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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조선 강탈 후 전국에 신사 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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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조선 강탈 후 전국에 신사 지어

<황국화의 상징 조선의 신사(神社)> 연재를 시작하며

[글로벌이코노믹=정석현기자] "14일 <교도통신> 보도를 보면, 다니가키 사다카즈 법무상, 하야시 요시마사 농림수산상, 네모토 다쿠미 부흥상, 이나다 도모미 행정개혁담당상이 13일부터 16일까지 열리는 야스쿠니신사의 미타마 마쓰리(조상의 혼령이나 곡식을 지키는 신에게 제사 지내는 행사)를 맞아 등을 신사에 봉납했다. 봉납은 “영령에 대한 감사와 평화로운 세상 실현에 대한 희망을 염원”하는 의미를 갖는데, 야스쿠니신사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때의 A급 전범들이 합사돼 있다는 점에서, 다른 신사에 봉납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 이는 한겨레신문 7월 14일 치 보도이다.

▲ 남산에 세웠던 조선신궁
해마다 이 때쯤되면 야스쿠니와 관련된 문제로 시끄럽다. 일본에 8만여개에 달하는 신사가운데 유독 야스쿠니신사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 사람들의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이곳이 다른 많은 신사와는 성격을 달리 하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전범자들 그것도 에이급 전범자들을 기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범이란 전쟁범죄자들을 가리킨다. 가해국인 일본의 공직자들이 피해국가를 의식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야스쿠니를 참배하느라 드나 드는 것은 밝은 해 아래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나라 사람들은 침략전쟁=야스쿠니신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지도층의 야스쿠니 참배가 멈춰지지 않는 한 태평양전쟁에 대한 참회와 반성은 없다고 아시아 사람들은 보고 있는 것이다.

▲ 국사당이 있던 신성한 남산 중턱을 깔아 뭉개고 조선신궁을 세웠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을 강탈하고 바로 착수한 것이 전국에 신사를 짓는 일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서울 남산, 부산, 전주,남원, 대구, 원산, 평양, 해주 등 각 지역을 대표하는 조망 좋은 곳에 어김없이 침략신사(侵略神社)를 세워두고 “천황에게 참배”할 것을 강요했다. 일본땅에 신사를 만들어 제신(諸神)을 모시는 것이야 일본인들의 취미겠지만(야스쿠니신사 예외) 이것을 조선땅에 만든 것은 조선인들에게 황국신민화를 강요하기 위한 상징적인 곳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말하자면 조선인들이 누천년 지켜온 민족정서를 파괴하기 위한 것으로 이는 악질적인 테러 행위의 하나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천황에 대한 숭배를 조선민중에게 강요하는 장소로 신사를 이용했으며 서울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이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신궁은 1912년부터 추진해 1920년 기공식을 가졌고 1925년에 완공했다. 조선신궁이 들어서 남산은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싼 도성사산(都城四山)의 하나로 엄격히 관리되던 곳으로 국사당(國師堂)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일제는 조선신궁 건립을 위해 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을 허물고 남산식물원 일대의 서쪽 산허리를 깎아내어 그 자리에 조선신궁을 세워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했다. ▲ 남대문에서 바라다 본 조선신궁

1915년 8월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을 만들어 조선내의 모든 신사를 관리감독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이미 조선 내에 건립된 신사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사실은 이미 1905년(명치39년) 대구신사가 건립되는 등 각지에 신사가 속속 들어서게 되자 이를 종합적으로 관리할 필요를 느껴 1915년 '신사사원규칙'에 이어 1917년 '신사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종합관리에 들어가게 된것이다.

뿐만 아니라 1936년 8월에는 신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을 발표하고 황민화정책의 상징으로서 신사제도를 행정구역별로 완전히 재정비하여 1면(面) 1신사(神社) 설치를 원칙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신사를 만들어 갔는데 1936년에 524개소 였던 것이 1945년에는 전국에 1,062개로 급증했다. <황국화의 상징 조선의 신사(神社)> 연재를 통해 조선 땅에 세웠던 침략신사의 실상을 밝히고 음흉한 식민지 침탈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참고>

신사(神社)에는 사격(社格)이 있는데 이를 사격제도(社格制度)라한다. 사격제도가 완성된것은 명치정부 출범이후 4년만인 1871년 5월 4일로 이때 일본의 근대사격제도(近代社格制度)가 완성된다. 명치정부는 태정관포고(太政官布告)를 공포를 통해 일본 전국의 신사를 크게 크게 국가가 관리하는 관사(官社)와 기타 제사(諸社)로 구분하고 관사 97개를 별격(列格)으로 관리하게 된다.

관사에는 다시 관폐(官幣) 대중소사(大中小社)와 국폐(国幣)대중소사가 있는데 관폐사(官幣社)는 국가에서 관리하고 국폐사(国幣社) 지방관이 제사를 담당하게 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혼동하게 되는 것이 있는데 국폐사(国幣社)가 마치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처럼 여기게 되는데 여기서 국(國)이란 과거 일본의 행정관서가 쿠니(國)였던 시절에서 나온 말이다. 일본의 신사제도(神社制度)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지만 앞으로 연재 시에 관폐대사니 또는 국폐소사니 하는 말이 나올 때 국가관리(관폐), 지방관리(국폐)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