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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민의 프롭테크 '썰'] 처벌로는 현장이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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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민의 프롭테크 '썰'] 처벌로는 현장이 바뀌지 않는다

정상민 대한중대재해예방협회장이미지 확대보기
정상민 대한중대재해예방협회장
사고는 법정에서 막을 수 없다. 현장에서 막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거꾸로 해왔다. 사고가 나면 누군가를 처벌하고, 처벌이 두려워 서류를 쌓고, 서류가 쌓이는 동안 현장은 그대로였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에도 악순환은 끊어지지 않았다. 법은 강해졌지만 현장은 여전히 위험하다.

숫자가 증명한다. 우리 대한중대재해예방협회가 지난 1월 한 달간 안전관리자, 교수, 컨설팅 전문가 등 2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6 중대재해 예방정책 전문가 설문' 결과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응답자의 63%가 가장 시급한 과제로 '예방 중심의 제도 강화'를 첫손에 꼽았다. 또 열 명 중 아홉은 정책 방향이 '사후 처벌'에서 '사전 예방'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48%가 현장 경력 16년 이상의 베테랑이고, 건설업 종사자가 66.7%, 300인 이상 대형 사업장 관계자가 70.4%를 차지한다. 책상에서 나온 의견이 아니다. 수십 년간 현장을 지켜온 사람들의 한목소리다.

세부 수치를 들여다보면 문제의 윤곽이 선명해진다. 형사처벌 강화가 실제 사고 예방에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 전문가들은 5점 만점에 평균 2.67점을 줬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유보적인 평가다. 중대재해 예방의 핵심 도구인 위험성평가 제도의 현장 기여도도 2.56점에 머물렀다. 위험성평가가 현장을 지키는 살아있는 도구가 아니라 점검을 넘기기 위한 서류로 전락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 베테랑 전문가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처벌을 피하기 위한 방어적 안전 관리는 결국 서류 작업만 늘릴 뿐, 현장의 안전도를 높이지 못한다."

그렇다면 전문가들이 해법으로 꼽은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가 압도적으로 부각됐다. 첫째는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의 재정·세제 지원'이다. 5인 이상 사업장으로 법 적용이 확대됐지만, 영세 기업이 스스로 안전 역량을 갖추기에는 현실적 한계가 크다. 의무는 늘었는데 역량을 키울 지원은 따라오지 못했다는 현장의 절박함이 담긴 수치다. 둘째는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 기반 스마트 안전 기술 도입'이다. 인력 부족과 관리 사각지대를 메울 현실적 대안으로 주목받는다. 사람이 놓치는 곳을 기술이 채울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경영층의 실질적 참여 문제도 빠뜨릴 수 없다. 최고경영자와 주요 경영자의 안전 의사결정 참여도는 2.56점으로, 위험성평가 실효성 점수와 정확히 겹친다. 우연이 아니다. 경영층이 안전을 비용이 아닌 경영의 중심에 두지 않으면, 위험성평가는 서류로만 존재하게 된다. 인센티브와 구체적 가이드라인으로 경영진의 실질적 참여를 끌어내지 않으면 제도는 공전할 수밖에 없다. 감독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정기 점검 중심의 현행 방식에서 벗어나 기업의 위험성평가 역량을 실질적으로 끌어올리는 전문 감독관 배치로 고도화해야 한다는 제언이 2.78점의 공감을 얻었다. 현장을 들여다보는 눈이 아니라 현장을 함께 키우는 손이 필요하다.

우리 협회는 이번 설문 결과를 단순한 통계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정책 제언으로 다듬어 정부와 유관 기관에 전달하고, 중소기업 맞춤형 안전보건 콘텐츠와 실질적인 현장 지원 프로그램으로 구체화할 계획이다. 처벌의 공포가 아닌 예방의 문화가 현장에 뿌리내리도록, 기업과 정부 사이에서 실질적인 가교 역할을 해 나가겠다. 안전은 구호가 아니라 시스템이고, 시스템은 데이터와 현장 경험 위에서만 작동한다.

사고는 예고 없이 오지 않는다. 위험이 쌓이고 관리되지 않다가 터지는 것이다. 그 위험을 미리 찾아내고 제거하는 것이 예방이고, 그것이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정책의 본분이다. 처벌은 사고가 난 뒤의 이야기다. 우리가 막아야 할 것은 사고 그 자체다. 이제 정책이 응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