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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19)] 함메르페스트, 어떤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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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19)] 함메르페스트, 어떤 유토피아

6월23일, 호닝스보그 떠나 함메르페스트로


호닝스보그에 위치한 노르카프 호스텔을 운영하는 백인 아줌마 2명은 알고보니 폴란드 출신이었다.

내가 노르웨이 지역명을 현지 발음으로 물어보는데 단어가 길어지니 묵묵부답 모드가 됐다. 노르웨이에도 이민자들이 꽤 늘어나나보다. 함메르페스트에 도착해 슈퍼마켓에 가니 거기에도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유색인종 이민자가 일하고 있다. (유럽어들은 엇비슷해서 북유럽인들은 대개 영어도 잘한다)

안 그래도 요즘 77명을 살해한 노르웨이 극우 연쇄테러범 브레이빅에 대한 재판이 연일 보도되고 있는데, 이 살인마는 늘어나는 이민자들로 인한 다문화주의에 혐오감을 강력히 표명하고 있다고 들었다. 하여간 아줌마가 호스텔 위쪽으로 좀 걸어가면 버스정류소 표시가 보이는 데서 함메르페스트로 가는 버스가 선다고 해서 짐을 끌고 아스팔트 차도를 한참 걸어갔다. 지도상 표시된 곳쯤에 왔는데도 버스사인은 안 보이고, 어쩌다 차나 오토바이가 지나가는데 정말 무서울 정도로 적요하다.

6월23일 토요일, 이제서야 바람도 그치고 햇빛이 나기 시작한다. 그래도 사람 사는 동네인데 어떻게 이렇게 조용할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다. 차마 차는 세울 수 없어서 사이클을 타고 가는 남자를 불렀더니 선다. 관광객일게 뻔해도 그래도 사람 나타났을 때 길은 물어봐야지. “너 버스 사인 못봤니?”하니 무슨 버스, 몇시에 어디가는 거 기다리냐, 자세히도 물어보며 “그 버스 이 길로 분명 지나갈거야. 못타면 내일 가” 한다. “장난하지마” 했더니 웃으며 떠난다. 마음 편히 먹고 오늘은 해가 선명히 보이니 버스 놓치면 어제 못본 노르카프 곶에서의 자정의 태양을 구경할 수도 있겠다. 근데 조바심치는 성격인지라 어쩔 수가 없다. 하여간 여유없는 성격때문에 더 쉽게 지친다.

관광안내소가 있는 노르카프의 집(Nordkapphuset)에서 마게뢰야 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수단은 오후 1시10분에 서는 버스 뿐이다. 좀 시간이 지나니 멀찍이서 함메르페스트행 버스가 나타나고, 손을 흔드는데 그치지 않고 펄쩍펄쩍 뛰고 난리를 쳤다. 버스 안에서들 보면 얼마나 웃겼을까. 버스가 서고 짐칸을 열어주자, 나도 이럴 땐 초인적인 힘이 나는구나! 대형 캐리어를 던져넣고 버스에 올랐다.

운전기사는 할아버지. 그런데 이 노친네가 말하는 영어를 도저히 못알아 듣겠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보다 영어에 현지어 액선트가 심하다. 나더러 학생이냐고 물어보는 건 알겠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보기에는 동양인의 나이가 더 분간이 안 되나보다. 순간 학생할인을 받을까 하는 유혹에 시달렸으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학생이냐고 물어본 것도 무리가 아닌게 버스에 타고 있는 백인애들 6명을 보니 모두 10대후반 정도 되보이는 어린 얼굴들이다. 힘들게 여행을 다니는지 개중 나란히 앉은 남자애 2명은 입까지 벌리고 깊이 잠든 듯했다. 그들의 일행인 듯 바로 앞줄에 앉은 여자애 2명은 불어로 떠드는 것이 프랑스인들이다.

