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4500억→실제 3500억 달러, 협상 난항…EU·사우디 '6000억'은 투자 아닌 교역 의향…일본도 5500억 달러 대출 중심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우리는 현재 17조 달러 이상이 미국에 투자되고 있다"며 "8개월 만에 17조 달러 이상"이라고 말했다. 이어 "18조 달러(약 2경 5700억 원)를 넘어섰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백악관 집계조차 절반에 그쳐…'8조 8000억 달러'도 과장
백악관 웹사이트는 이번 임기 중 '주요 투자 발표'를 8조 8000억 달러로 집계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17조~18조 달러의 절반 수준이다. CNN이 백악관 목록 상위 10개 항목을 하나씩 살펴본 결과, 8조 8000억 달러조차 크게 부풀린 수치임이 드러났다.
백악관 목록에는 유럽연합(EU) 기업에서 6000억 달러(약 860조 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6000억 달러, 인도에서 5000억 달러(약 716조 원), 카타르에서 1조 2000억 달러(약 1710조 원), 아랍에미리트(UAE)에서 1조 4000억 달러(약 2000조 원), 일본에서 1조 달러(약 1430조 원), 한국에서 4500억 달러(약 644조 원) 등이 포함됐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실제 투자 약속이 아니거나 내용이 불분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8조 8000억 달러 대신 17조 달러를 언급하는 이유와 8조 8000억 달러 수치의 허점에 관한 CNN의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다. 백악관 대변인 쿠시 데사이는 이메일을 통해 "언론이 무의미하고 지엽적인 트집잡기를 하고 있다"며 "대통령이 옳다. 업계 리더들은 미국에서 만들고 고용하려고 수조 달러를 투자하기로 약속했으며, 앞으로 수조 달러가 더 올 것"이라고 밝혔다.
EU·사우디·인도는 투자 아닌 교역 또는 의향
백악관 목록은 'EU 기업'에서 6000억 달러를 투자받는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EU는 이를 단지 민간 투자 '예상치'일 뿐 실제 약속이 아니라고 분명히 했다. EU는 지난해 8월 트럼프 행정부와 공동 성명에서 "유럽 기업들은 2028년까지 전략 부문에서 미국에 추가로 6000억 달러를 투자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표현을 썼다.
미시간대학교 경제학과 저스틴 울퍼스 교수는 지난해 8월 인터뷰에서 "'예상된다'는 것은 약속이 아니다. 약속은 없다"고 지적했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세실리아 말름스트룀 선임연구원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민간 기업이 미국에 어떻게 투자하라고 명령하거나 결정할 수 없다"며 "제시된 수치는 기업들이 앞으로 몇 년간 투자할 계획이라고 말한 것을 추정한 것일 뿐 법에 따른 구속력이 없다"고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 6000억 달러도 '투자'가 아닌 4년간 '투자와 교역'을 합친 '의향'으로 공개됐다. 아랍걸프국가연구소 팀 캘런 방문연구원은 "만약 이번 대통령 임기 중 이뤄진다면, 연평균 1500억 달러(약 215조 원)는 사우디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14%, 연간 수출 수익의 40%에 해당한다"며 "너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인도 5000억 달러는 두 나라 사이 교역 확대 목표다. 트럼프 대통령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지난해 2월 발표한 공동성명은 "2030년까지 양자 교역을 5000억 달러 이상으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이는 인도 기업이 미국에 더 많이 수출하는 것도 포함하므로 인도의 대미 투자가 아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리처드 로소 인도·신흥아시아 경제 담당은 "5000억 달러를 투자 차트에 포함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1조 달러→5500억 달러…한국은 협상 난항
백악관은 일본에서 1조 달러를 투자받는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만큼 새로 투자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총리는 지난해 2월 트럼프 대통령에게 일본 기업들이 미국 투자 수준을 기존 8000억 달러(약 1140조 원) 이상에서 1조 달러로 끌어올리겠다고 말했다. 일본은 지난해 7월 트럼프 임기 말인 2029년 초까지 5500억 달러(약 780조 원)를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브루킹스연구소 미레야 솔리스 아시아정책연구센터장은 일본 최고 무역협상가가 5500억 달러 중 단 1~2%만이 실제 지분 투자이고 나머지는 대출과 대출 보증이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솔리스 센터장은 "많은 일본 기업들이 지켜보는 태도"라며 백악관이 제시한 1조 달러 수치는 "극도로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의 경우 백악관은 4500억 달러를 명시했지만, 한국이 실제 약속한 금액은 3500억 달러(약 500조 원)이며 이마저도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 백악관 4500억 달러에는 한국이 트럼프 임기 중 미국 에너지 제품 1000억 달러를 구매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됐다. 하지만 1000억 달러(약 143조 원)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총액을 1000억 달러로 늘리는 것, 즉 연간 약 250억 달러(약 35조 원)로 2024년 190억 달러(약 27조 원) 이상에서 차츰 늘리는 수준이다.
3500억 달러 투자도 구체적인 내용이 확정되지 않았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의 지난해 8월 회동 뒤 "미국이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몇 가지 요구를 추가했다"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한국은 '국영 금융기관 대출과 보증'을 대거 쓰려 하는 반면, 미국은 직접 현금 투자 비율을 높이고 프로젝트 선정에 관한 통제권을 원한다.
CSIS 빅터 차 한국 담당은 곧 발표할 논문에서 약속된 3500억 달러 투자 펀드가 "위기를 맞았다"고 썼다. 그는 지난해 9월 조지아주 한 공장에서 현대와 LG 소속 한국인 노동자 수백 명이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 단속에 걸린 사건과 돈 문제를 원인으로 꼽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9월 현재 미국 이민정책이 한국 기업들을 "미국 직접 투자에 매우 주저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 공약도 통상 지출 포함 의혹
백악관 목록에는 애플 6000억 달러, 엔비디아 인공지능(AI) 지출 5000억 달러, 소프트뱅크·오픈AI·오라클 AI 공동 사업 5000억 달러 등 기업 투자 공약도 포함됐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들 수치가 통상 지출과 이미 승인된 투자를 포함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DA데이비슨 길 루리아 기술연구 책임자는 "애플과 엔비디아 같은 최대 기업들조차 합리한 기간 안에 5000억 달러를 추가로 쓰겠다고 현실에서 약속할 수 없다"며 "이들 수치에는 미국 안 현재 지출과 협력업체, 파트너, 고객의 예상 지출이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가벨리 투자회사 존 벨튼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애플 발표를 두고 "6000억 달러는 수년에 걸쳐 나뉘며 시설부터 인력, 투입 비용까지 여러 영역을 포함하는데, 이 대부분은 이미 애플 장기 재무 계획에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애플이 2021년 5년간 4300억 달러(약 616조 원) 계획을 발표한 것을 보면 이 규모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