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음악을 알기 위해서는 불가리아에 대한 사전적 기본 상식이 필요하다. 불가리아 공화국은 대통령제이며, 720여만 명(2015년 통계)의 인구를 가진 나라이다. 불가리아 국기는 가로 세로 비율 5:3에 백색(자유와 평화), 녹색(삼림), 적색(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피)의 삼색기로 불가리아를 상징한다. 1879년 처음 국기가 제정된 이래, 1990년부터 지금까지 원래의 하얀색 줄 무니 왼편의 국장이 제거된 국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 국기 아래 알렉산더 네프스키 대성당같이 우뚝 선 세계적 음악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국민의 대부분이 불가리아 정교회를 믿고, 터키계 이슬람교도가 10%를 상회한다. 불가리아는 1999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28개 주(오블라스트)와 264개 시(市,옵슈티나)로 나뉜다. 나는 불가리아어를 쓰는 이곳에서 지휘를 하는 유일한 한국인이다. 불가리아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으로서 북한과는 1948년, 한국과는 1990년 3월 23일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서울에서 열린 1988년 하계 올림픽, 불가리아는 186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였다. 불가리아 군대는 모병제이고, 불가리아에는 삼성물산, LG전자, 대우, 현대중공업, ㈜아이피에스 등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다. 소피아에는 마케도니아 공화국 외교업무도 겸임하는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모두 123명의 한국인이 불가리아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
[이영칠의 음악기행(2)] 불가리아 편 ②불가리아 음악가들…요구르트처럼 튼실한 세계음악계의 든든한 버팀목
불가리아는 동쪽으로 햇살 좋은 해안선이 길게 늘어선 흑해, 서쪽으로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가 있다. 동남쪽은 터키이고 서남쪽은 그리스이다. 북쪽에는 '도나우 평원'이 있고, 국경의 대부분을 흐르는 도나우 강이 루마니아와 경계한다. 평원의 2/3는 해발 210m보다 낮으며, 해발 600m를 넘는 곳이 드물다. 장수 벨트에 살고 있는 셈이다. 구릉지대의 비옥한 저지대는 남쪽으로 갈수록 산악 지대로 바뀐다. 유럽과 발칸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한 불가리아는 인접국가와 서로를 이해하지만, 때론 분쟁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겨울평균기온은 영하 1℃, 여름평균기온은 약 21℃이며, 강수량은 계절에 따른 차이가 거의 없어 연평균 1200㎜ 이상인 고지대를 제외하고는 전 지역에 걸쳐 평균 530∼685㎜가 내리며 북부는 여름, 남부는 겨울에 최대치를 기록한다. 발칸 산맥을 경계로 북부와 북서부에서는 기온의 연교차가 심하지 않은 대륙성 기후가 나타나고(겨울의 추위는 북서부가 북부보다 심함), 남동부 및 메스타 강과 스트루마 강 유역은 여름이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 중부 산악지역과 흑해 연안에는 대륙성과 지중해성 기후의 중간 형태가 나타난다.
국토의 2/5가 경작 가능하며 이 중 1/4에서는 관개농업이 대부분 남동부에서 여름의 건기에 이루어진다. 국토의 약 1/5은 목초지이고, 1/3은 삼림지대이다. 중부 유럽의 전형적 자연 식생과 야생생물이 많이 분포하며 북극 및 알프스의 특성이 섞인 고산성 생물도 나타난다. 1980년대 초 남쪽 스레드나 산맥에서 대규모 구리 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불가리아에는 풍부한 철광석과 갈탄이 매장되어 있다. 이밖에도 납·아연·망간 등이 생산된다.
불가리아공화국은 유엔 회원국, 유럽연합 회원국,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으로 슬라브어권, 터키어권의 국가로 분류된다. 불가리아 민족의 저력을 지켜준 불가리아 요리는 남유럽 요리의 대표격이다. 따뜻하고 지리적 특성도 다양한 국가이기 때문에 지역마다 나는 야채나 허브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야채가 많이 나다보니 샐러드는 식사 때마다 먹으며 유제품이 많이 생산된다. 포도주나 라키아, 마스티카, 멘타 등의 주류가 많다. 뜨겁거나 차가운 스프도 많으며 찬 수프의 대표는 타라토르가 있다. 불가리아에서는 후식류도 많이 발달된 편이며 바니스타라는 것이 있다.