날씨가 좋으니 바깥 풍경은 더 아름답다. 이동하는 차안에서 싸구려 카메라로 마구 찍어대도 햇빛이 찬란하니 하나같이 색감이 좋고 작품이 된다. 정신 바짝 차리고 버스창문에 딱 붙어 있다가 바다 밑을 지나가는 노르카프 터널 표지판 사진을 찍는데도 성공했다. 터널 안의 도로 경사가 완만해서인지 여전히 해저터널이라는 느낌은 잘 나지 않는다. 다만 한 번 들어가면 7㎞에 가까운 길이의 긴 터널이 끝이 없을 것 같아 약간 두렵기도 하다.

◇처음 보는 색감, 천혜의 자연환경

노르웨이는 ‘북으로 가는 길’이라는 뜻이지만, 나는 국가명과는 반대로 최북단에서 남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천혜의 자연환경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지만,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아름다움은 처음 접하는 새로움에서 기인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남으로 계속 내려오면서 변화하는 자연의 색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대단하다.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로 그 아름다움이 느껴져 온다. 올 때 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는 것이지만 날이 흐렸을 때 보는 것과는 또 확연하게 다르다. 햇살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더욱 선명해졌다. 감동이 더해지며, 더 더욱 새롭게 느껴진다.

북쪽에서는 툰드라지대의 황록빛으로 펼쳐지는 대지가 신비했다. 갖가지 기암괴석들은 짙은 회색빛인데 그때문인지 바닷빛도 회색이다. 옅은 회색이다가 검은빛이 날 정도로 진해지기도 한다. 검은 돌들이 흩뿌려져 있는 해안의 토양 위에 그려진 파도가 남겨놓은 완만한 곡선들도 신비감을 더한다. 미묘한 변화가 있는 다채로운 색깔들이 어우러져 만든 한 폭의 그림이다.

멀리 보면 산에는 지난 겨울 내린 눈이 그대로 남아있어 흰 점이 군데군데 있는 얼룩소의 등이 연상된다. 어찌보면 황량한 풍경일 수도 있지만, 처음 보는 색감의 조화에 빠져들게 된다. 찬란한 햇빛과 투명한 맑은 공기에 아주 먼 곳까지 수평선이 펼쳐지니 가슴도 함께 탁 트이는 것 같다. 하늘의 뭉게구름 또한 절경이다. 햇빛의 그림자가 구름 아래쪽에 만들어낸 입체적 음영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구름사이로 군데군데 청색으로 드러나 보이는 하늘이 숨을 죽이게 만든다.


이끼류 같은 것들만 펼쳐져 있던 대지에 점점 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낮은 나무들이다. 층층이 갈라진 단면이 보이는 바위들과 나무의 뒤틀려 구불구불한 흰 둥치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 또한 신기하다. 여름을 맞아 푸른 잎들을 틔워냈는데 바람에 쓸렸는지 덤불처럼 한쪽으로 쏠린 나무들도 보인다. 한참 남쪽으로 내려왔는데도 여전히 눈이 녹지 않은 땅들이 보인다. 눈 사이로도 나무들은 자라 녹색을 뿜어내고 있다. 영상의 기온인데도 여전히 눈이 남아있는 것은 그만큼 겨울에 눈이 많이 왔기 때문일테다. 햇빛을 많이 받아 눈이 녹은 곳은 커다란 웅덩이가 됐다.

함메르페스트에 가까워 가니 물빛이 코발트블루로 바뀐다. 하늘빛도 이 색을 닮아 짙은 청색이다. 아름답다는 말 이상의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가슴이 알아서 느끼고 가볍게 심장이 뛴다. 이제는 키 큰 나무들도 많이 나타나고 갖가지 색깔로 단장한 인가들이 전원적, 목가적 느낌을 더한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하다. 곳곳에 짙은 푸른색으로 칠한 목조건물들은 이 하늘빛, 바닷빛을 따라한 것이다.

