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김에리 북유럽80일 (16)] 사미족 플레임 무당과 모닥불

공유
0

[김에리 북유럽80일 (16)] 사미족 플레임 무당과 모닥불

6월21일, 카라쇼크 샤프미 파크


머리 감고 말릴 시간도 아껴가며 구경하고 원고 쓰는 이 지저분함!

원고! 원고! 이를 쓸 시간 확보를 위해 새벽 6시로 알람을 맞춰놨다. 어젯밤에도 새벽 한 두 시 사이에 겨우 잤는데. 소형시계의 알람을 끄러 일어났다가 침대로 다시와 올라가다가 바닥으로 그대로 미끄러졌다. 어깨 근육통이 심한 게 어제 노트북과 자료가 든 배낭을 지고, 캐리어를 끌로 숙소행 언덕을 오른게 ‘쥐약’이었나보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200m정도 되는 거리를 택시를 불러 다닐 수도 없고 참….

일기예보를 확인해보니 영상 6도 정도다. 바람 불고 비 오니 확실히 더 추워졌다. 숙소 내 창가 쪽에 난방기기가 있어 켜고 잤다. 어제 저녁 좀 동네를 좀 돌아보긴 했다. 인가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동네지만 노르웨이 풍의 ‘부티’가 좔좔 흐른달까. 추운 지대인데도 나무가 많은 정원을 깔끔하면서도 풍성하게 잘 꾸며놨다. 전원주택들도 하나같이 예쁘다. 오늘은 비가 더 많이 온다. 곳곳에 웅덩이가 질 정도지만 오늘 오후 5시55분 유럽대륙 최북단 노르카프로 들어가는 관문인 호닝스보그로 떠날 버스를 탈 예정이라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한다.

몇 백 m 거리 안에 관광할 곳들이 빼곡히 모여 있다. 좀 걷다보니 신고있는 운동화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와 더 춥다. 고어텍스 신발을 장만해가라는 충고를 무시한 것이 후회스럽다. 아웃도어 생활을 해본적 없이 살다보니 모든 것을 너무 막연히 생각하고 대책없이 장기 여행을 떠난 것이다. 아침에 침대에 오르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 ‘재앙’의 신호였을까, 하루종일 여기저기 부딪히며 혼자 슬랩스틱 코미디를 했다.

◇문틀에, 유리창에 부딪히고 슬랩스틱

막상 돌아다녀보니 하루면 충분히 돌아보고도 시간이 남을 정도로 볼거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숙소인 ‘화이트 레인디어 모텔’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미 도서관과 의회건물이 첫번째 방문지. 이나리에서는 핀란드 거주 사미족 의회가 열리고, 카라쇼크에서는 노르웨이 거주 사미족 의회가 개최된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사미족 사서가 그저 안내판을 가리키기에 보니 가이드투어로만 개방이 된단다. 역시나 관광객이 오는 짧은 여름 한때인 6월12일~8월12일에만 오전 8시30분, 9시30분, 10시30분, 오후 12시30분, 1시30분, 2시30분 여섯차례, 25명 이상이 모여야만 진행한단다. 오전 11시께인지라 다음 가이드투어에 사람이 얼마나 모일지도 알 수 없고 내외부 구경만 좀 하고 나왔다.

역시 나무가 흔한 동네인지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나무로 만들어졌다. 전봇대까지 여전히 목재이니 말 다했다. 사미족 텐트를 테마로 한 부속건물과 별빛이 쏟아질듯한 도서관 천장의 전구배열이 아름답다. 역시 예술작품에는 보고 느낀 것이 반영되게 마련이다.

걸어서 동네 반대편의 NRK 라디오와 TV 건물로 갔다. 사미족 전용 방송인 NRK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에이나르 표르데(Einar Førde) 감독을 기념해 야외에 유리로 세워진 작은 뾰족탑이 인상적이다. 사미족의 텐트인 라뷔(노던사미언어로 lávvu) 모양이라는 건 나중에 안내서를 뒤져보고 알았다. 그 앞에 담배꽁초들이 버려진 쓰레기통을 사미족 고유 국기 색으로 칠해놓은 것이 재밌다.

