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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춘500 창업주 열전] JP모건 ③ 철강왕 카네기의 철강제국 인수, US스틸 출범

[포춘500 창업주 열전] JP모건 ③ 철강왕 카네기의 철강제국 인수, US스틸 출범

제너럴 일렉트릭(GE)이라는 기업을 만든 이도 JP모건이다. 그는 자본의 힘으로 에디슨과 그의 경쟁자들을 통합시켰다. 당시 에디슨은 전구기술 등에서의 특허권을 놓고 기술자들과 대립하고 있다. JP모건이 나서 이둘을 하나로 뭉치도록 했다. JP모건이 거액의 자본을 출자하여 회사를 세운 다음 이들을 좋은 조건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GE의 기원이다. JP는 이 GE를 통해 벨이 개발한 전화를 실용화시켜 대박을 냈다. 또 전기와 조명을 상업화하여 큰돈을 벌었다. AT&T 경영권 역시 JP모건에게 넘어갔다. 한 때는 듀폰과 손을 잡고 제너럴 모터스를 인수하기도 했다. 나중에 독점이 문제되어 물러섰으나 자동차의 발전가능성을 꿰뚫어본 혜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1901년에는 철강 왕 카네기로부터 철강회사를 사들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인수대금이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5억 달러였다. 여기에 40여개 철강회사를 추가로 합병해 세계최대의 철강회사인 US스틸을 만들어냈다. 통합 후 주가는 인수가보다 무려 10배 이상 높았다. 통합으로 카네기에게 준 돈의 10배 이상을 벌었다. 투자대왕으로서의 진수를 보여준 셈이다. JP모건은 이런 식으로 회사를 키워나갔다. 1900년대 초반이 이르러 JP모건의 자산은 월가 전체의 절반 수준에까지 육박하기에 이르렀다.2015-10-03 00:11:19
[포춘500 창업주 열전]애플 아이폰6s 주역 스티브 잡스 ③출생의 비밀, 스탠퍼드대 졸업 축사 연설과 생부와의 만남

[포춘500 창업주 열전]애플 아이폰6s 주역 스티브 잡스 ③출생의 비밀, 스탠퍼드대 졸업 축사 연설과 생부와의 만남

스티브 잡스의 생부인 잔달리와 생모인 조앤 심프슨은 심프슨의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시리아로 이사를 갔다.남편의 고향에서 새 인생을 시작한 것. 잔달리와 심프슨은 첫 아들인 스티브 잡스를 찾지 않았다.입양법상 찾을 수도 없었다. 미국에 남은 스티브잡스는 자신을 입양한 양아버지 잡스 밑에서 컸다. 잡스란 이성도 양아버지로 부터 나온 것이다. 양아버지 폴 잡스는 기능공이었다. 낡은 자동차를 사들인 다음 수리하여 다시 내다파는 방식으로 간신히 생계를 꾸려갔다. 군대 친구들 소개로 전쟁에서 군인 남편을 잃은 과부를 만나 결혼했다. 그녀가 잡스의 양어머니인 클라라 잡스다. 양어머니는 아르메니아 이민자의 딸이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고민하던 부부는 입양 신청을 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만난 아기가 스티브 잡스이다. 잡스 내외는 곧이어 여자 아기도 한 명 더 입양한다. 그 이름이 패티 잡스다. 스티브 잡스의 양 여동생이다. 시리아로 간 잔달리와 조앤은 이후 성격 차이로 갈라선다. 잔달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정치학 교수를 하다가 사업가로 변신했다.지금은 네바다의 큰 호텔 부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 졸업식장에 섰다. 게스트 스피커 즉 초청연사로서 후학들에게 교훈을 주는 자리다.2015-09-12 00:00:59
[포춘500 창업주 열전] 애플 아이폰6s 신화 스티브 잡스 ② 출생의 비밀...여대생의 혼전 임신이 낳은 시리아 난민 고아

