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사우디 원유재고가 바닥에 임박했다는 경고가 나왔다. 바닥 경고의 주인공은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Saudi Aramco)의 최고경영자(CEO), 아민 나세르(Amin H. Nasser)다. 아람코가 수도꼭지를 얼마나 트느냐 잠그느냐에 따라 지구촌 실물경제가 휘청이고 각국 정상들의 명운이 엇갈리는 지금 아민 나세르의 경고 발언은 세계 경제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아민 하산 나세르는 1958년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주(Eastern Province)에서 태어났다. 페르시아만을 마주하고 거대한 유전 지대를 품은 이 지역은 사우디 현대사의 궤적과 아람코의 역사가 그대로 중첩되는 땅이다. 모래바람과 유황 냄새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에게 석유는 추상적인 자원이 아닌 삶의 배경 그 자체였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최고 공학 명문으로 꼽히는 킹 파흐드 석유광물대학교(KFUPM)에 진학하여 석유공학(Petroleum Engineering)을 전공했다. 1982년 학사 학위를 취득한 청년 나세르는 곧바로 아람코에 입사했다. 당시 아람코는 미국 석유 메이저들의 손을 떠나 사우디 정부의 국유화 작업이 완숙기에 접어들던 격변기였다. 책상 위의 이론보다 시추 현장의 압력 밸브 소리가 더 익숙했던 젊은 엔지니어는 그렇게 사우디 에너지 산업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갔다.
40년 외길의 현장주의자: 입사에서 CEO 등극까지
아민 나세르의 경력은 한마디로 ‘야전 엔지니어의 정석적 승진사’다. 그는 사우디의 유력 귀족이나 왕족 가문 출신이 아니다. 연줄과 가문이 힘을 발휘하는 중동 사회에서 순수한 실력과 기술적 전문성 하나로 정점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입사 초기 그는 가장 거칠고 험난한 유전 현장들을 전전했다. 세계 최대 유전인 가와르(Ghawar) 유전과 사파니야(Safaniya) 해상 유전의 현장 감독을 거치며 생산 시추 기술의 밑바닥부터 섭렵했다. 원유가 지하 수천 미터 암반에서 분출될 때의 지질학적 압력과 지상 배관을 흐를 때의 유체역학을 온몸으로 체득한 인물이었다. 이후 그는 생산 엔지니어링 책임자, 시추 부문 총괄 부사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경영 수업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2000년대 초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 최고위경영자과정(AMP)을 수료하며 현장 기술과 글로벌 경영 감각을 결합했다. 2008년 석유 탐사 및 생산을 총괄하는 ‘업스트림(Upstream)’ 총괄 부사장에 임명된 것은 그의 경영권 승계가 가시화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5년 9월, 33년간 오직 아람코 한 우물만을 파온 엔지니어 나세르는 세계에서 가장 기업가치가 높은 에너지 기업의 수장, 즉 총괄 사장 겸 CEO 자리에 올랐다.
기념비적 업적: 세기의 IPO와 화학 제국으로의 탈바꿈
CEO 취임 이후 나세르가 증명해 보인 성과는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첫째는 ‘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공개(IPO)’ 완수다. 2019년 12월, 사우디 타다울(Tadawul)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아람코는 단숨에 시가총액 1조 8,800억 달러를 기록하며 애플을 제치고 글로벌 시총 1위 기업으로 등극했다. 베일에 싸여 있던 국영 석유공사의 회계와 매장량, 내부 운영 구조를 서구 자본시장의 까다로운 투명성 기준에 맞춰 개방하는 작업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난제였다. 나세르는 탁월한 협상력과 치밀한 실무 조율로 이를 연착륙시켰다.
셋째는 위기관리 능력이다. 2019년 아브카이크와 쿠라이스 정유 시설이 드론 테러 공격을 받아 사우디 원유 생산의 절반이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나세르는 단 몇 주 만에 설비를 복구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현장을 뼛속까지 아는 엔지니어 CEO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복구 속도"라는 찬사가 글로벌 에너지 업계에서 쏟아졌다.
