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 가공식품과 전쟁 선포…업계는 '히드라와의 싸움'
119년 역사 뒤로하고 매각…美 '클린라벨' 규제, 세계로 확산하나
119년 역사 뒤로하고 매각…美 '클린라벨' 규제, 세계로 확산하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5일(현지시각) 'MAHA(미국을 다시 건강하게)'로 불리는 이 정책이 한 기업의 운명을 뒤바꾼 상징적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MAHA는 인공색소나 합성첨가물 등을 식품에서 퇴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켈로그는 그간 지속적인 정치적 압박과 경영난을 겪어왔다.
◇ 7500만 달러 깎인 인수 가격, 'MAHA 위험'의 무게
지난 6월 말, 이탈리아 식품 대기업 페레로의 경영진은 미국 전역을 오가며 중대 결정을 위한 현장 실사에 나섰다. 목표는 공중 보건 논란의 한복판에 선 켈로그의 시리얼 공장들이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보건 수장인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장관이 켈로그의 대표 상품 '후룻룹스'의 인공 색소를 '미국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 독'으로 규정한 뒤였다.
페레로에게 119년 역사의 켈로그 시리얼 사업부 인수는 매력있는 카드였으나, 이는 곧 정치적 지뢰밭에 발을 들이는 것과 같았다. 케네디 장관은 가공식품과의 전쟁을 공언하며 인공 색소 등 첨가물을 사용하는 대기업들을 연일 맹비난하고 있었다.
페레로는 켈로그가 처한 재정·정치적 문제를 인수가격에 반영했다. 최근 증권 신고서를 보면 페레로는 당초 제안가에서 약 7500만 달러(약 1044억 원)를 삭감한 약 31억 달러(약 4조 3186억 원)에 켈로그를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정치 위험이 기업 가치를 수치로 깎아내린 것이다. 페레로는 이미 키블러, 버터핑거 같은 여러 미국 브랜드를 인수한 경험이 있고 유럽의 엄격한 규제에 익숙해, 이번 색소 문제 역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 '히드라'와 싸우는 식품업계, 전방위로 번지는 위기
트럼프 행정부의 MAHA 의제는 이미 소비자 기호 변화로 휘청이는 거대 식품 기업들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미국 전역의 주 정부들이 MAHA 운동에 동참해 특정 식품 판매를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일부는 기업들의 건강 관련 주장에 대한 직접 조사에 나섰다. 연방정부 차원의 통합 규제가 없는 가운데, 기업들은 각 주마다 다른 규제에 대응해야 하는 '파편화 위험'을 맞았다.
업계는 거대한 불확실성 앞에 놓였다. 경영진들은 케네디 장관과 MAHA가 요구하는 정책들이 과연 얼마나 현실화될지, 그것이 수익에 미칠 영향을 계산하느라 분주하다. 건강을 중시하는 정치적 압박과 소비자가 찾는 맛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기업의 숙명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형국이다.
일부 기업은 'MAHA 대응팀'을 꾸리고 논란이 되는 성분 목록과 '히드맵'을 작성하며 원재료 퇴출과 교체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한 업계 임원은 이 처지를 "머리 하나를 자르면 두 개가 솟아나는 신화 속 히드라와의 싸움"에 비유했다. 오레오를 만드는 몬델리즈의 대런 오브라이언 기업·대관 업무 최고 책임자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새로운 규제 제안이 나와 있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지난 6월부터 크래프트 하인즈, 제너럴 밀스, 네슬레 등은 2027년까지 자사 제품에서 인공 색소를 빼겠다고 선언했다. M&M과 스키틀즈로 유명한 마즈 역시 내년부터 일부 제품을 무색소 버전으로 출시할 계획이다. 주요 산업 단체인 미국소비재협회(CBA)는 '통일된 연방 규제'를 마련해달라며 케네디 장관과 직접 회동하는 등 타협안을 찾았지만, 케네디 장관은 오히려 주 단위 규제를 지지하며 업계의 요구를 일축했다.
