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미국 재무부를 이끄는 스콧 베센트(Scott Bessent) 장관과 차기 연준 의장으로 지명되어 통화정책의 대전환을 예고한 케빈 워시(Kevin Warsh)는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양대 축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사람이 모두 드러켄밀러라는 거대한 뿌리에서 뻗어 나온 ‘직계 제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월가에서는 이 세 사람의 관계를 단순한 정책적 동반자가 아닌, 경제적 사상과 투자 철학을 공유하는 완벽한 사제(師弟) 관계로 규정한다. 드러켄밀러가 수십 년간 다져온 거시경제관, 이른바 ‘드러코노믹스(Drunkenomics)’가 미국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핵심 가이드라인으로 전면에 부상한 셈이다. 장막 뒤에 숨은 이 전설적인 투자자의 정체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스탠리 프리먼 드러켄밀러는 1953년 6월 14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 시절은 평범했으나 학업 성적은 우수했다. 명문 리버럴 아츠 칼리지인 보든 대학교(Bowdoin College)에 진학하여 영문학과 경제학을 복수전공하며 거시적인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길렀다. 대학 졸업 후 그는 학문적 깊이를 더하기 위해 명문 아이비리그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UPenn) 경제학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그러나 상아탑 안의 박제된 경제 이론은 시장의 역동성을 담아내지 못했다. 드러켄밀러는 복잡한 수식과 가설로 가득 찬 칠판보다 실시간으로 살아 움직이는 주가 전광판과 경제 지표의 상호작용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진로를 놓고 방황하던 그는 박사 과정을 과감히 자퇴하고 실전 금융 시장인 월가에 투신했다. 학위를 포기한 이 결단은 그를 상아탑의 교수가 아닌, 역사상 가장 위대한 트레이더로 이끈 첫 번째 변곡점이었다.
1977년 피츠버그 내셔널 은행(Pittsburgh National Bank)의 석유 담당 애널리스트로 입사하면서 드러켄밀러의 금융 커리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의 천재성은 첫 직장에서부터 폭발했다. 당시 20대 중반에 불과했던 그는 탁월한 리서치 능력과 거시경제적 직관을 인정받아 입사 1년 만에 리서치 부문장으로 초고속 승진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은행이라는 조직의 틀이 자신의 투자 야성을 담기에 너무 좁다고 판단한 드러켄밀러는 1981년 자신의 첫 헤지펀드 운용사인 ‘듀케인 캐피털 매니지먼트(Duquesne Capital Management)’를 설립했다. 듀케인 캐피털을 운용하며 그는 주식, 채권, 통화, 원자재 등 전 세계 모든 자산군을 대상으로 거시경제 흐름에 베팅하는 '글로벌 매크로' 전략을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다.
그 당시 영국은 유럽통합환율메커니즘(ERM)에 묶여 자국 경제 체력에 비해 고평가된 파운드화 가치를 억지로 유지하고 있었다. 드러켄밀러는 영국의 높은 실업률과 경기 침체 상황을 고려할 때, 영국 중앙은행(BoE)이 파운드화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금리를 무한정 올릴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간파했다.드러켄밀러는 소로스에게 "이것은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이며, 판돈을 무조건 최대로 키워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소로스는 제자의 직관을 신뢰했고, 퀀텀 펀드는 100억 달러가 넘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파운드화 공매도 폭탄을 투하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백기를 들고 ERM 탈퇴를 선언했으며, 드러켄밀러는 단 일주일 만에 10억 달러(약 1조 원) 이상의 막대한 수익을 올리며 영국 중앙은행을 무릎 꿇렸다. 이 사건으로 그는 월가를 넘어 전 세계 금융계를 뒤흔든 거물로 우뚝 섰다.