사우디 내 독보적 위상과 ‘비전 2030’의 금고지기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절대군주정 체제 내에서 비(非)왕족 평민 출신인 아민 나세르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아람코는 단순한 영리 기업이 아니다. 사우디 국가 재정 수입의 중추이자 왕국의 경제적 생명선이다. 이 거함의 선장 자리는 왕실의 절대적인 신뢰와 국가 차원의 능력이 검증되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유지할 수 없다.
그는 아람코 이사회뿐만 아니라 사우디 최고 의사결정 기구들과 긴밀히 호흡하며, 세계경제포럼(WEF)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카운슬(IBC) 등 유수의 글로벌 협의체에서 왕국의 얼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사우디 관료 사회와 글로벌 경제계 모두 나세르를 ‘기술적 전문성, 정치적 신중함, 국제적 신뢰를 겸비한 대체 불가능한 테크노크라트’로 평가한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의 관계: 냉철한 이상과 현실주의의 파트너십
나세르의 오늘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고리는 사우디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와의 역학관계다. MBS는 2016년 탈석유·산업 다각화를 기치로 내건 ‘비전 2030’을 선포했다. 네옴(NEOM) 신도시 건설, 관광 및 엔터테인먼트 육성 등 천문학적인 자금이 소요되는 이 메가 프로젝트들의 재원은 역설적이게도 아람코가 벌어들이는 오일 머니에서 나온다. MBS에게 나세르는 왕국의 미래 개혁 자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해야 하는 ‘최고 재무 사령관’인 셈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상명하복을 넘어선 ‘상호 보완적 파트너십’에 가깝다. MBS가 저돌적인 비전과 파괴적 혁신을 밀어붙이는 정치적 지휘관이라면, 나세르는 그 비전이 물리적·기술적 법칙과 자본시장의 현실에 부합하도록 정밀하게 조율하는 냉철한 엔지니어다.
대표적인 일화가 아람코의 해외 상장 추진 과정이었다. 당초 MBS는 뉴욕이나 런던 증시 동시 상장을 강력히 원했으나, 나세르는 서방 규제 당국의 법적 리스크와 소송 위험을 직언하며 국내 거래소 우선 상장이라는 현실적 대안을 관철시켰다. 젊은 군주의 야망 앞에서도 기술적 타당성과 시장 논리를 굽히지 않는 나세르의 직언은 오히려 MBS의 두터운 신임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나세르는 또 서구의 비현실적인 ‘급진적 에너지 전환론’에 맞서 사우디 왕실의 입장을 가장 논리적으로 대변하는 공격수 역할을 한다. 그는 다보스 포럼 등 글로벌 무대에서 "전통 화석연료에 대한 투자를 일방적으로 중단하는 것은 재앙적 에너지 위기를 초래할 뿐"이라며 석유 투자의 지속 필요성을 강력히 설파해 왔다. 이는 원유 판매 수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MBS의 전략적 이해관계와 완벽하게 궤를 같이한다.
불안의 시대를 가로지르는 나세르의 시선
전쟁의 먹구름이 호르무즈 해협을 뒤덮고, 글로벌 원유 재고가 위험 수위로 떨어졌음을 경고하는 아민 나세르의 목소리는 단순한 기업인의 엄살이 아니다. 40여 년간 유전 밸브의 압력을 손끝으로 느껴온 노련한 엔지니어의 냉철한 현실 진단이다.
그는 왕족의 혈통 없이도 오직 실력 하나로 사우디 권력의 정점에 섰고, 성급한 미래주의자들의 환상 속에서 에너지 시장의 냉엄한 물리적 실체를 일깨워 왔다. 빈 살만 왕세자가 그리는 사우디의 야심 찬 미래도 결국 나세르가 안전하게 길어 올리는 지하 수천 미터의 검은 황금 위에 세워져 있다. 국제유가가 다시 세계 경제의 숨통을 죄어오는 이 격변의 시대, 아람코의 저장 탱크를 증설하고 대체 항로를 뚫으며 공급망을 사수하려는 아민 나세르의 손끝에 지구촌 경제의 명운이 걸려 있다. 모래바람 속을 묵묵히 걸어 나와 글로벌 에너지의 심장을 틀어쥔 야전사령관. 그가 응시하는 계기판의 바늘에 전 세계가 숨을 죽이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