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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의 'MELTING', 빙하의 무너져 내림과 풍경의 아름다움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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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의 'MELTING', 빙하의 무너져 내림과 풍경의 아름다움 사이

백연 안무·연출·예술감독 창작발레
백연 안무의 MELTING, 202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이미지 확대보기
백연 안무의 MELTING, 202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빙하의 의미를 사유한다. 빙하는 계절의 문법을 거부한 채, 시간의 외부에서 반짝이는 푸른 사유로 서 있다. 그 속은 보이지 않게 갈라져 날마다 물이 되어 흘러가고, 부딪치고 뒤집히는 운동 속에서도 자신의 붕괴를 통계처럼 축적한다. 망원경을 든 이방인들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그것을 빙하의 재주로 번역했지만, 무수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몇몇은 그 푸른 균열에서 새어 나오는 통곡을 듣기 시작했다. 빙하가 가장 아름다웠던 때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던 밤, 별빛과 달빛을 홀로 받던 고요의 순간이었으며, 오늘도 빙하는 파랗게 울며 우리를 관찰하는 차가운 현재로 남는다.

창작 발레의 천재 안무가 백연이 대학로예술극장에서 3일간(2월 12일~14일) 세 차례 선보인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MELTING'은 동시대 창작 발레의 정수로 기억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백연발레프로젝트와이 주관,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공동 기획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숭고한 아름다움 이면에 잠재한 처절한 통곡을 다양한 발레 언어와 조명, 무대가 결합한 시각적 효과로 형상화하였다. 얼음과 녹아내림이라는 상징적 모티프로 인간과 자연, 존재와 소멸의 관계를 시적으로 직조하며 미학적 사유의 지평을 확장하였다. 작품은 동시대적 위기의식을 환기했다.

1장 : 우리가 무언가를 창조하는 매 순간, 세계의 에너지 균형은 미세하게 기울어지며 존재의 질서는 보이지 않는 균열을 내포한다. 이 균열은 필연적으로 해체와 붕괴, 무질서로 향하는 운동을 예비하지만, 그 파국의 직전에서야 비로소 가장 아름답고 고요한 형상을 드러낸다. 창조가 곧 소진을 내장한 행위라면, 우리는 그 책임과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하기보다 타자에게 넘겨지는 순환 구조인 ‘전가’의 메커니즘 속으로 그것을 밀어 넣는다. 위기는 폭탄 돌리기처럼 손에서 손으로 이전되며, 미학적 평형은 파열의 순간을 유예하는 긴장 위에서만 아슬아슬하게 지속된다.

영상·조명·레이저가 빚어내는 얼음 동굴의 심미적 공간 속에서 얼음조각가의 행위와 소리까지 무대적 매체로 통합함으로써, 창조의 미학과 감각적 환경을 선취적으로 구성한다. 안내방송 이후 등장하는 마임연기자(류성국)는 얼음덩어리에 불꽃을 지피는 상징적 제스처를 통해 ‘얼음 폭탄’이라는 은유를 제시하고, 전가(轉嫁)의 놀이 구조로 확장된다. 무용수와 관객 사이를 순환하는 폭탄의 이동은 거부와 수용이라는 선택적 상황을 발생시키며, 관객을 공범이자 방관자로 위치시킨다. 얼음의 파열은 전가된 위기가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인간 조건을 드러내며, 유희처럼 전개된 장면은 환경위기를 자각하지 못한 채 반복되는 창조와 소비의 역설을 비판적으로 환기한다.
백연 안무의 MELTING, 202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이미지 확대보기
백연 안무의 MELTING, 202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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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 안무의 MELTING, 202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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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 안무의 MELTING, 202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2장 : 점점 녹아내리는 빙하 앞에 선다는 것은 시간과 파국의 현현을 응시하는 미학적 사건에 참여하는 일이다. 숭고하고도 장엄한 자연의 표면을 향해 우리는 줌을 당기고 또 당기며, 거리의 소거를 통해 대상을 소유하려는 시선을 강화하지만, 그 확대의 과정은 오히려 응시의 비대칭성을 드러낸다. 카메라의 초점 끝에서 마주한 빙하의 눈빛은 대상의 침묵을 전제하지 않고, 녹아내리는 물결 속에서 시선의 주체를 전도시키는 힘으로 작동한다. 그 눈빛이 흘러내려 나를 바라봄은 서로를 침식하는 상호 침투의 장이 되며, 미학은 관찰의 권력을 해체하는 자리로 전환된다.

