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높은 지능을 가진 침팬지나 오랑우탄 같은 유인원조차 엄지를 인간처럼 정밀하고 독립적으로 활용하지 못합니다. 유인원은 나무에 매달릴 때나 물건을 쥘 때 다섯 손가락 전체를 한꺼번에 굽혀 쥐는 방식을 취합니다. 반면 인간은 네 손가락으로 물체를 감싸 쥐면서 엄지손가락으로 받쳐주거나, 엄지와 검지 사이에 둥근 공간을 만들어 섬세하게 쥐는 '맞섬(대립)'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엄지를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유인원과 진화한 인간을 가르는 결정적인 생체학적 기준이 됩니다.
회화에서의 횡선(橫線)과 종선(縱線) 그리고 엄지의 역할
그림을 그릴 때도 엄지의 활용 여부가 선의 표현력을 좌우합니다. 엄지손가락에 힘이 실리고 다른 손가락들이 이를 단단히 받쳐줄 때, 비로소 화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강력하고 생동감 넘치는 '횡선(가로선)'을 그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기운생동(氣韻生動)이 구현됩니다. 반면 검지 중심의 운동 역학에 갇히게 되면 힘 있는 횡선을 긋지 못하고 위아래로 내리는 '종선(세로선)' 위주의 획에 머물게 됩니다.
서양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고전 회화나 한국의 전통 사실주의 그림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수직적인 종선 위주의 구도와 필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양 미술사에서 화면을 압도하는 강력한 횡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시기부터입니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미술사에서 독보적인 거장으로 인정받는 핵심적인 이유 역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역동적인 횡선의 필치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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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동서양 무술과 검술로 본 횡선과 종선
무술과 무기 체계에서도 횡선과 종선의 원리가 뚜렷하게 나뉩니다. 횡선의 중요성을 철학적으로 깊이 파고든 대표적인 문화가 일본의 선(Zen) 문화와 검도(劍道)입니다. 검도는 위에서 아래로 단칼에 내리치는 종선 베기뿐만 아니라 수평으로 베어내는 횡선 베기의 수련을 중시합니다.
과거 한국의 검술 체계는 신분과 계급에 따라 선의 운용이 달랐습니다. 학식과 수양을 겸비한 상류 사회의 선비나 고급 무관들은 고도의 신체 조절 능력이 필요한 횡선 베기 위주의 검술을 연마했습니다. 반면 최전선의 일반 군졸(쫄병)들에게는 네 손가락의 쥐는 힘에 의존해 직선으로 찌르는 종선 위주의 단순한 기술만을 가르쳤습니다. 상대를 찌르는 동작은 종선의 연장선에 불과하지만, 상대를 베어 넘기는 횡선은 엄지의 정밀한 통제력이 뒷받침되어야 구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일반적인 무술은 과장된 괴성을 지르고 상하좌우로 화려하게 움직이며 상대를 현혹하고 공포심을 유발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관우의 청룡언월도, 장비, 조자룡의 무용담처럼 실전에서 큰 힘을 발휘했던 무술이나, 말을 타고 질주하며 긴 칼을 크게 휘두르는 몽골 유목민의 기마술(騎馬術)은 모두 엄지의 악력과 통제력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횡선 베기를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유럽의 전통 펜싱과 검술 역시 네 손가락의 반사적인 힘으로 상대를 찌르는 종선 위주의 형태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다만 짧은 검(글라디우스)을 수평으로 휘둘러 상대를 신속하게 제압했던 로마 제국 군단병의 검술은 엄지의 역학을 극대화하여 횡선을 구사했던 드문 사례에 해당합니다.
동양화의 준법(皴法)과 미술 이론의 확장
동양화의 붓질에서도 붓을 수직으로 긋느냐 수평으로 긋느냐, 혹은 도끼로 나무를 찍어내듯 내리치느냐에 따라 부벽준(斧劈皴)을 비롯한 다양한 준법(皴法)이 발전해 왔습니다. 손가락의 역학적 원리를 들여다보면 동양의 문인화와 서양의 고흐가 도달했던 필선의 정점에는 모두 엄지를 강하고 자유롭게 활용하여 구현한 횡선의 에너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이 영장류에서 진화하는 과정에서 엄지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인간다운 지성과 도구 활용 능력을 갖추게 되었듯이, 예술 창작에서도 엄지를 통한 횡선의 구현은 창작자의 내적 에너지와 생명력을 드러내는 본질적인 척도가 됩니다. 이러한 통찰은 단편적인 고고학 지식이 아니라 이미 30여 년 전부터 내가 연구하여 저서에 기록해 둔 고유한 예술 이론이며, 향후 여러사람이 참여하는 전시와 작업에서도 기존의 구태의연한 방식을 넘어 세상을 새롭게 환기할 핵심 이론으로 이어집니다.
이미지 확대보기글쓴이/ 한명호(1957년생)/ 홍익대 서양화과 및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박영덕화랑. 박여숙화랑. 현대아트갤러리. 갤러리Q, 부산화랑 등 다수), 단체전 및 국제전(화랑미술제-현대화랑, 북경아트페어-아트사이드갤러리 등), 최우수예술가상 미술부문 수상(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저서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화가’ 등 다수
한명호 서양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