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데스크 칼럼] ‘구멍 난 독’에 장 담그라는 의결권 자문사들...국민연금, '침묵은 금' 아니다

글로벌이코노믹

[데스크 칼럼] ‘구멍 난 독’에 장 담그라는 의결권 자문사들...국민연금, '침묵은 금' 아니다


글로벌이코노믹 정준범 증권부장이미지 확대보기
글로벌이코노믹 정준범 증권부장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체질을 바꾸겠다는 ‘거버넌스 개혁’의 도도한 흐름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최근 국내외 일부 의결권 자문사가 내놓은 고려아연 주총 안건 보고서 이야기다. 보고서의 논리는 기이하다. 현 경영진에 대해 ‘거버넌스 우려가 존재한다’고 명시하면서도, 정작 결론은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며 찬성표를 던지라고 권고했다.

비유하자면 이런 식이다. “택시 기사가 술을 마셨고 면허도 없다는 사실은 확인했지만, 지금 차를 세우면 목적지에 늦게 도착할 수 있으니 일단 목적지까지 운전대를 맡기는 것이 승객에게 이롭다”는 논리다. 사고가 나면 차도 승객도 끝장이라는 상식은 ‘경영 안정성’이라는 모호한 단어 아래 묻혔다. 실제로 세계 최대 자문사인 ISS조차 특정 인사의 연임에는 반대하면서도 경영 체제 유지에는 찬성하는 자기모순을 드러냈다. 지배구조의 기둥에 균열이 가고 있는데 층수를 더 올리는 것이 장기 기업가치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누가 납득하겠는가.

이러한 의결권 자문사의 스탠스는 시대적 흐름인 기업 거버넌스 개혁 방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현재 정부는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시장의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할 의결권 자문사가 ‘우려는 있지만 일단 그냥 가자’며 구태의연한 현상 유지에 손을 들어준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자본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무너뜨리고 외인 투자자들에게 한국 시장에 대한 불신만 심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제 시선은 19일 열리는 국민연금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수책위)로 향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800조 원이 넘는 자산을 운용하며 국민의 노후 자산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특히 지난 2월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 사전 공개 범위를 확대하고 수탁자 책임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국민연금이 자문사의 모순된 보고서를 면피용 방패로 삼지 말고, 수탁자로서 진정한 ‘의무’를 다 해야 함을 의미한다.

일각에서는 사모펀드(PEF)의 진입을 두고 단기 수익 추구를 우려하는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현장에서 지켜본 기자로서 자본시장의 메커니즘은 다르다. 거버넌스가 무너진 기업은 사모펀드가 아니더라도 결국 시장의 외면을 받기 마련이다. 오히려 철저한 수익률 제고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의 감시 기능이 망가진 지배구조를 바로잡는 강력한 시장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 ‘무면허 운전’을 방치하는 것이 안정이라고 믿는 폐쇄적 지배구조 아래서는 선진화된 자본주의는 요원한 꿈일 뿐이다.

국민연금 수책위에 묻고 싶다. 거버넌스가 오염된 ‘안정’이 과연 국민의 노후를 책임질 실현 가능한 가치인가. 자문사의 기계적 권고 뒤에 숨지 말고, 실질적인 주주 가치와 거버넌스 원칙을 세워야 한다. 이번 결정은 향후 한국 자본시장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벗어나 진정한 선진 시장으로 도약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국민의 눈이 수책위의 입을 주목하고 있다.


정준범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jb@g-enews.com

[알림] 본 기사는 투자판단의 참고용이며, 이를 근거로 한 투자손실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