깨진 얼음조각이 크루즈 위에 재배치되고 김재덕의 'Hello snow-Beautiful day'가 흐르는 가운데, 미화된 풍경과 균열의 잔해를 병치함으로써 ‘바라봄’의 미학을 구성한다. 객석에 남은 무용수가 흰 패딩을 덧입어 빙하의 형상을 구현하고 이를 벗기고 덮어주는 반복 행위로 객석을 서사 전개의 능동적 장치로 전환한다. 실시간 카메라는 자연을 상징하던 존재가 감시와 재현의 시선 속에서 대상화되어 왔음을 폭로하고, 매서운 응시는 응답 없는 관람의 태도를 전복한다. 이어 이승민의 'Sonar'와 김재덕의 'Undercover'에 맞춘 군무, 그리고 붉게 맵핑된 삼각 구조물의 하강은 녹아내림의 구조적 필연성과 위기의 경고를 감각적으로 가시화하며 인식 전환의 계기를 마련한다.

3장 : 눈이 마주치면, 억압되어 잠재된 상징적 질서의 균열이 표면으로 부상하는 임계점으로 작동한다. 나는 숨어있는 굉음의 아우성 속에서 숨이 차오른 채 얼어붙지만, 그 정지는 곧 물과 함께 녹아내리는 이중의 운동으로 전환되어 주체의 경계를 유동화한다. 고요와 적막 뒤에서 울려 나오는 빙하 심연의 울음, 에너지의 불균형이 서로를 갈라내는 총성, 발끝의 접촉만으로도 파열되는 폭음은 상징 체계가 자체를 지탱하지 못하는 파국의 징후들이다. 우리의 거센 녹아내림은 경계의 해체를 통한 지향의 운동이며, 상징적 붕괴 속에서 너를 향한 나의 존재 방식은 새롭게 구성된다.

나정운과 이현섭의 듀엣을 통해 망원경이라는 오브제를 매개로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관계를 전복시키며, 빙하가 붕괴하는 효과음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시선 권력을 교차시킨다. 자연을 상징하는 무용수가 망원경을 탈취하는 순간, 응시의 주체는 곧 대상이 되며 이는 타자를 관조해 온 인간 중심적 인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확장된다. 이어 Beethoven의 'Piano Sonata No. 14'와 얼음 파열음이 결합한 트리오(김은정, 강미호, 조현희)는 고전 발레의 조형미 속에 잠재된 비극성과 절규의 정서를 부각한다. 마지막으로 이승민의 'Breath'에 따른 솔로는 신체를 ‘녹아내림’의 현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감각의 전환과 상징적 체험의 심화를 미학적으로 완성한다.

백연 안무의 MELTING, 202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이미지 확대보기
백연 안무의 MELTING, 202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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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 안무의 MELTING, 202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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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 우리는 함께 녹아내리는 존재가 됨으로써 더 이상 고정된 주체로 남지 않고, 감각의 지위를 재배치하는 전환의 국면에 진입한다. 바라보는 자와 바라봄의 대상이라는 위계는 이 순간 해체되며, 응시는 상호 침투적 사건으로 변모한다. 타자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가 대상이 되어보는 경험은 감각의 방향성을 전도시키고, 인식의 중심을 유동화한다. 그리하여 감각의 전환은 단순한 역할 교체가 아니라, 존재가 서로의 내부로 스며들며 새로운 미학적 관계망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주체와 객체의 경계는 진동하는 막(膜)으로 재규정된다.

솔로를 통해 각성한 감각이 군무로 확장되며, 현악기의 질감 위에 신체의 조형적 배열을 중첩해 ‘녹아내림’을 집단적 운동의 구조로 가시화한다. 후반부에 비발디의 ‘사계’ 여름 3악장을 이승민이 편곡한 음악으로 역동적 에너지는 파급되고, 바닥에 투사된 빙하의 영상은 쓰나미처럼 확장되어 위기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무용수들이 관객을 응시하며 무대로 진입하는 장면은 1장의 참여 구조와 호응하여 관객을 공감적 행위자로 전환한다. 전반부에 이어 다시 울려 퍼지는 'Hello snow-Beautiful day'는 평온한 감각 속으로 복귀한다. 마임연기자가 얼음 체험을 권유하는 행위와 함께 크루즈 위로 쏟아지는 얼음, 하강하는 삼각 구조물, 붕괴의 음향은 선택의 윤리를 관객에게 남긴다.

거대 상상력이 빙하에 착근하자, 서사는 그 상상의 떨림에서부터 종결의 여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움직임을 파생시킨다. 그 움직임의 총체적 귀결로서 빛은 장엄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소지한 채 현현한다. 해빙의 아침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까닭은 얼어붙은 시간의 층위가 서서히 녹아내리며 드러내는 생성과 소멸의 교차점이 우리 감각을 흔들기 때문이며, 예술이 포착한 존재의 진동과 맞닿아 있다. 이 사연을 깊이 사유한 안무가의 혜안을 존중하며, 사흘간의 대장정을 완수한 성취를 축하하고, 이제 해외 장기 투어라는 미학적 항해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기를 응원한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옥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