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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호의 미술 에세이 ⑩ 추상표현주의는 극복의 과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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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호의 미술 에세이 ⑩ 추상표현주의는 극복의 과제인가?

관조음. 바람은 소리를 들어 올리고. 2026이미지 확대보기
관조음. 바람은 소리를 들어 올리고. 2026
미술사가들은 흔히 추상표현주의를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충격에서 잉태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성과 논리로 쌓아 올린 문명이 야만으로 무너져 내린 뒤, 무의식과 자동기술이라는 반이성적인 해방구를 찾아낸 위대한 결과물이라 칭송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탄생의 이면을 가만히 들춰보면 무척이나 서늘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추상표현주의의 거대한 물결은, 실상 자유 진영의 예술이 공산주의 체제보다 얼마나 우월하고 자유로운가를 과시하려 했던 미국 정부의 치밀한 체제 홍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퇴폐와 파괴마저 넉넉히 허용되는 그 무한한 자유의 캔버스야말로 자본주의의 승리를 선전하기에 가장 완벽한 도구였습니다. 그렇게 잭슨 폴록이라는 지극히 미국적인 사내는 하루아침에 이 낯선 사조의 창시자이자 메시아로 떠받들어졌습니다.

오늘날 숱한 화가들이 폴록과 마크 로스코가 세워둔 그 거대한 깃발 아래 모여 붓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캔버스 위에 물감을 흩뿌리는 수많은 그림들이 추상표현주의라는 안락한 영토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추상표현주의를 표방한다 할지라도, 작가들의 화폭은 엄밀하게 감별되어야 합니다.

추상표현주의란 본디 '추상'이라는 텅 빈 형식 위에 '표현'이라는 뜨거운 감성을 얹어내는 일입니다. 잭슨 폴록이나 조안 미첼의 그림을 보십시오. 그들이 캔버스 앞에서 무엇을 울부짖으려 했든, 화면은 결국 완전한 추상으로 수렴되어 끝을 맺습니다. 우리는 그저 눈앞에 던져진 그 폭발적인 최종 이미지를 바라보며 '표현'이라 부를 뿐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붓을 들고 물감을 던지는 모든 화가를 추상표현주의자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그 범주 안에서 맴도는 작가라 할지라도, 그가 품고 있는 뚜렷한 주제나 소재의 구상성에 따라 뼈아픈 '표현주의' 화가로 분류하는 것이 마땅할지도 모릅니다.

무의식과 자동기술법이 빚어낸 우연한 흔적들로 화면의 얄팍한 완결성만 갖추면 끝나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거기엔 그럴싸한 개념이나 개인적, 집단적 구호 하나만 덧칠해 주면 그만입니다. 그 자체로 대중을 설득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기에, 작가는 살을 깎는 고뇌 없이 남들과 조금 달라 보이는 포장지만 씌워 손쉽게 작품을 완성해 냅니다.

관조음. 소망은 소리의 뒤편에서 올라오는 그림자. 2026이미지 확대보기
관조음. 소망은 소리의 뒤편에서 올라오는 그림자. 2026
우명성을 위한 탈리스만. 2026이미지 확대보기
우명성을 위한 탈리스만. 2026

하지만 구상적인 주제, 즉 대상을 품고 붓을 든 진짜 표현주의 화가들이나, 형체 없는 추상의 공간 위에 묵직한 구상적 표현을 억지로 융합하려는 화가들의 길은 지옥처럼 험난합니다.

대상의 숨통을 끊어내고 형태를 일그러뜨리는 데포르마시옹(Déformation)의 고통을, 텅 빈 추상적 배경과 한 화면 속에서 타협시킨다는 것은 태생적으로 지독한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뿜어내려는 주제의 무게와 화폭 자체의 무게가 팽팽하게 맞설 때 화가는 살이 찢기는 고통을 앓으며, 그 싸움을 뚫고 타인의 영혼을 베어낼 만큼 서늘한 그림을 빚어내기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 처절한 고통을 피하고자, 오늘날 얼마나 많은 화가들이 구상의 무거운 짐을 내던지고 도망쳤습니까. 그들은 얄팍한 '개념'이라는 허울 좋은 방패 뒤에 숨어, 아주 간단한 손길 한 번으로 작품을 완성하거나 패턴화된 무늬를 찍어내는 안전한 기계가 되기를 자처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뼈아프게도, 이 비겁하고 영혼 없는 도피의 사조는 유럽의 화단보다 서구사대주의가 강하게 주류를 이루었던 한국 미술계에서 훨씬 더 짙고 노골적으로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추상이 먼저인지, 구상이 먼저인지 다투던 시대의 낡은 난제는 머지않아 인공지능(AI)의 차가운 연산이 허무하게 끝을 맺어줄 것입니다. 화면을 보기 좋게 구성하고 완결 짓는 일은 애초에 피 끓는 회화의 영토가 아니라 계산된 디자인의 영역임이 이미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그 껍데기들이 여전히 예술의 이름으로 숨을 쉬는 것은, 오직 탐욕스러운 미술 시장의 유통망이 그것을 상품으로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회화, 뼛속까지 새로운 미술이 절실합니다.

강대국 미국의 정치적 계산이 만들어낸 낡고 거대한 사조의 꼬리를 좇을 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중국미술처럼 사실주의에. 기초한 실험적. 미술들이 답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미술은, 표현을 배려로 생각하는 우리 전통은 추사 김정희에 이르러서는 문자의 예술적 도모를 이루었고 겸제에 이르러 한국적 표현주의의 위대함을 보여주면서 추상주의의 무책임함과 사실주의의 협소한 세계관의 배경이 된 이데올레기의 시녀로서가 아닌, 소수의 집권층의 고급 향유문화가 아닌, 좀 더 대중친화적인. 미술로 자리잡기를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수천 년을 묵묵히 버려온 우리의 아름답고 깊은 정신적 가치관을 무기 삼아, 비록 캔버스의 크기는 작을지언정 또한 쏟아붓는 대량의 물감과 과도한 제스츄어 없이도 세상을 향해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그 매섭고도 힘 있는 우리만의 붓질을 화폭 위에 토해내야 할 때입니다.

한명호(서양화가)이미지 확대보기
한명호(서양화가)

글쓴이/ 한명호(1957년생)/ 홍익대 서양화과 및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박영덕화랑. 박여숙화랑. 현대아트갤러리. 갤러리Q, 부산화랑 등 다수), 단체전 및 국제전(화랑미술제-현대화랑, 북경아트페어-아트사이드갤러리 등), 최우수예술가상 미술부문 수상(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저서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화가’ 등 다수


한명호 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