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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나, 춤사위와 연기로 그려내는 시린 추억으로 빚은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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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나, 춤사위와 연기로 그려내는 시린 추억으로 빚은 사연

[나의 신작연대기(5)] 장윤나 안무의 '기억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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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나 안무의 '기억에 담다'
시린 추억으로 빚은 사연은 기억에 남는 법/ 눈물이 말라 차가운 가슴에 겨우 실핏줄이 돌고 있었다/ 한 남자가 편지 한 통을 받는다/ 한 여인이 그곳에서 그를 맞이한다/ 그 여인은 과거의 기억에 머문다/ 현재의 모습에서 천천히 과거를 회상한다/ 인생의 황금기에 지독한 슬픔으로 유폐된 여인/ 눈물이 샘 되게 만든 비정한 남자/ 풀지 못한 매듭을 수십 년 간직한 채/ 가벼운 치매가 여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무렵/ 과거의 여인은 꿈에 그리던 사내를 만난다/ 극적인 만남은 이러하다/ 극은 진한 사연을 토(吐)한다

안무가는 창작 과정에서 어떤 소재를 활용하여 작품성을 인정받을지 고민하게 된다. 창작자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창의성과 자유로움을 발현(發現)시키면서 작품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안무가 장윤나는 창작 과정을 통해 타 분야와 ‘협업’, ‘융합’을 이루면서 결합 과정을 연구하고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실험을 한다. 그녀는 창의적인 작업 방식과 타고난 움직임으로 동시대적 한국 정서가 듬뿍 담긴 작품을 만들어 내기로 작심한다. 안무가 장윤나는 춤의 가치를 실증하고 현대적 감각의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작품을 창작했다.
이월 이십사일(금) 저녁 일곱 시 삼십 분,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장윤나댄스프로젝트 주관 마흘라댄스컴퍼니 주최, 장윤나 안무 김재승 연출의 「기억에 담다」가 공연되었다. 기억에 갇힌 주인공의 이야기를 춤과 연극, 관점에 따라 느낌을 공유하는 회화를 진설(陳設)했다. 이 작품은 1부: 치명적 사랑의 별리를 주제로 한 무용(출연: 장윤나, 김재승), 2부: 헤어짐의 사연을 밝혀가는 연극(출연: 기정수, 장영주)으로 구성된다. 국악당에서의 연극은 파격으로 다가왔다. 오십 년을 기억에 담아둔 여인에게 한때 청년이었던 노인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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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나 안무의 '기억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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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나 안무의 '기억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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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나 안무의 '기억에 담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관객 입장과 동시에 오픈 형식으로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고정두 화백의 그림이 무대 위에 깔린 특수 천 위에 그려진다. 도화지에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작품이 시작된다. 하얀 천 위에 매화 꽃잎이 하나씩 피어나고 흰 플로어 안은 빨간 매화의 향기로 가득 차 있다. 만개한 꽃을 인 나무가 완성되면 장윤나의 한국창작무용 「기억에 담다」가 ‘물들다’ 풍(風)으로 시작된다. 기도에 버금가는 열정이 정제된 공연은 기대감을 충족시켰고, 마무리는 깔끔하였다.

에릭 사티 짐노페디(Erik Satie Gymnopedies) 1번 곡이 느리게 비통을 저어가면 늘 문제가 된 왼손이 D 장조와 D 단조를 오가면서 문신(文信)의 균형감과 윤이상의 불협화음이 여인의 일생을 격렬하게 부상시킨다. 적막한 고독의 심도 연기를 위한 색깔은 떡갈나무를 닮아간다. 찬란한 이별을 위한 격렬한 사랑은 사내의 배반을 위한 간계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낸 것은 2부의 고백에서 나온다. 장윤나 김재승의 춤은 숨 가쁜 움직임으로 완벽한 일체감을 조성한다. 친절한 표준전과가 된 2부의 극(劇)은 연출자의 상상력을 극대화한 장치다. 지긋한 나이의 기정수, 장영주의 맛깔난 연기는 무용가들의 춤 연기에 무게감을 실어준 중후한 극적 헌사로 기능했다.