◇ '시리얼 제왕'의 몰락…정치적 압박의 희생양 되다
한때 '시리얼 시티'로 불리며 미국인의 아침을 책임진 켈로그의 위상은 흔들린 지 오래다. 1906년 설립돼 2차 대전 당시 미군용 전투식량(K-ration)까지 공급한 영광은 빛이 바랬다. 미국인들이 시리얼 대신 요거트, 에너지바 등으로 눈을 돌리고, 최근에는 체중감량 약물 유행과 고가공식품 기피 흐름까지 겹치며 켈로그의 주력 사업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바로 이 약한 고리를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이자 환경·보건 운동가 출신인 케네디 장관과 행동주의자들이 파고들었다. 케네디는 "켈로그가 캐나다에서는 천연 색소를 쓰면서 왜 미국 아이들에게는 인공 색소가 든 제품을 파는가"라고 질책하며 후룻룹스를 MAHA 캠페인의 첫 번째 공격 목표로 삼았다. '푸드 베이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운동가 바니 하리는 230만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동원해 여론을 만들고 의회 청문회와 거리 시위를 주도했다.
이에 필닉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때로는 뉴스에 나오지 않는 편이 낫다"며 공개 반박을 삼갔다. 켈로그 쪽은 "인공 색소는 안전하며 엄격히 규제받고, 소비자 선호도에 따라 시장마다 다른 제품을 제공할 뿐"이라고 해명했다. 사실 켈로그는 2010년대 말에도 인공색소 제거를 시도했지만, 색이 옅어진 제품에 대한 소비자 반응이 좋지 않아 계획을 거둔 적이 있다.
◇ 소비자·투자자도 외면…식품 산업 지각변동 예고
소비자들의 외면은 수치가 증명한다. 닐슨IQ 자료를 보면, 최근 1년간(2025년 8월 기준) 미국 내 시리얼 소비는 1억 9700만 달러(약 2744억 원)나 줄었다. 민텔의 조사에서도 단맛이 강한 시리얼을 먹는 성인 비율은 2023년 39%에서 올해 31%로 떨어졌다.
투자자들의 신뢰 상실은 더욱 심각하다. 포장식품과 육류 업체를 추적하는 S&P 지수는 최근 1년간 16% 하락해, 같은 기간 14% 오른 S&P500 전체 지수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시장이 가공식품 산업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본다는 신호다. 위기감 속에서 올해에만 최소 5개의 대형 식품기업이 CEO를 바꿨다. 최근 10년 동안 가장 잦은 경영진 변동이다.
◇ '미국판 클린라벨' 규제와 산업계 지각변동
켈로그 매각 사태는 MAHA 캠페인이 단순한 색소 논쟁을 넘어 가공식품 산업 전체의 구조를 흔드는 신호탄임을 드러낸다. MAHA는 사실상 '미국판 식품 클린라벨 규제'로, 앞으로 고가공식품 전반에 대한 규제와 소비자 압력의 물꼬를 튼 것이라는 평가다.
대기업들은 천연 원료를 안정적으로 구하고, 새로운 배합을 위해 생산설비와 공정 장비를 바꾸는 등 막대한 투자를 피할 수 없게 됐다. 단기적인 비용 상승은 어쩔 수 없지만, 페레로의 사례처럼 길게 보면 유럽연합(EU) 같은 국제 규제 흐름과 기준을 맞추는 것이 오히려 위험을 완화하는 전략이 될 수 있다.
물론 천연 색소를 쓴 제품은 기존 제품보다 색감이 덜 화려해 소비자들의 초기 수용성이 변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건강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체중 감량 흐름이 맞물려 시장은 점진적으로 적응할 전망이다. MAHA가 촉발한 변화의 바람은 미국을 넘어 아시아 시장 등 전 세계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세계 가공식품 업계는 앞으로 수년간 규제 대응과 원가 상승이라는 압박 속에서 소비자의 건강 요구를 채워야 하는 거대한 구조적 변화를 맞을 것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