드러켄밀러가 리버모어나 소로스 같은 다른 천재 투자자들보다 한 단계 더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극단적인 '안정성'에 있다. 그는 1981년부터 2010년 펀드를 공식 폐쇄할 때까지 30년 동안 단 한 해도 마이너스(손실) 수익률을 기록하지 않았다. 1987년의 블랙 먼데이, 2000년 닷컴 버블 붕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수많은 자산가들이 파산했던 역사적 폭락장 속에서도 그는 매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연평균 30.4%라는 경이적인 누적 수익률을 기록했다. 복리의 마법을 감안할 때 30년간 매년 30%의 수익을 올렸다는 것은 자산이 수천 배로 불어났음을 의미한다. 그의 직속 부하였던 스콧 베센트는 드러켄밀러를 향해 "짐 로저스의 철저한 거시경제 분석 능력과 조지 소로스의 과감한 트레이딩 본능을 완벽하게 결합한 결점 없는 돈 버는 기계"라고 극찬한 바 있다.
2010년 드러켄밀러는 "고객의 돈을 지켜야 한다는 극심한 정신적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펀드를 폐쇄하고 고객 자금을 전액 반환했다. 이후 2011년부터 자신의 개인 자산만을 운용하는 '듀케인 패밀리 오피스'를 설립해 조용히 야인으로 지내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시장이 아닌 '인사(人事)'를 통해 워싱턴 경제 권력의 핵심부로 침투했다.
미국의 재정을 총괄하는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은 드러켄밀러의 오랜 직속 부하였다. 1990년대 초 조지 소로스가 베센트를 인재로 영입할 때 결정적인 추천을 한 인물이 드러켄밀러였다. 베센트는 1992년 파운드화 공매도 당시 드러켄밀러의 핵심 분석가로 활동하며 스승의 매크로 투자 기법을 전수받았다. 두 사람은 자산 운용의 철학뿐만 아니라 미국의 방만한 재정 적자를 치유해야 한다는 정책적 신념까지 완벽하게 공유하고 있다. 제17대 연준 의장으로 오른 케빈 워시 역시 드러켄밀러의 심복이다. 워시가 2011년 연준 이사직에서 물러났을 때, 드러켄밀러는 그를 듀케인 패밀리 오피스의 핵심 파트너로 전격 영입했다. 워시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드러켄밀러와 매일 수차례 전화를 주고받으며 글로벌 경제 쟁점을 토론했다.
케빈 워시의 스승인 스탠리 드러켄밀러는 자신의 패밀리 오피스를 통해 쿠팡 상장 전후로 수백만 주 이상의 주식을 매입하며 핵심 주주로 참여했다. 이들은 사적인 신뢰를 넘어 실제 글로벌 비즈니스와 투자 영역에서도 긴밀한 이해관계를 함께 공유해 온 거대한 연공 공동체인 셈이다. 스탠리 드러켄밀러는 포브스 기준 80억 달러의 순자산을 보유한 자산가이다. 2020년대 들어 비트코인의 내재 가치를 선제적으로 인정하고 엔비디아와 마이크로소프트 등 AI 반도체 초격차 기업들에 과감히 투자해 여전한 감각을 증명하고 있다.
뉴욕증시 시장은 드러켄밀러라는 거물이 장막 뒤에서 정신적 멘토로 버티고, 그의 두 제자인 베센트와 워시가 각각 미국의 재정과 통화 사령탑을 맡아 이끌어갈 미국의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에 주목한다. 외신들은 이를 드러켄밀러의 성을 딴 ‘드러코노믹스(Drukenomics)’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들이 공유하는 경제학의 핵심은 명확하다. 정부의 과도한 부채와 재정적자를 과감히 개혁하되, 통화정책에 있어서는 교조적인 매파나 비둘기파에 갇히지 않고 철저하게 시장의 데이터와 기업들의 실적을 바탕으로 유연하게 대처하는 실용주의적 접근이다.
미국 연준의 금리정책과 통화 유동성 공급의 막후 실세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제 시장은 주저 없이 스탠리 드러켄밀러의 이름을 가리킨다. 그의 사상과 직관이 제자들의 손을 거쳐 어떻게 현실 정책으로 구현될지, 그리고 그것이 글로벌 금융 시장에 어떤 지각변동을 몰고 올지 세계 경제계가 긴장감 속에 주시하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