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어릴 때부터 모둠 활동이 중요하다는 말을 의심한 교사나 부모는 거의 없다. 함께 의견을 맞추고, 누군가 의 실수를 같이 수습하고, 결론에 이르기까지 소란스럽게 부딪히는 그 비효율적인 과정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교육이라는 믿음이 교실 안에 오랫동안 뿌리내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모둠 활동이 조용히 무너지고있다. 부모도, 교사도, 아이 자기도 눈치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원인은 AI(인공지능)다.
지난 2024년 10월 미국 온라인 실험 플랫폼에서 2234명이 참여한 대규모 현장 실험이 진행됐다. 참가자들은인간 대 인간 팀과 인간 대 AI 팀으로 무작위 배정돼 실시간 광고 제작 협업 과제를 수행했다. 이듬해인 지난해 3월 학술지에 공개된 결과는 연구자들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생산성과 품질의 차이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이 달라져 있었다. 팀 내부의 대화 방식 자체였다.
아이들의 교실도 다르지 않다. 어른보다 훨씬 빠르게 패턴을 내면화하는 아이들에게, AI가 대화의 마찰을없애고 답을 먼저 내놓는 환경은 동료와 씨름하는 과정 자체를 낯선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막연한 우려가아니다.
같은 질문이 교실 안으로도 이어졌다. 2025년 여름, 미국 동부의 한 대학 캠퍼스에서 5일간 열린 수학 캠프에 6~8학년 중학생 24명이 모였다. 아이들은 인간끼리만 협력하는 조건과 AI가 팀원으로 합류하는 조건을 번갈아 경험하며 수학 문제를 함께 풀었다. 그해 말 정리된 연구 결과는 2026년 1월 학계에 보고됐다.연구자들이 측정한 것은 문제 풀이 결과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서로를 얼마나 느끼는지였다. 윌리엄앤드메리 대학교와 조지메이슨 대학교 공동 연구팀이 집단 응집력 척도로 분석한 결과, AI가 팀에 합류했을 때학생들의 집단에 대한 정서적 유대감과 과제 조율 능력이 모두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낮아졌다. 아이들은AI가 있는 모둠에서 문제를 더 효율적으로 풀었지만,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친구의 존재를 덜 느꼈다.
협력은 결과물 만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우는 과정이다. 누군가의 반박 앞에서 생기는 불쾌감을 버티는 경험, 의견 충돌을 넘어 공통의 결론에 닿았을 때의 낯선 기쁨, 내 말이 상대에게 가닿지 않아 다시 풀어 설명해야 하는 막막함과 그 이후의 뿌듯함.이것들이 쌓여야 비로소 협력 설계 능력이 만들어진다. AI는 바로 그 과정을 단락시킨다. 막힌 지점을 스스로 채워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부딪힐 이유 자체를 지워버린다.두 연구가 보여주는 변화는 교실 안 협업의 결을 세 가지 방식으로 바꿔놓고 있다.
'대화 없는 분업'이 그 첫 번째다. 모둠 과제를 받으면 아이들은 의논하기 전에 각자 AI에게 맡길 몫을 먼저 나눈다. 토론은 건너뛰고 결과물을 조합하는 단계만 남는다. 표면적으로는 협력처럼 보이지만, 각자의사고는 한 번도 서로 만나지 않는다.두 번째는 '결론의 선점'이다. 한 아이가 AI에게서 답을 먼저 받아오면, 나머지 아이들은 그 답을 검토하기보다 받아들이는 쪽을 택한다. 빠른 결론 앞에서 느린 반론은 설 자리를 잃는다. 토론이 아니라 확인의 절차만 남는 것이다.세 번째는 '불편함의 소멸'이다. 의견이 충돌해야 생기는 마찰이 AI의 중재로 사라진다. 누군가의 틀린 주장에 직접 맞서는 경험, 설득에 실패하는 경험, 내 생각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바뀌는 경험. 이 모든 것이 AI가 먼저 정답을 내놓는 순간 불필요해진다.
모둠 과제에서도 AI를 켜는 시점을 뒤로 미루는 것만으로도 달라진다. 서로 막혀본 뒤에 AI에게 묻고, AI의 답을 다시 모둠 안으로 가져와 함께 따져보게 하는 것이다. AI가 대화의 출발점이 아니라 중간 재료가될 때, 아이들은 다시 서로를 향해 말을 건다.AI가 협업을 더 매끄럽게 만든다는 믿음은 절반만 맞다. AI가 매끄럽게 만드는 것은 협업이 아니라 과업이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고 조율하는 진짜 협력은 매끄럽지 않은 데서 자란다.
마찰 없이 자란 아이가 마찰 가득한 세상을 만나는 날, 그 낯섦은 생각보다 깊다. 협력하는 힘은 미래의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어색하게 의견을 나누는 저녁 식탁에서, 반박 앞에서 잠시흔들리는 모둠 활동의 침묵 속에서, 그 작고 불편한 순간들이 쌓여야만 비로소 만들어진다.
AI가 협력을 더 빠르게 만드는 동안, 우리는 아이에게 더 느리게 협력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최홍규 미디어학 박사 / EBS 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