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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이코노믹 독서편지] '중국인 거리'와 왜곡된 여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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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이코노믹 독서편지] '중국인 거리'와 왜곡된 여성성

[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331)] 중국인 거리
[글로벌이코노믹 이동구 광성고 교사] 1959년 차이나타운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에서 주목했던 부분은 여성에 대한 인식과 묘사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타자화 된, 남성 위주의 사회 속에서 왜곡된 여성성을 강요당하며 살아온 여성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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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경을 치르지 않은 9살 소녀의 눈에 비친 세상 속 여성들의 삶의 모습은 매우 위태롭고 불안하며 그 끝은 모두 부정적이고 또 비극적이다. 작가 오정희는 이 소설에서 남성 위주의 사회 속에서 성장통을 겪으며 여성이 되어 가던 한 소녀의 눈을 통해 이른바 1960년대 당시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며 그 가운데 여성으로 성장하던 한 소녀의 불안한 내면 심리를 드러내고자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난 커서 양갈보가 될 테야, 매기 언니가 목걸이도 구두도 옷도 다 준 댔어. (중략) 유리 목걸이에 햇빛이 갖가지 빛깔로 쟁강쟁강 튀었다. 그 중 한 알을 입술에 물며 치옥이가 말했다. 난 양갈보가 될 거야.

치옥이와 함께 매기 언니의 방에서 화장품과 옷을 구경하고 술을 몰래 마시는 장면 끝에 치옥이는 ‘난 커서 양갈보가 될 테야.’라고 말한다. 이 소설이 성장 후의 글쓴이가 과거를 회상하며 쓴 글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양갈보가 꿈이라는 치옥의 말이 갖고 있는 내포적 의미, 물론 치옥이는 나이가 어리므로 그 말이 갖고 있는 비극과 슬픔의 무게를 다 알지 못하겠지만, 9살 소녀의 입에서 ‘양갈보가 꿈’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왜곡된 여성성을 확인할 수 있다. 매춘에 대한 인식이 어린 소녀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좋은 옷과 화장품과 구두를 살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절실함’이 ‘매춘 행위가 갖는 부도덕성’을 쉽게 누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1960년대의 여성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소설이 단순히 성장소설만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는 성장소설이라는 표면 아래에 ‘여성으로서의 삶’이라는 이면의 주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남성에 비해 여성은 성장 과정에서 신체적 통과제의 이외에도 수많은 정신적·사회적 난관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9살 소녀의 눈에 보인 여성으로서의 삶은 온통 비극 투성이다. 커서 양갈보가 되겠다는 꿈을 단호한 어조로 밝히는 또래 친구 치옥이, 매춘을 하며 혼혈아 제니를 낳고 흑인 병사와 동거하던 중 비극적 죽음을 맞게 된 매기 언니, 평생 수절하며 살아온 할머니가 끝내 치매에 걸려 쓸쓸하게 돌아가시는 모습, 아이를 여덟이나 출산하며 생활고에 시달린 채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나’의 어머니. 9살 소녀에게 펼쳐진 세계는 온통 기이함과 호기심 투성이이며 그와 동시에 공포스럽고 비극적이며 경계의 대상이다.

한낮이어도 벽장 속은 한 점의 빛도 들이지 않아 어두웠다. 나는 차라리 죽여 줘라고 부르짖는 어머니의 비명과 언제부터인가 울리기 시작한 종소리를 들으며 죽음과도 같은 낮잠에 빠져들어 갔다. 내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머니는 지독한 난산이었지만 여덟 번째 아이를 밀어내었다. 어두운 벽장 속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절망감과 막막함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리고 옷 속에 손을 넣어 거미줄처럼 온몸을 끈끈하게 쥐고 있는 후덥덥한 열기를, 그 열기의 정체를 찾아내었다. 초조였다.

고통스러운 일곱 번째 출산을 끝내고 다음에 또 임신하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고 있는 가운데 어머니는 또 다시 여덟 번째 출산을 하고 있다. 어머니의 여덟 번째 출산의 비명을 들으며 ‘나’는 벽장 속으로 숨어버리고 거기서 잠이 든다.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초경을 치르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소설은 여성으로서의 삶에 진입하게 된 소녀의 정신적 불안감과 공황의 상태를 ‘중국인 거리’라는 이국적 배경과 해인초 끓이는 냄새의 지독함을 통해서 풀어내고 있다. 9살 소녀가 바라보는 당시 한국 사회의 ‘여성의 삶’이 갖는 그 왜곡된 모습이 얼마나 지독한 비극인지를 이 소설을 읽으면 느낄 수 있다.

/글로벌이코노믹 이동구 광성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