바로 2019년 출시한 모바일 뱅킹 앱 ‘IM뱅크. 출시 2년도 안돼 가입자 100만명을 돌파한 IM뱅크는 지역 내 주요 관광지를 인증시 우대 금리를 제공하는 핫플적금’과 지역 소상공인을 위한 ‘IM등으로 고객 생활 전반에 걸쳐 밀착된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사람 냄새나는 디지털 플랫폼의 지향은 백년 은행을 꿈꾸는 대구은행의 강력한 각오가 담겨 있다.

김태오 DGB금융그룹 회장은 “‘따뜻한 금융으로 모두가 꿈꾸는 세상을 만든다’는 그룹의 미션은 우리의 사명이자 동시에 고객에 대한 약속”이라며 “2022년은 새로운 DGB 10년을 만들어가는 첫 해인 만큼, 우리는 이를 반드시 이루자”고 강조했다.


신민호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sho634@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