[포춘500 창업주 열전] 애플 아이폰6s 신화 스티브 잡스 ② 출생의 비밀...여대생의 혼전 임신이 낳은 시리아 난민 고아

[포춘500 창업주 열전] 애플 아이폰6s 신화 스티브 잡스② 스티브 잡스는 태어나자마자 또 한 번 버림을 받았다. 첫 양 부모로 내정되어 있던 변호사 부부가 딸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한 것이다.그 바람에 스티브 잡스는 또 다른 가정을 물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폴 잡스와 그의 부인 클라라 잡스 부부였다. 생모인 조앤에게는 딱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양부모의 학력이 최소한 대졸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스티브 잡스를 훌륭한 인재로 만들려면 부모가 최소한 대학 공부는 마쳐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문제는 잡스를 입양하겠다고 두번째로 나타난 폴 잡스와 그의 부인 클라라 잡스 부부가 두 사람 모두 고졸이었다는 점이다.변호사 가정의 갑작스런 변심으로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잡스 내외가 아기를 데려가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잡스의 생모 심프슨은 실망했다.그렇다고 본인이 키울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 때 폴 잡스와 그의 부인 클라라 잡스 부부가 제안을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스티브 잡스를 대학에 보내겠다는 서약을 할테니 아이를 달라고 했다. . 실제로 아기만은 반드시 대학에 보내주겠다는 서약서를 썼다대학을 보내지않으면 입양을 취소하겠다고도 했다. 잡스의 생모 심프슨은 이 약속을 믿고 잡스를 넘겨준다.2015-09-11 00:09:19
[포춘500 창업주 열전] 애플 TV 아이폰6S 만든 스티브 잡스 ① 출생의 비밀, '시리아 난민'이 된 사연

[포춘500 창업주 열전] 애플 TV 아이폰6S 만든 스티브 잡스 ① 출생의 비밀, '시리아 난민'이 된 사연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출생에 얽힌 비밀 스티브 잡스의 생부는 시리아 사람 압둘파타 존 잔달리이다. 미국으로 유학을 와 위스콘신 대 정치학과를 다녔다. 이 학교에서 조앤 심프슨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재원이었다. 예수회 기숙학교와 가톨릭재단의 아메리칸 대학을 거쳐 위스콘신 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잔달리를 만났다. 중 고등학교 부터 대학 학부까지 모두 가톨릭 학교만 골라 다녔다. 그만큼 가톨릭 분위기가 농후했던 집안에서 자랐다. 심프슨은 당시 위스콘신대 정치학과의 조교였다. 조앤의 아버지는 중동에서 건너온 시리아 젊은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결혼은 물론 반대였다. 이 와중에 임신을 하게 된다. 남자의 고향인 시리아로 여행을 떠났다가 현지에서 아이를 가진 것. 헤어질 마음으로 마지막 이별 여행을 함께 했는데 그만 아기가 들어섰다. 배가 불러오자 부담스러웠다. 예나 지금이나 미혼의 어린 대학생이 임신한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결혼으로 정면 돌파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를 거스르고 싶지도 않았다. 초조해진 조앤은 혼자 몰래 애를 낳기로 하고 아무도 모르는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 태어나는 아기는 입양시키기로 했다.2015-09-10 00:00:48
[김대호의 포춘500 창업주 열전] 아마존의 베조스 회장 ③ 최악의 보스 상

