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단풍의 초절정은 11월 초다. 매년 11월 첫 번째 토요일에는 학생들이나 지인들을 인솔하고 창덕궁이나 사대문 안 답사를 했다. 올해는 덕수궁에서 시작했다. 덕수궁에서 제일 큰 한식 건물은 중화전이다. 이 건물의 이름을 왜 ‘중화전’으로 지었을까? 그리고 덕수궁은? 대한제국시대 당시에는 고종 황제가 사는 궁궐의 이름은 경운궁이었는데, 고종이 퇴위된 1907년에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덕수궁(德壽宮)’은 ‘덕을 베풀고 만수무강하라’는 염원을 담은 이름이다. 임금의 궁인 경운궁으로부터 일종의 상왕의 궁으로 그 격을 내린 것이다. 원래로 돌아가서 ‘경운궁’을 되살리는 것도 검토해봄 직하다. 비록 나약했을지라도 국운의 회복을 위해 부단히 움직였던 대한제국의 정궁 이름으로.
'중화(中和)'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바르며 조화로운 상태'를 뜻하며, 《중용(中庸)》에서 유래한 말이다. 구한말 조선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풍전등화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을미사변이라는 치욕적인 참화를 겪으면서 조선의 외교 노선은 분명해졌다. 서구 제국의 힘을 빌려 일본을 밀어내고자 했다. 이 상황은 도시 공간에 명확히 나타난다. 황급히 아관파천이 있었다. 러시아는 친일적이지 않았고, 러시아공사관도 높은 고지대에 위치하여 방어에 유리했다. 1년 후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비해 매우 작은 규모인 경운궁으로 환어(還御)했다. 1897년 당시 경운궁 주변에는 영국공사관, 미국공사관, 프랑스공사관, 러시아공사관, 이탈리아공사관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운궁 북측에는 영국공사관이, 서측에는 미국공사관이, 남측에는 독일공사관이 접하고 있었다. 이들 공사관 사이의 공간에 자리 잡았다. 고종은 이들 국가 중에서 한 국가에 치우치지 않고 바르며 서로 조화로운 상태이기를 바랐다. ‘중화전(中和殿)’에는 이러한 대한제국의 이념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속세에서 ‘중(용)’의 가치관이 사라진 지 오래다. 안타깝다. “우리 백이 옳다”, “너희는 악이야!” 싸우고 있다. 극단적 흑백논리와 전투적 팬덤 정치로 인해 회색 영역은 그 존재 자리 자체를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동양화의 미덕이 회색과 여백에 있듯이, 회색은 그림자와 같이 오히려 흑백의 존재를 입체적으로 더욱 부각시켜 줄 수 있다. 회색 지대에 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다.
이영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지속가능과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