같은 골목을 따라 100m쯤 들어가면 국립사미문화박물관이 나오는데, 이미 이나리에서 시다(Siida)를 보고 온지라 싱겁다. 시다와 연계해 운영된다는 이 박물관은 한 개 층에 카라쇼크 일대에 거주하는 사미족의 의상과 갖가지 생활상을 보여주는 물품들을 전시해놨다. 사미족들도 사는 곳에 따라 지역색이 있고 언어도 달라 시다에서 보던 것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리네 비단천 같은 실크로 된 결혼식 전통의상을 입은 신부 마네킹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채광이 잘된 건물에서 소박한 전시물을 보는 것도 편안한 느낌이 들어 좋다. 시다는 보다 압도적인 느낌이랄까. 외부 정원에는 역시 사미족 주거 건축물을 실제 크기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는데, 설명을 어디 붙여놨는지 찾기도 힘들다. 풀밭을 걸어다니느라 발은 더 젖어온다.


1950년대식으로 복원해놓은 나무집은 천장이 어느 정도 높다. 근데 예전 양식은 어찌나 낮게 지어졌는지 입구로 들어가다가 문틀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우산을 쓰고 방수재킷 모자까지 쓰고 있어 앞을 잘 보지 못한 탓이다. 키가 한 140~150㎝ 정도되는 사람들이 살았을 거 같다. 어찌나 세게 부딪혔는지 목디스크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제법 내리는 빗줄기를 뚫고 이 마을의 중심지인 사프미(사미족이 사는 이 지역을 일컫는다) 파크에 갔다. 비에 젖어 추위에 떨며 작은 로비식당에서 토마토 수프를 하나 시켜먹었는데 노르웨이 통화로 60 크로네(약 1만2000원)

정말 1000원 주고도 안 살 것 같은 싸구려 열쇠고리 기념품 하나도 이 가격 이상이다. 살인적인 물가다. 대충 셈해보니 숙박비까지 치르고 나면 한국에서 환전해온 50만원 정도는 한 3일이면 다 쓸 것 같다. 단 한 벌 가져와 빨아가며 내내 입고 다닌 청바지는 엉덩이 아래쪽 부분이 쭉 찢어져있다. 회색 내복을 받쳐입고 있어 살이 안 들여다보이니 패션인양 그냥 다니기도 했다. 수선집에 맡겨 한 번 기워입었던 청바지인데, 대충 버릴 옷들만 가져온 것들이 이런 낭패를 불렀다. 관광할 시간도 아깝고 마감에 쫓기면서 이걸 언제 바느질을 하고 있나, 귀찮고 황당하다.

사프미 파크에 들어갈까 말까 하고 입장료를 물어보니 120 크로네. 매직극장과 카페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표를 끊었는데 나름 놀이공원을 표방한지라 박물관보다 훨씬 재밌는 것들이 많았다. 20분 간격으로 상영되는 ‘매직극장’은 단체 관광객들이 빠지고 나서 나 혼자 관람할 수 있었다. (여기서도 관광버스 대절해 효도관광 다니는 나이든 유럽인들이 종종 보인다. 각국에서 온 이들을 현지 여행사에서 모아 다니기도 한단다)

사미어, 노르웨이어, 영어, 불어, 독어, 네덜란드어, 러시아어 등 8개국어로 상영된단다. 입구에는 사미족 여인의 사진들이 전시돼있는데 커스틴 버리트 고우프(Kirsten Berit Gaup)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사미족 최초의 여성 순록지기란다. 그 전에는 남자들만 순록지기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여년 전 스노모빌 전복사고로 숨진 그녀의 손녀가 현재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는데 그 손녀의 사진이 사프미 파크 광고 깃발에 인쇄돼있다. 금발머리를 한 것이 혼혈이 많이 진행된 것 같아 보인다.

시간에 맞춰 자동문이 열리면 사미족 생활상이 기록된 사진이 전시된 곳에 서서 작은 화면으로 5분간 사미족 역사에 대한 비디오를 상영하고, 다음 문이 역시 자동으로 열리면 본격적으로 3D 매직극장에 들어선다. 나 혼자 관람하니 어둠속에서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체온이 떨어져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넓은 공간을 혼자서 즐기는 기분이 더해 소름끼칠 정도로 재밌었다.

불이 꺼지면 화면 앞쪽 장작불 모형에서 사미족 샤먼 ‘노아이디(Noaidi)’의 얼굴의 이미지가 3D 불꽃영상으로 떠오른다. 그가 들려주는 사미족 전설이 20여분간 펼쳐지는데, 흰순록의 눈은 별빛에서 왔으며, 당신이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면 영혼은 오로라가 된다는 등 그런 얘기들이다. 별빛을 얘기할 때 천장에 달린 작은 전구들이 켜지고, 역시 천장에 달린 영사막이 오로라처럼 보일 수 있도록 한 장치들을 활용했는데 한 번은 꼭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와서 또 유리창에 부딪혔다. 취재상 질문할 것들을 정리하다가 입구에 붙어있는 개장시간을 확인하러 가다가, 이곳은 추위 때문인지 현관도 공간을 두고 이중문이라는 것을 잊고 그 공간 옆면 유리창에 머리를 박은 것이다. 정말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 안 그래도 관광객도 드문드문 오는 동네에 동양인 여자가 혼자 다니니 눈길은 있는 대로 끌고 있는데.