[김대호의 포춘500 창업주 열전] 아마존의 베조스 회장 ③ 최악의 보스 상

아마존의 창업주 제프 베조스는 1999년에 타임지가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에 올랐다. 2012년에는또 포브스의 억만장자 서열 17위에 올랐다. 하버드 대학이 발행하는 비즈니스 리뷰는 베조스를 스티브 잡스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기업인으로 선정했다. 2014년에는 세계노동조합연맹(ITUC)으로 부터 ‘최악의 보스상’을 받기도 했다. 이 상은 종업원들을 가장 가혹하게 다룬 상사에게 주는 것이다. 제프 베조스는 회사의 모든 문제에 일일이 개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주 사소한 일까지도 위임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챙긴다. 종업원들의 근무 여건이나 급여도 다른 기업보다 못하다는 평을 자주 듣는다.제프 베조스는 완벽주의자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회사의 미래를 밝혀가는 데에서는 탁월하지만 종업원을 다루는 인간성 면에서는 아주 나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자칫 이런 점이 아마존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베조소의 꿈은 단순한 책 장수가 아니다. 베조스에게 책은 인터넷의 세상을 열어가는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책이 성공하자 판매 아이템을 대폭 늘렸다. 전자제품은 물론이고 음식, 장난감, 가구, 옷 등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겠다는 구상이다. 우리 식으로 하면 '다판다'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2015-06-21 00:42:19
[김대호의 포춘500 창업주 열전] 아마존 베조스 ② 헤지펀드 사직하고 유통업체를 창업한 사연

[김대호의 포춘500 창업주 열전] 아마존 베조스 ② 헤지펀드 사직하고 유통업체를 창업한 사연

제프 베조스는 대학을 졸업한 후 월 스트리트로 진출했다. 그곳에서 컴퓨터지식을 활용하여 증권사의 전산망 시스템을 만드는 업무를 주로 했다. 피텔(Fitel)과 뱅커스 트러스트(Banker's Trust)를 거쳐 유명한 헤지펀드인 쇼(Shaw)에서 전산담당 부사장에 까지 올랐다. 어느 날 우연히 펼쳐든 신문에서 전자상거래 시장의 규모가 연간 2400% 증가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바로 메모지를 꺼내 미친 듯이 무엇인가를 써내려갔다. 인터넷으로 판매할 수 있는 물품목록이었다. 수백 개의 목록을 확인한 다음 그길로 바로 사표를 냈다. 그러고는 뉴욕에서부터 서쪽 끝까지 자동차로 대륙횡단여행을 떠났다. 미국 전역을 돌며 사업 구상을 한 것. 워싱턴주의 시애틀에 도착한 다음 한평생 모은 돈으로 집을 샀다. 그 집 차고 즉 거라지(Garage)창고에 회사를 차렸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를연상케하는 대목이다.회사 이름은 커대브라(Cadabra)였다. 주문이라는 뜻의 ‘abracadabra’에서 따온 말이다. 인터넷 사업의 폭발적인 성장을 누구보다 더 잘 알면서 월급쟁이로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창업변이다. 가장 먼저 시작한 사업은 온라인 책 판매였다. 책을 선택한 것은 다른 어떤 상품보다 보관과 배송이 쉽다는 판단 때문이었다.2015-06-14 00:24:15
[김대호의 포춘500 창업주 열전] 골드만삭스를 세운 마르쿠스...사채업으로 출발, 월가를 평정

[김대호의 포춘500 창업주 열전] 골드만삭스를 세운 마르쿠스...사채업으로 출발, 월가를 평정

골드만삭스의 창업주는 마르쿠스 골드만이다. 1821년 독일 바바리아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모두 유대인이다. 독일에서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한 농민이었다. 마르쿠스 골드만은 어린시절 부모를 도와 가축을 시장에 내다팔면서 장사에 눈을 떴다. 학력이라고는 유대인학교와 랍비 스쿨이 전부다. 이곳에서 평생의 친구를 만난다. 상대는 3살 연상인 조세프 삭스였다. 삭스가 먼저 미국 이민을 떠났다. 골드만은 부모의 목축 일을 돕다가 뒤늦게 미국이민을 결행했다. 유대인 박해가 심한 독일보다는 신대륙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 필라델피아 선착장에서 또 삭스를 만났다. 먼저 이민을 와있던 삭스와 예정에 없던 운명의 상봉을 한 것. 이후 골드만과 삭스는 서로 가족같이 지냈다. 동고동락하면서 어려운 이민생활을 함께 돌파해 나갔다. 먼저 자리잡은 삭스의 소개로 필라델피아의 한 가게에 점원으로 취업했다. 그러던 중 같은 고향 출신의 유대인 여성인 ‘버사’를 만나 결혼했다. 부인 버사는 재봉사였다. 결혼 후 함께 양복점을 차렸다. 돈을 꽤 벌었다. 만48세 되던 1869년 변화가 왔다. 도시에서 살고 싶다는 아내의 요구로 뉴욕으로 이사를 한 것. 그곳에서 새로 사채업을 시작했다. 그때 만든 회사 이름이 마르쿠스 골드만 뱅커 앤 브로커이다.2015-06-13 00:41:35
[김대호의 포춘500 창업주 열전] 기이치로 도요타...일본 자동차 사업은 천왕의 밀명?