국제적 명성의 불가리아 출신 음악가를 몇 명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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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틀린 루세브는 1976년 불가리아의 루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로부터 음악을 배우기 시작하여 1991년 파리 국립고등음악원(CNSMDP)에 입학하여 제라르 풀레, 데비 에를리, 장자크 칸토로프를 사사하였다. 1994년에는 만장일치로 바이올린과 실내악 부문의 최고상을 받고 졸업하였다. 2000년 칸느 미뎀 페스티벌에서 ADAMI의 “올해의 발견”으로 꼽혔으며, 2001년 Natexis-Banques Populaires 재단의 후원을 받는 음악가로 선정되었다.
현재 정명훈이 이끄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악장을 맡고 있으며, 런던 심포니의 객원 악장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스베틀린 루세브는 인디애너폴리스 국제 콩쿠르, 멜버른의 롱 티보 콩쿠르 등에서 입상하였으며, 2001년에는 일본 센다이 국제 콩쿠르에서 1등상, 특별관객상, 최고의 바흐 협주곡 해석에 주는 특별상 등을 수상하였다.
솔로이스트로서 레온 플라이셔, 예후디 메뉴인, 정명훈, 유조 토야마, 마렉 야노프스키, 레이먼드 레파드 등과 호흡을 맞추었으며,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외에 오베르뉴 오케스트라, 브르타뉴 오케스트라, 인디애나폴리스 심포니, 몬테비데오 필하모닉, 불가리아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다.
라디오 프랑스 몽펠리에 페스티벌, 쉴리 쉬르 루아르 페스티벌, 쿠모 페스티벌, 라로크 당테롱 등 많은 페스티벌에 정명훈, 에릭 르사쥬, 폴 메이어, 자비에 필립스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탱기시모라는 밴드와 탱고 레퍼토리를 연주하기도 하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트리오의 일원이기도 한 스베틀린은 피아니스트 엘레나 로자노바와 함께 판초 블라디게로프의 작품을 녹음하였다.
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의 『장송 협주곡』을 오베르뉴 오케스트라와 녹음하였고, 프랑스-벨기에 악파의 음악들을 최근에 녹음하였다. 불가리아에서 2006년 “올해의 아티스트”로 꼽힌 그는 2007년 불가리아 문화성으로부터 크리스탈 리라를 받았다. 그는 2008년 장자크 칸토로프의 뒤를 이어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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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지휘자 에밀 타바코프는 유럽, 북미, 남미, 아시아,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에 걸쳐 수많은 오케스트라의 객원지휘자로 초청되어 활동하였다. 오케스트라뿐 아니라 오페라 지휘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타바코프는 라 페니체, 레지오토리노,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프랑스 라디오 오케스트라 등에서 오페라를 지휘하였다.
타바코프의 레파토리는 고전시대부터 낭만, 그리고 현대음악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곡으로 넘쳐난다.
그의 녹음 활동 또한 주목할 부문으로 말러 교향곡 전곡, 브람스 교향곡 전곡, 스크랴빈 교향곡 전곡,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 등을 불가리아의 발칸톤, 메가 뮤직, 게가, 미국의 엘란, 독일의 카프리치오 델타, 네덜란드의 펜타곤, 그리고 EMI와 함께 녹음하였다.
지휘자로서의 역량도 뛰어나지만 작곡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타바코프는 현재까지 9개의 교향곡, 다수의 협주곡, 라틴어 가사의 레퀴엠, 그리고 실내악곡, 독주악기를 위한 곡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대다수의 곡들은 여러 국제음악축제와 유명연주가 등의 요청을 받은 위촉곡들이다. 그의 곡들은 낙소스, 게가, 발칸톤 등의 레코드 회사들에 의해 발매되었으며 불가리아, 독일, 포르투갈, 미국, 일본, 프랑스 등에서 자주 연주되고 있다.
