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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호 서양화가의 미술 에세이 ③ 현대미술, 서양의 추상표현주의를 넘어 '관세음'의 미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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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호 서양화가의 미술 에세이 ③ 현대미술, 서양의 추상표현주의를 넘어 '관세음'의 미학으로

한명호, 관세음 심중화, oil on canvas, 2018이미지 확대보기
한명호, 관세음 심중화, oil on canvas, 2018
오늘날 평면 위를 부유하는 현대미술의 수많은 붓질들은 대개 추상표현주의라는 낡은 외투를 걸치고 있습니다. 추상의 형식을 빌려 표현주의의 감정을 쏟아내는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예술의 진정한 갈 길을 묻습니다. 문명의 전환기 앞에서 화가가 짊어져야 할 숙명에 대해 조용히 고백해 봅니다.

우리의 아득한 미술사에는 세 갈래의 길이 있었습니다. 화려한 기교로 귀족의 입맛을 맞추던 도화서의 사실화, 백성의 염원과 불교의 진리를 색채로 빚어내던 탱화와 민화, 그리고 벼슬과 권력을 뒤로한 채 오직 자신을 수련하기 위해 먹을 갈았던 선비들의 문인화입니다.

특히 학식과 덕망을 갖춘 사대부들이 주도했던 문인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시와 글씨와 그림이 한 화면에 어우러지는 기품을 갖추되, 그 진정한 본질은 붓끝에 실린 펄떡이는 기운, 즉 운필의 기운생동에 있었습니다.

서양의 추상표현주의가 텅 빈 내면의 에너지를 감추거나 압도적인 시각적 충격을 주고자 거대한 캔버스를 동원하고 물감의 과잉을 택했다면, 우리의 선비들은 아주 작은 화선지 위에서도 우주를 뚫고 나가는 웅장한 기운을 응축해 냈습니다.
나의 그림은 이 고결한 문인화의 맥박을 잇고 있습니다. 다만 옛 선비들이 즐겨 그리던 낡은 소재를 조용히 내려놓고, 불교의 깊은 진리와 서민들의 질박한 삶을 화면에 불러들입니다. 특히 세상의 모든 소리를 눈으로 어루만진다는 '관세음(觀世音)'의 자비에 기대어, 경전을 읽는 그 먹먹한 소리들을 시각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 길을 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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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호, 관세음 심중화, oil on canva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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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호, 관세음 심중화, oil on canva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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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호, 관세음 심중화, oil on canvas, 2018

나의 캔버스 위에 묘법연화경 화성유품 제7품의 낭송 소리를 시각화하여 담아낸 것에는 뼈아프고도 눈물겨운 나의 개인적 고백이 숨어 있습니다.

육신을 갉아먹던 말기 암이라는 짙은 절망의 시간. 나는 차가운 현대 의학의 기계에 기대는 대신, 대체의학과 자연의 치유력, 그리고 이 위대한 불경의 힘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나를 다시 살려냈습니다. 이 그림은 나를 구원해 준 우주의 섭리와 부처님의 은혜에 바치는 눈물겨운 감사이자, 영혼을 다해 올리는 묵언의 기도입니다.

이제 세상은 차가운 인공지능과 거대한 데이터가 지배하는 새로운 문명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 차갑고 거대한 디지털 시대의 운영체제(OS)에 대항하고 또 조화롭게 스며들 유일한 영혼의 콘텐츠는 과연 무엇일까요.

나는 주저 없이 조선 선비들의 그 맑고 매서운 정신이라 답하겠습니다.

AI 시대의 새로운 미술은 몸집을 줄여야 합니다. 모자란 기운을 감당하지 못해 캔버스의 크기만 부풀리고 재료와 행위의 과잉으로 여백을 메우려 했던 추상표현주의의 시대는, 물질문명의 끝자락과 함께 역사의 무덤으로 사라져야 합니다.

거대한 도서관의 정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칩 속으로 압축되는 디지털 시대의 섭리처럼, 화가들 역시 내면에 형성된 광활한 우주를 작고 단단한 화면 속에 고밀도로 응축해 내야 합니다. 애초에 미술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고 정신에 파동을 일으키는 숭고한 가치로 존재했던 그 태초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크고 화려하게 쏟아내는 과잉의 예술은 결국 세속적인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자본주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다가올 새로운 시대의 예술은 뼈를 깎는 개인의 수행과 맑은 정신적 수련으로 얻어진, 작지만 폭발적인 에너지의 결정체여야만 합니다.

아시아의 깊고 오래된 정신문화와 미국의 진보한 AI 시스템. 이 극단의 문명들을 통합하여 인류의 병든 영혼을 치유할 새로운 가치관을 빚어내는 일.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이 척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붓끝에 부여된, 피할 수 없는 거룩한 십자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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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호(서양화가)

글쓴이/ 한명호(1957년생)/ 홍익대 서양화과 및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박영덕화랑. 박여숙화랑. 현대아트갤러리. 갤러리Q, 부산화랑 등 다수), 단체전 및 국제전(화랑미술제-현대화랑, 북경아트페어-아트사이드갤러리 등), 최우수예술가상 미술부문 수상(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저서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화가’ 등 다수


한명호 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