[김대호의 포춘500 창업주 열전] 기이치로 도요타...일본 자동차 사업은 천왕의 밀명?

도요타 자동차를 만든 이는 ‘도요타 기이치로’이다. 일본어로는 ‘豊田喜一郞’으로 표기한다. 1894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일본 근대화의 대부로 추앙받는 ‘도요타 사키치’의 아들이다. 도쿄대 기계공학과 재학시절 자동차의 꿈을 불태웠다. 유럽과 미국의 자동차회사들이 일본에 쏟아져 들어오던 모습을 보고 일본의 한 공학도로서 ‘우리도 자동차를 한 번 만들어보자’라는 꿈을 갖게 된 것. 그후 유럽과 미국 시찰을 다녀오면서 자동차에 인생을 걸기로 다짐하기에 이른다. 아버지가 발명한 자동직기 특허권을 영국에 팔아 그 자금으로 자동차 사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33년 도요타자동직기의 한 사업부로 자동차연구소를 개설했다. 도요타 사람들은 그때를 회사의 기원으로 잡고 있다. 기이치로의 인생을 건 꿈이자 도요타 가문의 꿈이면서 동시에 일본의 경제대국을 향한 꿈을 한꺼번에 잉태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1936년 마침내 일본인의 손으로 만든 최초의 자동차인 ‘AA형’을 선보였다. 자동차 개발은 일본천왕의 명이기도 했다. 1927년 쇼와(昭和)천왕이 그의 부친인 사키치를 초치한 적이 있다. 산업화 공로를 치하하는 자리였다. 이 때 쇼와천황은 사카치에게 자동차 개발을 당부한다.2015-06-12 00:15:16
[김대호의 포춘500 창업주 열전] 맥도날드 레이 크록, 음식점 쓰레기 뒤진 사연

[김대호의 포춘500 창업주 열전] 맥도날드 레이 크록, 음식점 쓰레기 뒤진 사연

레이크 록은 보통 사람들이 정년퇴직이나 명퇴할 나이인 만 53살에 창업했다.그러면서 패스트 푸드의 왕국을 열었다.맥도날드 신화를 만들어 낸것. 세일즈 맨으로 일하던 중 ‘맥도날드BBQ’라는 작은 음식점에 들렀다.8대의 믹서를 한꺼번에 구입한다기에 어떤 가게인지 궁금해 방문한 것이다. 손님이 들끓었다. 맥도날드가 만든 패스트푸드가 불티나듯 팔려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아예 인수해 버렸다.레이 크록은 1902년생이다.미국의 중부 도시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까지 추적하면 체코 보헤미아 지역의 농사꾼의 피로 이어진다. 학업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고교 중퇴를 했다. 15세 때 2차 대전에 참전했다.처음에는 너무 어리다고 입대를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이 나이를 속여 군에 들어갔다. 거기서 월트 디즈니를 만난다. 둘은 같은 내무반을 쓰면서 친해졌다. 그 인연으로 나중에 플로리다 올랜도의 디즈니랜드에서 맥도날드를 팔 수 있게 된다. 디즈니랜드 진출은 맥도날드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바다와 노인’ 등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내무반 동료이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의 도움으로 10대 직원에게는 급료를 최저 임금보다 더 낮게 지급해도 된다는 이른바 ‘맥도날드 법안’이 통과되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2015-06-11 00:3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