불가리아 국립 라디오에 재직하던 1992년, 타바코프는 불가리아 올해의 음악상 수상, 영국 캠브리지 국제 참고문헌학 센터에서 선정하는 1992년 올해의 인물에 후보로 선정, 2009년에는 불가리아 음악가 연합에서 선정한 올해의 음악상 수상, 그리고 2012년에는 캠브리지 국제 참고문헌학 센터에서 선정한 세계 100인의 전문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최근까지 불가리아 국립 라디오심포니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로 활동하였으며, 국내에서는 2013년 교향악축제에서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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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진입하여 미디어의 조명을 가장 화려하게 받는 여성 성악가 중의 한 사람이 베셀리나 카사로바(Vesselina Kasarova)이다. 1965년 스타라 자고라(Stara Zagora) 출생인 그녀는 5살 때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긴 피아노 레슨을 거쳐 소피아 음악원에 입학해서 성악을 전공했다. 음악원 재학시, 불가리아 국립 오페라에 출연할 만큼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었다.
1989년 음악원 졸업 후, 취리히 오페라와 2년간 계약했고, 같은 해에 그터스로흐에서 개최된 '새로운 목소리'라는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991년 모차르트 서거 200주년 기념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의 안니오 역으로 공식 데뷔를 했다. 이 연주의 호평으로 축제기간 중 『돈 죠반니』의 째를리나 역, 『티토왕의 자비』의 쎄스토 역 등 여러 편의 오페라에 출연했다. 최고의 성과는 로시니의 오페라 『탄크레디』에서 주인공을 맡은 것이었다.
1991년 그녀는 빈 국립오페라단에서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로지나 역으로 데뷔했다. 이것을 계기로 쥬네브의 그랜드 극장, 런던의 왕립 오페라, 바르셀로나의 리시우 극장, 베를린 오페라, 바이에른 오페라, 파리 국립 오페라, 시카고 릴릭 오페라,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등 세계 여러 도시의 유명한 오페라 무대로부터 초청 받는 스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오랜 기다림 끝에 베셀리나 카사로바는 2001∼2002년 시즌에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부름을 받았다. 로시니와 모차르트의 여러 오페라의 주역을 맡는 조건이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지금까지 그녀가 노래한 오페라는 『세비야의 이발사』, 마스네의 『베르테르』,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 벨리니의 『텐다의 베아트리체』 등이다.
로시니 전문 메조소프라노로는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던 시절에 신예 카사로바가 등장하면서 오페라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뛰어난 미모와 빼어난 가창력, 능숙한 연기력을 겸비한 스타’를 기다려온 오페라계에 압도적 장악력을 보여주는 혜성이 등장한 것이다. 그라모폰지(誌)는 카사로바의 음악을 ‘전설적인 소질’이라고 극찬했다.
그녀는 도니제티의 『라 파보리타』(La Favoriter), ‘슈베르트, 브람스, 슈만’의 가곡, 마스네의 『베르테르』(Werther), 로시니의 ‘아리아와 이중창’, 벨리니의 『카플랫과 몬테키』(I CAPULETI E I MONTECCHI), 모차르트의 ‘아리아’, 베셀리나 카사로바의 ‘초상’(A Portrait), 로시니의 『탄크레디』(TANCREDI), 베셀리나 카사로바의 ‘베를리오즈, 라벨, 쇼송’ 노래모음집 등을 비롯한 주옥같은 목소리의 앨범을 발표했다. 유튜브 검색을 통해서도 그녀의 목소리를 직접 감상할 수 있다. 그녀는 2014년 통영국제음악제의 상주음악가로 선정된바 있다.
[이영칠의 음악기행(2)] 불가리아 편 ②불가리아 음악가들…요구르트처럼 튼실한 세계음악계의 든든한 버팀목
보리스 크리스토프(Boris Christoff, 1914-1993)는 20세기 불가리아의 가장 위대한 베이스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학교 교사인 아버지와 러시아계 어머니의 아들로 소피아에서 태어났다. 크리스토프는 일찍이 가창의 재능을 보여, 소년 시절에 소피아의 알렉산더 네프스키 대성당의 합창단에 합류했다.
