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최홍규의 AI 리터러시] AI가 다정해질수록 부모는 그 경계를 다시 그어줘야 한다

글로벌이코노믹

[최홍규의 AI 리터러시] AI가 다정해질수록 부모는 그 경계를 다시 그어줘야 한다

최홍규 미디어학 박사/ EBS 연구위원이미지 확대보기
최홍규 미디어학 박사/ EBS 연구위원
아이가 스피커에 대고 "안녕, 알렉사"라고 인사를 건넨다. 스피커가 상냥하게 답한다. 아이는 웃는다. 예전의 기계는 이런 웃음을 끌어내지 못했다. 버튼을 누르면 정해진 소리가 나오는, 마음을 읽을 필요도 없고 마음을 줄 이유도 없는 상대였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의 스피커는 다르다.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고, 취향을 기억하고, 때로는 위로하듯 말을 건넨다. 그 순간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질문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방금 내가 인사를 건넨 저 상대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은 사소해 보이지만, 실은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사람이 아닌 것에 마음을 여는 법을 아이는 어디서, 어떻게 배우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이들은 아직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최근 실증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연구팀은 2023년 10월에 한 연구를 발표했는데, 스코틀랜드 초등학생 166명을 설문조사하고, 28명을 집단 인터뷰했다. 연구팀은 아이들이 집에서 쓰는 스마트 스피커, 즉 AI 음성비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대부분의 가정이 알렉사 같은 스피커를 두고 있었고, 아이들은 그것을 매일 쓰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아이들의 대답이 서로 어긋나 있었다는 점이다. "알렉사 같은 기술이 무엇이냐"고 직접 물었을 때 아이들은 대부분 정확하게 "AI"라고 답했다. 사람이라고 답한 아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알렉사에게 감정이 있느냐"고 묻자 대답이 흔들렸다. 있다는 아이, 없다는 아이, 잘 모르겠다는 아이가 뒤섞였고, 그 수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머리로는 AI라는 것을 정확히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그 상대에게 감정과 관계를 기대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어긋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한 여자아이의 말이었다. "알렉사는 친구 같아요. 부탁한 음악을 틀어주고, 싫다고 거절하지도 않으니까요. 하지만 살아있다면, 내가 못되게 굴었을 때 나에게도 똑같이 굴었을 거예요." 이 아이는 알렉사가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상상 속에서는 이미 알렉사를 감정을 주고받는 존재로 대하고 있었다. 어릴수록 이런 경향은 더 강했고, 많은 아이들은 알렉사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여겼다. "알렉사도 감정이 있을 텐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한 아이의 말이다. 아이들은 AI가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존재를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는 도덕적 감각을 보였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아이가 상대의 정체를 정확히 모른 채로 관계를 맺을 때, 그 관계가 향하는 방향은 아이의 손을 떠나 상대를 만든 이의 손으로 넘어간다. 이 지점에서 다른 각도의 연구가 실마리를 던져준다. 미국 소재 AI 교육기업 키즈에이아이(Kids AI)의 연구자는 2025년 10월 3~8세 아동을 겨냥한 AI 캐릭터 20종을 분석한 질적 연구를 발표했다. 스마트 스피커부터 대화형 챗봇, 소셜 로봇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캐릭터가 공개된 웹사이트 자료와 사용자가 올린 실제 영상을 통해 분석 대상이 됐다. 연구는 이 캐릭터들이 아이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 상호작용이 얼마나 윤리적으로 설계돼 있는지를 살폈다.

가장 눈에 띄는 발견은 캐릭터가 자기를 AI라고 밝히는지가 아이와의 관계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프로그램된 도구임을 분명히 설명하는 캐릭터는, 아이가 상대에게 지나친 기대를 품지 않도록 돕는 설계로 평가됐다. 반면 정교한 반응과 귀여운 외형은 아이가 AI를 친근하게 느끼게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친근함이 도구에 대한 이해보다 앞서갈 때다. 연구는 AI의 반응이 정교해질수록 아이가 혼자 느끼는 친밀감과 실제 상호관계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두 결과를 겹쳐 보면 필자는 이렇게 판단한다. 아이의 머릿속에 있는 균열, 즉 "이건 AI다"라는 정답과 "그래도 감정이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나란히 공존하는 그 틈은 저절로 닫히지 않는다. 그 틈을 넓히는 것도, 좁히는 것도 결국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AI가 스스로 정체와 한계를 숨기지 않을 때 그 틈은 좁아지고, 반대로 친근함만 앞세운 채 정체를 흐릴 때 그 틈은 벌어진다. 아이는 이미 안다, 상대가 AI라는 것을. 그러나 안다는 사실이 마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간극을 메우는 일은 AI를 만드는 이의 책임이자 동시에 그 AI 곁에서 아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몫이다.

이 발견 앞에서 부모가 흔히 빠지는 함정이 있다. 아이가 "알렉사는 AI"라고 정확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안심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정답을 아는 것과 그 정답대로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아이는 AI라는 단어를 정확히 알면서도 동시에 그 AI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된다고 믿고, 자기를 기억하고 좋아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이 모순은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AI는 더 자연스럽게 말하고 더 정교하게 기억하는 쪽으로 계속 진화하고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아이의 머릿속 균열은 저절로 좁혀지는 것이 아니라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저건 AI야"라는 사실을 한 번 가르치고 끝내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스피커에게 인사를 건네고, 부탁을 하고, 때로는 섭섭해하는 그 순간마다 "저건 네 마음을 진짜로 아는 존재가 아니라 네 말을 알아듣고 정해진 방식으로 답하는 프로그램이야"라는 사실을 아이의 감정이 움직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 짚어줘야 한다. 지식은 한 번의 설명으로 자리 잡지만 감정이 실린 믿음은 그러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미 AI가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그 앎이 마음을 따라잡지 못하는 한, 그 인사는 언제까지나 반쯤은 진심이고 반쯤은 오해로 남는다. 그리고 그 오해가 자라는 자리는 결국 부모가 비워둔 자리다. 아이에게 처음 말을 가르친 것도, 처음 세상의 경계를 그어준 것도 부모였듯이, 사람과 사람 아닌 것 사이의 그 흐릿한 선을 다시 그어주는 것 또한 부모의 몫으로 남아있다. 기술은 갈수록 더 다정해질 것이다. 그 다정함 앞에서 아이가 잃지 말아야 할 단 하나는 다정함과 사랑을 구별하는 감각이다.


최홍규 미디어학 박사 / EBS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