◇또다시 겪게된 프랑스인의 친절

그제 호닝스보그에 오며 들렀던 올더피요르드에 3분간 서는 동안 기사 허락받고 화장실에 다녀와 함메르페스트 톤호텔에 묵는데 거기 지나면 근처에 좀 내려달라니까 “이 차는 스카이디(Skaidi)까지만 가” 하신다. 에고, 이게 뭔소리. 거기 가서 갈아타라는 말인걸 알겠는데 노인네 영어가 정말 알아듣기 힘들다. 아까 버스 탈 때 한 말도 그 얘기였던거 같다. 근데 버스 전광판에는 함메르페스트라고 나와 있어 그저 거기 바로 가겠거니 하고 있었다. 나중에 지도를 잘 살펴보니 스카이디는 일종의 교통요지다. 이틀 뒤 함메르페스트에서 알타로 갈때도 여기를 거쳐야한다.

스카이디에 도착한 후 내리면서 역시나 다음 버스 놓칠까 조바심을 치면서 기사에게 어디로 가야되느냐고 물어보니, 버스 안에서 나와 같이 열심히 노트에 뭔가 적고 있던 프랑스 여자애가 “우리도 함메르페스트 가니까 같이 가”하고 친절하게 말을 걸어준다. 바로 뒤에 나타난 함메르페스트행 버스에 캐리어를 옮겨 싣는데, 프랑스 남자애가 “내가 도와줄게”하고 짐을 올려주려 한다. 자기도 자기 몸집만한 배낭을 지고 있으면서. 속눈썹이 긴 예쁘장한 이 남자애는 아들뻘쯤 될까, 게다가 걔보다 내가 더 힘쓰게 생겼다. 역시 프랑스인들의 친절함과 소위 ‘똘레랑스’에 바탕을 둔 너른 마음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로바니에미행 열차에서 만났던 로렌이 다시 떠오른다. 뭔가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이들에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먼저 “도와줄까”하고 물어봐줄 수 있는 것, 이게 프랑스인 자부심의 바탕 아닐까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진심이 느껴진다. 홀로 다니는 여행에서 이만큼 힘이 되는 한 마디가 있을까. 이런게 사람사는 세상 아닌가.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

오후 4시가 좀 넘어 함메르페스트에 내린 후 이들에게 어디서 머무느냐고 물어보니 그저 캠핑하러 간단다. 좁은 시내인지라 슈퍼마켓에 먹을 것을 사러갔다가 이들 4명을 또다시 만났는데 반갑게들 웃으며 인사한다. 이 정도면 프랑스와 사랑에 빠질 것 같다. 안 그래도 오가는 비행기편을 에어프랑스로 끊은 것은 이유가 귀국때 파리 시내에 들를 수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인데, 그 시간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들을 만난 뒤라 멀뚱한 노르웨이인 호텔 리셉션 직원에게 괜히 좀 화가 났다. 확장형 캐리어는 앞쪽까지 짐을 넣었더니 중심이 잘 안 잡혀 기우뚱거리며 자꾸 쓰러진다. 이 짐들을 지고 끌고 숙소인 톤호텔 로비로 비틀거리며 들이닥쳤는데 리셉션을 혼자 지키고 있던 남자 직원은 그냥 무표정하게 보고만 있다. 아무리 비지니스호텔이라지만 바쁘지도 않은데 사람이 오면 반기는 척이라도 해야지. 갑자기 영어가 막 잘된다. “여기 도와줄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나 쓰러지려는 짐 잡고 있어야하는데 내가 꼭 네쪽으로 가야되냐?” 어쩌구 저쩌구. 국제적 ‘투덜이 스머프’ 나셨다.

내가 함메르페스트를 가겠다고 하자 모두들 말렸다. 여행작가 유진선씨는 관광지가 아니기에 비싼 호텔 몇 개밖에 없어 비용문제를 걱정했고, 노르웨이 알타에 산다는 한국인 역시 등산밖에 할 일이 없을 거라고 경고했다. 심지어 유명여행안내서 ‘론리 플래닛’에는 “해안 페리를 타고 가다 잠시 내려 둘러보기 적당한 곳”이라며 “두어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서술돼있다.

