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시간을 2015년 7월로 되돌려본다. 당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단순한 두 기업의 결합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공정성과 국민의 노후 자산, 그리고 재벌 총수 일가의 지배권 승계라는 첨예한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한 분수령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땀과 눈물로 조성된 국민연금이 서 있었다. 당시 삼성물산의 단일 최대주주로서 11.21%의 의결권을 쥐고 있던 국민연금은 합병 성패의 열쇠를 쥐고 있던 절대적 캐스팅보터였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저버리고 특정 재벌 일가의 승계 구도 완성을 위한 하수인을 자처했다.
합병비율 1 대 0.35라는 수치는 시장의 모든 상식과 상충하는 모순 덩어리였다. 자산가치와 실적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던 삼성물산의 1주가 제일모직의 0.35주에 불과하다는 궤변적 등식 앞에서 국내외 유수의 의결권 자문기구인 ISS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일제히 합병 반대를 권고했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정상적인 의사결정 경로였던 외부 전문위원회를 고의로 배제했다. 홍완선 당시 기금운용본부장의 주도 아래 열린 내부 투자위원회는 제일모직의 바이오 사업 가치를 비정상적으로 부풀리고 삼성물산의 주주 가치를 헐값으로 후려치는 가치평가 조작을 자행했다. 그렇게 밀실에서 날조된 찬성표는 주총 현장에 던져졌고, 69.53%라는 근소한 차이로 가결 정족수를 넘기며 합병안은 통과되었다. 국민연금의 찬성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성립조차 불가능했던 야합이었다.
이 사태의 본질은 공공 자산의 수탁자 책임에 대한 파렴치한 배신이다. 국민연금은 國民의 노후를 책임지는 충실의무(Fiduciary Duty)를 팽개친 채, 살아있는 권력과 재벌 권력의 야합에 무릎을 꿇었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청와대의 직권남용, 홍완선 전 본부장의 업무상 배임 혐의는 이미 2022년 대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으로 확정된 바 있다. 대한민국 최고 사법기관이 위법성을 명명백백하게 단죄했음에도, 그 위법 행위가 잉태한 독버섯 같은 국제 분쟁의 청구서는 고스란히 국가와 국민의 몫으로 되돌아왔다.
이 참혹한 파국의 최종 수혜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 정점에는 삼성물산의 가치를 희생시켜 제일모직 지분 가치를 극대화함으로써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무혈입성한 이재용 회장이 있다. 당시 이재용 부회장은 제일모직 지분 23.2%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삼성물산 지분은 전무한 상태였다. 삼성물산이 보유하고 있던 삼성전자 지분 4.1%를 장악하는 것이 경영권 승계의 핵심 고리였고, 불공정한 합병비율은 총수 일가의 지배력을 천문학적인 자금 투입 없이 공고히 다져주는 마법의 열쇠가 되었다.
국민연금 자체 추산으로도 수천억 원에 달하는 기금 손실을 입었고, 일반 소액주주들은 재산권을 약탈당했으며, 마침내 국가마저 수천억 원대의 국제 분쟁 배상금을 물어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이재용 회장과 그 일가만이 지배권 강화라는 막대한 사적 이익을 고스란히 독식했다.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라는 시장경제의 가장 추악한 병폐가 국가 공권력과 국민연금이라는 거대 공적 기구를 매개로 완벽하게 관철된 것이다.
이제 삼성을 향해, 그리고 이재용 회장을 향해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할 시간이다. 형사재판의 무죄 판결이나 법리적 공방의 결과를 방패막이로 삼아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글로벌 초일류 기업을 자처하는 삼성의 지도자로서 취할 온당한 자세가 아니다. 이재용 회장은 비록 법원의 사법적 판단에서 일부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았을지언정, 자본시장의 원칙과 역사적 도덕성, 그리고 국민적 신뢰의 법정에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사익을 위해 국가 시스템을 왜곡하고, 공적 연금을 사유화의 도구로 전락시키며, 결과적으로 천문학적인 혈세를 낭비하게 만든 구조적 원인 제공자로서의 무게를 직시해야 한다.
정부 역시 불복 소송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 결정을 미루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지연이자가 불어나는 상황에서 실익 없는 법적 쟁송을 연장하는 것은 국고를 더욱 축내는 배임에 가깝다. 정부는 즉각 판정 결과를 수용함과 동시에, 이 파국을 초래한 주체들을 상대로 강력한 구상권(求償權)을 행사해야 한다. 당시 불법 외압을 행사해 대법원 유죄 확정을 받은 문형표 전 장관, 홍완선 전 본부장은 물론, 합병을 통해 실질적 지배권 이익을 편취하고 국가에 막대한 배상 채무를 안긴 원인 행위자로서 삼성물산 법인과 이재용 회장에 대한 법적·재정적 구상 방안을 빈틈없이 검토하고 실행에 옮겨야 마땅하다.
국민연금이 국민을 배신한 대가로 남겨진 1,500억 원의 청구서, 이는 대한민국 자본시장이 비정상의 정상화로 나아가는 마지막 경고장이다. 이 청구서를 국민의 혈세로 고스란히 치르고 넘어간다면 대한민국 자본주의는 또다시 후진성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원인을 제공하고 막대한 부당 이득을 챙긴 자가 그 손실을 온전히 물어내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무너진 시장의 질서를 바로잡고 상처 입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염치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