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혁신 생태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글로벌 혁신지수(GII)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상위 10개국 중 7개국이 유럽 국가일 정도로 유럽의 혁신 역량은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다. 특히, 스위스는 13년 연속 1위를 차지하며 혁신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하고 있다. 미국(2위)과 중국(12위)이 각각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유럽 국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주목받는 것이 바로 '뉴 팔로알토' 개념이다. 런던을 중심으로 기차로 5시간 이내 거리에 있는 유럽 도시들의 네트워크를 지칭하는 이 용어는, 실리콘밸리의 팔로알토에 버금가는 혁신 클러스터로서의 잠재력을 강조한다고 최근 와이어드가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지역은 글래스고, 아인트호벤, 맨체스터 등 산업 유산이 풍부한 도시들과 암스테르담, 케임브리지, 에든버러, 런던, 옥스퍼드, 파리 같은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를 아우른다.
'뉴 팔로알토'의 경쟁력은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유럽 기술 스타트업의 1/3 이상이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1990년 이후 설립된 유럽 최고 가치 기술 기업 10개 중 7개가 이 지역 출신이다. 부킹 닷 캄, 애디언, 와이즈, 레벌룻, 만조우, ASML, Arm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연간 매출 1억 달러 이상의 '순종' 기업이 507개에 달하는 등 양적, 질적 성장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뉴 팔로알토'의 경쟁력은 이미 성공 사례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탄생한 ARM은 모바일 프로세서 설계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ARM의 기술은 현재 전 세계 스마트폰의 95% 이상에 사용되며, 2020년 엔비디아에 400억 달러에 인수되며 그 가치를 입증했다.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의 ASML도 반도체 장비 제조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극자외선(EUV) 리소그래피 장비 분야에서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여,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핀테크 분야에서는 영국 런던 기반의 레벌룻이 주목받고 있다. 2015년 설립 이후 빠르게 성장하여 2022년 기준 2500만 명 이상의 고객을 확보했다.
그러나, 성과에도 불구하고 '뉴 팔로알토'는 여전히 투자 부족을 겪고 있다.
초기 단계 자금 조달은 실리콘밸리를 상회하지만, 스케일업 단계에서 약 300억 달러의 자금 격차가 존재한다. 이는 유럽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 큰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이에 대응하여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R&D 투자 확대, 인재 유치 프로그램, 비자 제도 개선 등 혁신 기업 지원을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영국의 '맨션 하우스 콤팩트'와 프랑스의 '티비' 정책은 스케일업 자본 지원을 위한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투자자들의 인식 변화와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뉴 팔로알토' 개념 등장은 유럽 기술 산업의 새로운 도약을 예고함과 동시에, 혁신의 지리적 분산과 포용적 성장이라는 과제를 제시한다. 소머스 타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기술 혁신의 혜택이 지역 사회 전반에 고르게 분배되지 않는 현실은 여전히 큰 도전 과제로 남아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EU의 R&D 지출은 2021년 기준 GDP의 2.19%로, 미국(3.45%)이나 중국(2.40%)보다 여전히 뒤처져 있다. 그러나 '뉴 팔로알토'를 중심으로 한 혁신 생태계의 발전은 이 격차를 좁힐 새로운 기회로 평가받고 있다.
유럽의 혁신 생태계 변화는 한국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한국은 2023년 글로벌 혁신지수에서 10위를 차지하며 혁신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지역 간 혁신 격차와 스케일업 단계 기업 지원이라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뉴 팔로알토' 모델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과 지방 혁신 도시들을 연계하는 새로운 혁신 네트워크 구축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또한,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가 초기 단계를 넘어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는 시점에서, 유럽의 스케일업 지원 정책은 중요한 참고사례가 될 수 있다. 특히,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의 협력, 해외 진출 지원, 그리고 규제 샌드박스 확대 등을 통해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유럽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혁신의 혜택을 사회 전반에 고르게 분배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역시 판교, 강남 등 특정 지역에 혁신이 집중되는 현상을 극복하고, 전국적으로 균형 잡힌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뉴 팔로알토' 개념의 부상은 유럽 혁신 생태계의 잠재력과 도전 과제를 동시에 보여주며, 한국에게도 새로운 혁신 전략 수립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지역 간 연계, 스케일업 지원 강화, 그리고 혁신의 포용적 확산이라는 과제를 해결해 나간다면, 한국 역시 글로벌 혁신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 국가의 성공을 넘어, 글로벌 기술 혁신의 새로운 장을 열어갈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