1930년대에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사법 관계의 직장에서 일했지만 여가 시간에는 소피아 구스라 합창단에서 노래를 계속하고 1940년에는 동 합창단의 솔로이스트로서 성공을 거둔다. 정부의 허가를 얻어 1942년에 출국해 로마에서 유명한 바리톤 리카르도 스트라차리( Riccardo Stracciari)에게 사사, 2년간 이탈리아 오페라의 베이스 레퍼토리를 배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크리스토프는 오스트리아로 피난해, 이곳에서 오페라 출연과 공연 등을 실시했지만, 종전 직전의 혼란에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석방된 1945년 연말에 로마로 귀환, 다시 스트라차리의 아래에서 연구를 쌓는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무대 데뷔는 1946년, 푸치니의 『라보엠』의 콜리네 역으로 했다.
곧 국제적 활약을 시작했고, 1947년부터는 밀라노 스칼라, 1949년부터 런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및 리우 데 자이네루에서 출연하는 등 유럽 및 남미의 주요 오페라 무대에서 맹활약했다. 1950년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초대되었지만, 소련의 세력 하에 있는 국가에서 미국 입국을 제한하는 당시 미국법에 의해 입국이 거절된다. 입국 제한이 완화된 후 1956년에 크리스토프는 드디어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데뷔하였고, 시카고 오페라에서도 자주 노래를 불렀는데, 메트로폴리탄에서 초청은 평생 계속 거부되었다.
1964년에 뇌종양 수술을 받고 이듬해에는 활동에 복귀하지만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게 되었다.
1967년에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위해 1945년 이후 처음으로 고국 불가리아에 입국이 허용되었다. 그 후에도 종종 인상적인 무대를 맡아 공식적인 은퇴는 1986년 6월22일 로마의 성 체칠리아 음악원에서의 리사이틀, 1993년에 로마에서 사망한 후 유해는 소피아에 옮겨져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에서 국장급으로 장례식이 엄수되었다.
[이영칠의 음악기행(2)] 불가리아 편 ②불가리아 음악가들…요구르트처럼 튼실한 세계음악계의 든든한 버팀목
큰 성량, 인상적인 음색과 무대 매너, 강력한 극적 표현에 뛰어난 크리스토프는 샬랴핀 같은 위대한 슬라브계 베이스 가수의 계보에 늘어서는 정당한 후계자로 간주되었다. 오페라의 레퍼토리는 러시아 오페라와 베르디의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가곡에서도 정교한 표현을 들려주었다. 대표적인 역할로는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이반 뇌제』, 보로딘의 『이고르 공』의 타이틀 롤, 베르디의 『돈 카를로』 의 필리포 2세 역을 들 수 있다.
21세기의 초반부 10년 안의 나의 불가리아에서의 지휘의 기억, 평원에서 봄바람이 불어오거나, 함박눈이 대지를 삼킬 듯이 내려도 함께했던 아카데믹 심포니 오케스트라 객원지휘, 플레벤 시립 교향악단 객원지휘(플레벤), 플로브디프 시립교향악단 지휘, 소피아 국립 교향악단 지휘(소피아), 부르가스 시립교향악단 지휘(부르가스)는 열정과 모색의 시간이 되었다.
불가리아의 음악가들은 발칸반도가 갖는 태생적 열정으로 도나우 강의 평온과 거친 물결을 잠재운 흑해의 포용력, 기름진 들판에서 수확한 재료들로 조리된 음식들로 유연함을 습득하고, 섬세한 음악을 빚어냄으로써 내적 안정을 얻어 내었다. 그들은 음악이 늘 평화를 가져다주기를 기원한다. 나는 그들의 음악과 어울리면서 차츰 자신이 다듬어지고 성숙해짐을 느낀다.
이영칠 불가리아 소피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종신 객원지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