협업·융합 결합 과정 실험
한국 정서 담긴 안무 연출
세계문화시장 경쟁력 갖춰

장윤나의 「기억에 담다」는 십오 년 전의 기억을 거슬러 춤 전용 소극장에 남아있던 느낌을 오마주한다. 다시금 안무가의 가슴에 이는 열정은 연분홍 급류를 탄다. 이영일 안무·출연의 「물들다」는 초연 당시 경전의 에피소드가 된 작품이었다. 그때의 열정을 가져다가 장윤나는 융복합 회화, 연극, 무용의 장르적 특성을 작품에 녹여 투입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한다. 세계 공통어인 ‘예술’은 감각과 정서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미학적 접근 매체가 된다. 「기억에 담다」는 춤, 회화, 연극 등을 담은 의미 있는 총체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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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나 안무의 '기억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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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나 안무의 '기억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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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나 안무의 '기억에 담다'.


매화가 완성되자 그 뒤를 이어 남자 무용수(김재승)가 매화의 향기에 매료된 듯 객석을 통해 걸어 나온다, 바닥에 그려진 매화를 통해 무엇을 찾기라도 하듯 무대 위를 걷는다. 또 다른 향기를 찾아 나선 여자 무용수(장윤나)는 남자 무용수가 걸어갔던 발자취를 따라 그 체취를 따라나서며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고요한 무대 안은 두 사람의 숨소리(호흡)와 움직임의 소리만 들리고 집중도를 높이며 음악은 없다. 서로의 체취를 찾아 나서며 그들의 움직임은 점점 고조되고 아름답게 피었던 바닥의 매화는 뭉개진다.

점점 매화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때, 그와 그녀는 온몸이 물감(매화)으로 뒤엉켜 있다. 어느덧 향기를 지워내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으며 그마저 떠안고 지낸다. 다시금 제자리로 가고자 하고, 지워내려고 한다. 여성 무용수에게 남성 무용수가 그만 지워내자고 물을 뿌려주면 여성 무용수는 받아들인다. 이때 애잔한 음악이 흐르고, 그 음악 속에 그동안 향기를 찾아 헤맸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그 둘은 허탈하지만 모든 것을 씻어내려 한다. 온몸에 묻었던 물들었던 것을 애써 외면한다. 음악은 계속 흐르고 무대는 전환된다.

사랑의 별리 주제의 무용
헤어진 사연 그리는 연극
춤·회화·연극 담은 총체극

이제 그 느낌을 이은 연극이 시작된다. 작가 김환일 대본은 연기자들이 시종 차분하면서도 격정의 고지를 슬기롭게 지나게 한다. 연극은 그렇게 진행된다. 음악이 서서히 잦아들 무렵, 연기자 기정수와 장영주의 불꽃 튀는 연기가 시작된다. 노련한 두 연기자는 혼돈이 지나간 엉망이 된 무대를 아랑곳하지 않으며, 격정의 춤 움직임의 뒤를 이은 2부를 이성적 대사로 이어간다. 그 사연을 관객은 익히 알고 있지만 관객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남자가 편지를 받으면서 여인을 만나게 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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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나 안무의 '기억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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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나 안무의 '기억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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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나 안무의 '기억에 담다'.


비장의 무기, 독특한 방법론의 사랑 이야기는 반복된다. 거짓으로 사랑한 여인을 버리고 도망간 사내가 노인이 되어 편지를 받고 치매에 걸린 옛사랑을 찾아 용서를 빈다. 연극은 현대 회화의 일면을 닮아 담백하다. 무대의 세트는 가벼운 목 없는 의자 정도이며 조명은 현란한 수사를 피하고 미니멀하고 간결하다. 2부는 두 배우의 집중력으로 무대를 이끌어 가야 하는 어렵고도 정교한 작업이었다. 몸으로 이야기하면서 눈으로 즐기던 무용에서 언어로 말하는 환경에서 다양한 분야의 장르가 개입되면서 이야기는 날개를 달았다.

장윤나 안무의 「기억에 담다」는 시대와 세태를 성찰하기에 좋은 한국창작무용이다. 작품을 이루는 4원소 가운데 장윤나는 국립무용단 주역 무용수로서 춤 움직임의 넓고 깊은 범주를 소화해내며, 깊은 사유와 성찰로써 사물을 관조하기 좋아한다. 작품의 연출가이자 장윤나의 상대역 김재승은 완벽한 호흡으로 작품의 완성도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2부를 조화롭게 연결하는 능력은 빼어나다. 「기억에 담다」는 관객들에게 예술작임을 각인시키고, 참여 예술가들의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든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