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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트럼프의 뒤늦은 깨달음, '비자 개혁' 없인 제조업 부흥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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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트럼프의 뒤늦은 깨달음, '비자 개혁' 없인 제조업 부흥 없다

트럼프 행정부, 1000억달러 투자 무산 위기에 '비자 개혁' 만지작
TSMC는 '외교'로 풀었는데…현대차는 '하청 리스크'에 발목
지난 12일 미국 조지아 합작공장에 대한 이민 단속으로 구금됐다가 풀려난 한국인 근로자들이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AFP/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지난 12일 미국 조지아 합작공장에 대한 이민 단속으로 구금됐다가 풀려난 한국인 근로자들이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AFP/연합뉴스

미국 제조업 부활을 외치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조지아 합작공장 이민 단속 사태가 불러온 1000억 달러(약 138조 원) 규모의 투자 철회 위기에 부딪히자 뒤늦게 비자 정책 수정을 내비쳤다. UCLA의 크리스토퍼 탕 교수는 16일(현지시각) 배런스 기고문에서 이번 사태가 전기차, 반도체 같은 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국 내 생산 기반을 되살리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추진에 얼마나 큰 허점이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냈다고 분석했다. 이 문제는 미국을 향한 외국인 투자와 제조업의 미래에 중대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5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외국 기업이 미국 노동자를 훈련시키려고 "전문 기술을 가진 인력"을 일시적으로 데려온 뒤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방안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만약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막대한 투자는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며 정책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사실상 미국 노동자들이 자신이 구상하는 대규모 국내 생산 재개에 필요한 기술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이미 때늦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달 초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이 조지아주에 짓고 있는 현대차·LG 합작 공장을 급습해 한국인 기술자 다수를 포함한 475명을 족쇄까지 채워 구금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의 여파로 한국 기업들은 미국에서 추진하던 최소 22개, 총 1000억 달러(약 138조 원)가 넘는 프로젝트를 잠정 보류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해외 생산 이전으로 속이 빈 제조업을 되살리려면 외국인 투자가 절실한데도 스스로 발등을 찍은 꼴이다.

구멍 뚫린 비자 제도, 제조업 부활 발목 잡다

이번 사태의 뿌리에는 미국 제조업 현장의 현실을 외면한 경직된 비자 제도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조차 전기차와 반도체 같은 핵심 산업에서 대규모 국내 생산을 다시 시작하는 데 필요한 기술력을 가진 미국인이 부족하다고 인정한 바 있다. 현재 미국 제조업 분야에서 주인을 찾지 못한 일자리는 50만 개에 가깝다.

이런 형편에 외국 기업이 미국에 투자할 때 의존해야 하는 H-1B(전문직 취업) 비자 프로그램은 한 해 발급 숫자가 8만 5000개에 묶여 있고, 이마저도 추첨제로 운영하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매우 크다. 서둘러 공장을 짓고 설비를 깔아야 하는 현대차 같은 기업들은 법의 회색지대인 B1/B2(상용/관광) 비자로 기술 인력을 투입하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 결정이 대규모 단속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단기 기술자를 위한 E-비자 수를 따로 떼어달라고 미국 측에 제안했다. 이는 관세 감면 혜택의 전제 조건이었던 3500억 달러(약 483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이행하기 위한 방안이다.

TSMC의 선제 외교, 현대차의 하청 의존…엇갈린 운명


외국인 기술 인력 운용과 관련해 대만 TSMC의 사례는 현대차와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TSMC는 애리조나 반도체 공장 인력의 절반가량을 현행 E-비자 제도를 활용해 대만 국적자로 채웠다. 미국 노동조합이 비판했지만, TSMC는 숙련된 현지 인력이 부족한 현실에서 이는 공장 가동 초기에 '일시적으로 필요한 조치'라고 설득했다.

특히 TSMC는 비자 신청을 법 테두리 안에서 공정하게 심사하도록 마크 켈리 상원의원(민주당, 애리조나)을 비롯한 미국 정부와 의회 인사들과 미리부터 소통하며 공감대를 만들었다. 반도체 공장 건설의 기술적 복잡성을 설명하고, 외국인 인력 투입이 궁극적으로 미국 직원을 훈련시켜 인력을 현지화하기 위한 과도기 조치라고 설명한 전략이 효과를 본 셈이다.

반면 현대차는 제3자 하청업체를 통해 명백히 부적절한 비자로 외국인을 고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문제를 키웠다. 조지아 공장 단속은 공장 건설 중단이라는 직접 피해는 물론, 한미 두 나라 사이의 심각한 외교 마찰로 번졌다. 이재명 대통령까지 나서 비자 절차를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가 위축될 수 있다고 경고했으며, 정부는 ICE 단속 과정의 잠재적 인권 침해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크리스토퍼 탕 교수는 미국이 제조업에 외국인 투자를 끌어들이고 계속 머무르게 하려면, 외국인 직접 투자 노동력에 관한 더 나은 양자 외교 규약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이런 규약은 미국 기관, 의원, 외국 기업 사이의 조정을 도와 모든 단계의 계약업체가 비자 규정을 지키는지 감독해야 한다. 그는 또 오해를 막고 믿음을 키우기 위해 외국 정부, 투자자들과 투명한 소통 창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려가 공개 논란으로 번지기 전에 문제를 풀려면 외교 노력이 우선되어야 하며, 조용한 감사나 선별 단속, 사전 협의가 공격적인 현장 급습보다 국제 동반자 관계를 지키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짚었다.

이번 현대차 단속은 지나치게 공격적이었고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문제다. 이 사건은 한미 두 나라의 믿음을 해쳤고, 미국 시장 진출을 생각하던 전 세계 기업들에는 투자 위험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은 반가운 첫걸음이지만, 무너진 신뢰를 되찾고 제조업 부문을 다시 세우려면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올바른 정책과 외교 노력이 함께할 때, 비로소 미국은 세계 산업 협력을 위한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투자처로 다시 설 수 있을 것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