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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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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드는 것"

[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 마음산책(113회)] 왜 사냐고 묻거든…

'의미치료'로 유명한 빅터 프랭클

나치 수용소 경험 바탕으로 밝혀

수많은 사람에게 지금까지 영향

육체적으로 강인한 사람보다

살아야 할 의미 알고 있는 사람이

혹독한 환경서 생존 가능성 높아


남으로 창을 내겠소/밭이 한참갈이/괭이로 파고/호미론 풀을 매지요//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강냉이가 익걸랑/함께 와 자셔도 좋소//왜 사냐건//웃지요

이 봄에 이 시가 떠오른 것은 요즘 주위에서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4년 아침에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유대인 수용자가 그 해 3월 30일에 전쟁이 끝나고 자기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철썩 같이 믿었던 3월 29일에 이 수용자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3월 30일에 의식을 잃었고 그 다음날 사망했다. 직접적인 사인은 발진티푸스이었지만 이 사건을 곁에서 목격한 한 정신과 의사는 그가 자신이 철석같이 믿었던 일이 일어나지 않자 ‘희망’을 상실했기 때문에 사망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 정신과 의사가 바로 ‘의미치료(Logotherapy)’로 유명한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 1905~1997)이다. 그와 그의 아내는 1944년 10월 19일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고, 수용소에 도착한 그 날 모든 소지품을 압수당했다. 압수당한 물품 중에는 그가 첫 저서로 출간하려고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초고가 있었다. 그는 결사적으로 그것만은 지키고 싶었지만 결국 무기력하게 압수당한 후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살아야 할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런 고민을 하던 그에게 지급된 이미 죽은 수감자의 옷에 달린 주머니 속에서 히브리 기도서의 찢어진 조각을 발견했다. 그것은 ‘셰마 이스라엘(Shema Yisrael)’의 다음과 같은 기도 내용이었다. “진심으로 네 영혼과 힘을 다하여 너의 주를 사랑하라.” 프랭클은 이 구절을 읽는 즉시 신(神)이 자신에게 계시를 주신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이 쪽지를 통해 신께서 “어떤 고통이나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삶을 긍정하라고 명령하고 계신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는 자기 삶의 가치와 의미가 오로지 원고가 출판되느냐 못되느냐에 달려 있다면 진정 그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인생에는 보다 큰 의미가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 기도문이 들어있는 옷을 지급받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그가 발전시킨 심리치료의 한 방법, 즉 ‘의미치료’를 탄생시키고 강제 수용소라는 혹독한 실험실에서 검증하게 만든 일종의 ‘상징적 소명(召命)’이었다고 나중에 술회하였다.

삶의 의미는 신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삶의 의미를 찾을 때 빛을 발한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삶의 의미는 신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삶의 의미를 찾을 때 빛을 발한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사실 그에게는 이보다 더 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아직 수용소에 수감되기 이전 그는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널리 펴내려고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미국으로 이민 가는 것이었다. 당시 세계 정세가 미국에 이민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그는 가족들과 이민을 가려고 비자 신청을 하였다. 하지만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미국 비자가 기적처럼 나왔다! 하지만 그 조건은 아내만 동반할 수 있는 것이었고 부모는 함께 갈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는 부모를 두고 아내와 이민 가는 것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즉시 부모는 수용소로 옮겨져 죽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인이었으므로 밤마다 유대인 회당에 가서 신께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한 답을 구하였다. 하지만 비자 만료일이 다 되어오는데도 그가 믿는 신의 대답은 주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프랭클은 다시 한 번 온 가족이 갈 수 있도록 비자 신청을 하였다. 처음 비자가 나온 것도 기적 같은 일인데, 두 번째 다시 비자가 나올 확률은 거의 없어보였다. 그 마저도 다시 비자를 받지 못할 위험이 더 큰 일이었다. 다시 한 번 기적이 일어났다. 또 비자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부모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회당에 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신께 답을 구하는 기도를 했지만 좀처럼 신의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아버지의 방에 들어간 그는 책상 위에 전에는 없던 돌조각이 있는 것을 보았다. 폭격으로 깨어져버린 유대교 회당 입구에 세워져있던 십계명 조각을 아버지가 주워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돌조각에는 글자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그 숫자는 ‘5’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을 뜻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안 그는 즉시 이것이 신이 자신에게 준 답이라고 믿고 미국에 이민 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신혼의 아내와 다른 가족들과 함께 수용소에 끌려갔다. 그리고 아내는 물론 어머니와 남동생은 수용소에서 사망하였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있을 수 없다지만, 만약 그가 아내와 미국으로 이민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도움을 주는 ‘의미치료’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의 이론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가 단지 연구실이나 진료실에서 얻은 경험을 통한 이론만이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수용소의 삶을 통해 이론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프랭클에 의하면, 사람이 살아가는 궁극적 이유는 ‘의미에의 의지(will to meaning)’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수용소에서 살아나갈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살아야 할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살아남았다. 이 존재 이유를 갖지 못한 사람은 결국 ‘실존적 공허(空虛)’에 빠진다. 이런 공허에 빠진 사람은 그 공허함을 잊기 위해 과도한 성적 활동에 탐닉하거나 부를 축척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결국 허망한 것이라는 걸 깨닫고 우울해지거나 심하면 자살까지 행하게 된다. ‘실존적 공허’는 1960년대에 비해 훨씬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오늘 우리나라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원인이나, ‘요람에서 무덤까지’ 온갖 사회복지제도를 갖추고 있는 ‘복지천국(福祉天國)’이라는 나라들에서 오히려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유를 그는 잘못된 질문을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단지 자신은 아직 그 답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질문이고 자세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질문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즉, 삶이 우리에게 “네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에 우리 자신이 답을 하여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가난한 연인들이 다정하게 손잡고 걷다가 길거리에 늘어선 허름한 가게에서 한 쌍의 싸구려 반지를 사서 나누어 끼었다. 이 반지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지를 들여다보며 아무리 반지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해도 ‘싸구려 반지’라는 것밖에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반지를 두 사람의 ‘사랑의 징표’라고 여긴다면 반지의 의미가 180도 달라진다. 이제는 언제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하찮은 싸구려 반지가 아니라, 두 사람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보물이 된다. 그리고 이 반지는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싸구려 반지를 보물로 만든 것은 두 사람이 ‘사랑의 징표’라는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프랭클에 의하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삶이라도 어느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하찮은 것이 되기도 하고,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 되기도 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이미 있는 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meaning-finding),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meaning-making). 그는 깨어진 십계명의 돌조각에 자신이 믿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다시 말하면 돌조각 자체가 신의 계시가 아니라 빅터 프랭클 자신이 그 돌조각에 신의 계시라는 의미를 만든 것이다. 후에 한 기자가 이 에피소드를 예로 들면서 너무 작위적인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했다. 그 때 그는 “맞습니다. 의미는 작위적으로 각자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즉 열 사람이 각각 다르게 그 돌조각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미는 각자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
한성열 고려대 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