그래도 난 두 권의 책 때문에 함메르트페스트에 꼭 오고 싶었다. 그래서 관광안내소에 문의, 호텔 할인까지 받아 여기까지 왔는데 토요일이라 관광안내소는 벌써 문을 닫았다. 북유럽이라도 관광철에는 주말에도 몇시간씩 문을 열긴 한다.

◇소설 속에서처럼 이상향은 아니라도

“운이 좋으면 일생에 한 번은 함메르페스트에 갈 수 있지.”

나를 함메르페스트로 이끈 건 이 한 구절이다. 핀란드 작가 마르야레나 램브케(Marjaleena Lembcke)의 ‘함메르페스트로 가는 길’의 마지막 구절이다. 주인공인 15세 소녀 레나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던 해 태어난 작가와 동갑내기다. 배경은 전쟁 후 풍요롭지 못했던 핀란드 코콜라. 레나는 아버지와 함께 고물차를 타고 함메르페스트로 여행을 떠나지만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버리고 온 첫 결혼에서 태어난 오빠의 존재를 알게 되고, 라플란드인 친척을 포함해 교류가 없던 친척들을 만나 정을 나누게 된다. 또 아버지를 이해하고 성숙해간다.

소설 속에서 함메르페스트는 이상향이다. 독성물질이 그득한 공장에서 뼈를 깎는 중노동에 시달리며 결국 마흔 후반대에 돌아가신 레나의 할아버지는 함메르페스트를 지상낙원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곳은 여름에는 붉게 빛나고, 겨울에는 맑은 영혼처럼 하얗게 변하지. … 거긴 불공평도, 배고픔도 없거든. … 여름에는 집집마다 붉은 덩굴장미가 피고, 겨울에는 세상에서 가장 새하얀 눈이 빛을 내지. 그곳에는 공장이라고는 없어. 단 한 개도. 바다 냄새만 가득하지. 여름이면 남쪽에서 북극해로 날아온 철새들이 하늘을 수놓는단다. 철새들은 알을 낳는 데 그보다 더 좋은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육지의 끝으로 날아오지.”

그러나 함메르페스트는 이상향은 아니다. 레나와 아버지가 이곳에 가지 못하고 그리기만 하는 것이 다행일 정도로. 레나가 여행중 로바니에미에서 만나 차에 태워준 노르카프에 가던 독일인 의대생은 “너 때문에 일부러 함메르페스트에 들렀다”며 “노르웨이의 다른 도시들이 훨씬 더 예쁜데 왜 꼭 함메르페스트에 가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함메르페스트에 대해서 할 말이 하나 더 있다. 영국언론에서 활동한 미국인 빌 브라이슨이 쓴 ‘발칙한 유럽산책(Neither Here Nor There: Travels in Europe)’에 가장 처음 나오는 도시가 이 곳이다. 몇 번이나 반복해 읽어도 유쾌한 여행기는 이 책이 처음이었다.

1991년 첫 발간 된 책이므로 지금과는 관광현실이 많이 다르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 브라이슨은 한겨울 익스프레스2000 버스를 타고 30시간에 걸친 여행을 한다. 실상은 화물트럭에 앞에 좌석 몇 개를 설치한 짐 위주의 이동수단이다. 익스프레스2000 홈페이지에 가봤는데, 더 이상 사람을 태우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따분한’ 황금빛 도시에 그는 익숙해져갔는데, 무엇보다 문장마다 ‘비싸다’는 얘기가 꼭 들어가는 것이 확 와닿는다. 이 책을 통해 함메르페스트가 유럽최초로 전기 가로등이 설치된 마을이라는 것도 알았다.

아직 노르웨이의 다른 지역들을 다 가보지 못해서 뭐라 할 순 없지만, 이곳으로 오는 날은 한동안의 우중충함을 벗어나 기적처럼 맑았다. 노르카프의 태양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태양빛을 한껏 머금은 아름다운 함메르트페스트를 만날 수 있었다.

대중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