그나마 영어로 질문을 하는데 사미족 복장을 한 어린 여자직원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얼마나 많은 언어(language)로 상영되느냐고 묻는데, 얼마나 많은 순록(reindeer)이라고 들렸다는 것이다. L과 R 발음이 모두 ‘ㄹ’인 한국어의 특성상 신경을 쓴다고 쓰는데도 혀가 제대로 안 굴러간다. 전에 독일작가 루이제 린저가 쓴 북한기행에서 방문중 자신의 생일에 받은 깜짝 케이크에 ‘Luise Rinser’ 대신 ‘Ruise Linser'라고 자신의 이름이 잘못 써있더라는걸 본 적이 있는데, 딱 그짝이다. 힘들다, 힘들어!

◇사미족 천막의 장작불

사프미 파크는 야외 공원도 볼만하다. 리카호텔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앞쪽으로 사미족의 여름캠프와 겨울캠프를 전시해놨다. 전시물과 설명도 충실하다. 순록이 두세마리 있는 농장까지 나름 갖춰놨다. 짧은 거리는 썰매처럼 끌고 다닐 수 있게 만들어놓은 창고와 이끼로 떼를 입혀 덮어놓은 작은 오두막에 음식물을 보관해놓을 수 있게 만든 것이 인상적이다. 겨울에 자연에서 얻은 얼음을 함께 넣어두면 봄까지 지속되는 일종의 냉장고다. 오래전 이국의 전원풍경을 담은 사진 속에서 지붕에 풀들이 자라게 해놓은 전원가옥들을 보고 반한 적이 있는데, 핀란드에서는 못본 이런 지붕이 노르웨이에는 흔하다. 노르웨이 사미족들도 이러한 방식을 써 보온과 피서 효과를 함께 누리는 듯싶었다.

리카호텔 쪽으로 가면 스토가멘(Storgammen) 레스토랑이 나온다. 역시나 풀들이 막 자라고 있는 작은 언덕이나 커다란 무덤쯤 돼 보이는 외관으로, 입구를 찾아 들어가면 4개의 오두막이 있는데 가운데 장작불을 피워놓고 순록가죽을 깔고 둘러앉아 순록고기 요리를 맛볼 수 있게 해놓았다. 비싼 음식값을 내지 않도고 입장권만으로 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런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야외 전시장 내 커다란 사미족 천막(라뷔) 하나에 가운데 장작불을 피워놓고 둘레에는 푹신한 털이 달린 순록 가죽들을 늘어놓아 앉아서 쉴 수 있도록 했다. 커피와 차를 무료로 마실 수 있다. 자세히 보니 통나무를 기대 만든 천막의 가운데 꼭대기 부분은 열려있어 거기로 연기가 나간다. 장작불 옆에서 비에 젖은 몸을 덥히니 기분이 좋아진다. 생각과는 달리 젖은 옷이 잘 마르는 건 아니었지만 여기서 보내는 시간만으로도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

홀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스무명쯤 되는 키작은 동양인 관광객들이 시끄럽게 들이닥친다. 팀 리더라는 중년 남자가 나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서 “너흰 중국에서 온게 분명해”라고 하니, 타이완에서 왔단다. 오랜만에 보는 같은 아시아인이라 반가운 느낌이 들어 이것저것 얘기도 나누고 사진도 좀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야외전시장도 상세히 들여다본다고 해도 15분이면 다 돈다. 다시 천막카페에 들어와 불을 쬐고 있는데 기념품을 직접 만들어 팔던 순록지기 오두막을 지키던 할아버지 사미족과 손자뻘인 10대 후반인 듯한 키큰 남자아이 둘이 들어와 내 곁에서 뭐라고들 얘기를 한다. 작고 마른 할아버지는 푸른색에 붉은색 장식천을 군데군데 덧댄 사미족 전통의상을 입었다. 방수장화를 신은 남자아이들은 아마 혼혈된 사미족인 듯싶었는데, 불을 쬐는 내 뒤에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순록가죽 위에 드러눕는다. 비도 오는데 불가에서 휴식을 취하는게 일상인듯 했다. 한 녀석만 남아 잠이 들었길래 살짝 사진을 찍고 나왔다. 이제는 떠나야할 시간이다.

대중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