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이미지 확대보기불과 얼마 전까지 '6월 시한'을 압박하던 종전 협상이, 사실은 미국이 이란발 중동 위기에 매달려 있는 동안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란 문제가 진정세를 보이고 나서야 우크라이나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셈이다.
종전은 한 나라의 의지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다른 위기와 시간을 다투며 밀리고 당겨지는 변수다. 그리고 설령 종전이 이뤄진다 해도, 그다음에 따라와야 할 제재 해제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여기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러시아 제재를 만든 주체는 미국과 EU인데, 이 둘은 제재를 푸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미국은 대통령 행정명령이나 의회 입법으로 비교적 빠르게 제재를 조정할 수 있다. (물론 미국조차 의회 승인이 필요한 법적 제재가 섞여 있어 단번에 풀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국무장관이 직접 "제재 해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와 있다"고 밝힌 적도 있다.
반면 EU는 다르다. 27개 회원국의 만장일치 합의가 필요하고, 제재 하나하나를 6개월 단위로 다시 검토해서 연장 여부를 결정한다. 실제로 EU 이사회는 올해 3월에도 러시아 제재를 6개월 더 연장해 2026년 9월까지 적용하기로 했다. 종전 협상이 6월에 타결되더라도, EU의 제재는 자동으로 따라서 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이 먼저 움직여 일부 제재를 풀더라도, 유럽은 여전히 자기들만의 절차와 시간표대로 움직인다. 실제로 EU는 미국의 독자적 제재 해제 움직임에 "우리는 추가 제재를 준비하고 있다"며 다른 목소리를 낸 적도 있다. 미국과 유럽이 같은 편처럼 보여도, 제재라는 카드 앞에서는 다른 패를 쥐고 있는 셈이다.
이게 북극항로와 무슨 상관일까. 관련 기업이나 투자자들은 흔히 "종전이 되면 제재가 풀리고, 제재가 풀리면 러시아 쪽 항로와 항만에 투자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가정에는 최소 두 가지 함정이 있다.
첫째, 종전 시점 자체가 불확실하다. 중동 사태처럼 다른 위기가 끼어들면 협상은 또 뒤로 밀릴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이미 한 차례 벌어졌다.
둘째, 종전이 되어도 제재는 한 번에 풀리지 않는다. 미국과 EU 제재는 별개의 절차로 움직이고, EU 쪽은 이미 9월까지 연장이 확정돼 있다. 설령 6월에 정치적 합의가 이뤄져도, 유럽 자본이 실제로 러시아 쪽 사업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시점은 그보다 한참 뒤일 가능성이 크다.
이를 모르고 "종전=제재 해제=투자 가능"이라는 단순한 등식으로 사업 계획을 짠다면, 실제 일정과 크게 어긋날 위험이 있다.
이 불확실성을 거꾸로 보면 한국에게는 시간이 있다는 뜻이 된다. 미국과 유럽이 제재 해제 시점을 놓고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동안, 한국은 러시아 쪽 사업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대신 그와 무관하게 진행할 수 있는 일들을 먼저 해둘 수 있다.
예를 들어 항만과 쇄빙 기술, 모듈형 발전 시스템처럼 제재와 무관하게 지금 준비할 수 있는 하드웨어 역량을 키우는 일이다. 나아가 북극 환경에 최적화된 '로로(RO-RO)선' 물류 체계를 실증하거나 극한지용 에너지 인프라 설계를 선제적으로 마쳐두어야 한다.
또한 제재가 풀리는 즉시 새로운 에너지 흐름을 주도할 수 있도록, 국제 컨소시엄의 틀을 미국·일본과 미리 짜두는 일도 중요하다. '북극-아시아 에너지 회랑' 개척을 목표로 항만 인프라 공동 투자 펀드를 선도적으로 조성하거나, 차세대 쇄빙 LNG선 및 수소 밸류체인 연계를 지금부터 함께 기획하는 식이다. 정치적 신호를 기다리며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신호가 켜지는 순간 가장 먼저 뛸 수 있는 준비를 해두는 것이 핵심이다.
반대로 가장 위험한 전략은 "종전되면 그때 움직이자"는 식의 기다림이다. 종전 시점도, 제재 해제 시점도, 미국과 유럽 중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도 불확실한 지금, 그 불확실성 자체를 전제로 계획을 짜는 쪽이 결국 앞서 나간다.
북극항로 뉴스는 앞으로도 종전 협상의 진전과 후퇴를 따라 출렁일 것이다. 그 출렁임에 일일이 반응하기보다, 출렁임과 무관하게 준비할 것부터 채워가는 것. 지금 한국에게 필요한 태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