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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대의 약밥상(48)]배추 씻은 물도 잘만 쓰면 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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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대의 약밥상(48)]배추 씻은 물도 잘만 쓰면 약이 된다

[글로벌이코노믹=정경대 한국의명학회장] 옛날 벼슬도 못한 가난한 선비가 있었다. 가세가 기울어 끼니를 잇지 못한 그는 부잣집 사랑방 신세나 지면서 살아야 하는 처량한 처지였다. 그렇다고 한 집에서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의탁할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에 한 부잣집에서 하루를 묵는데 그 집 주인이 선비가 얄미웠던지 방에 불을 넣어주지 않아 그만 지독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선비는 그 집에서 나와 또 다른 집을 찾아 정처 없이 길을 걷는데 간밤에 걸린 감기 때문에 사지에 힘이 빠지고 뼈골이 다 쑤시고 아파서 도무지 운신조차 하기 어려웠다. 얻어먹는 처지에 약을 사먹을 형편도 못되는 그는 산속에 있는 한 마을을 향해 겨우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때 몸에서는 열이 펄펄 나고 정신도 몽롱한데 갈증이 얼마나 심했던지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마침 우물가에 여인들이 모여 배추를 씻고 있었다. 선비는 갈증만 면해도 살 것 같아 급히 우물가로 가 한 여인에게 물 한 바가지를 부탁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병색이 짙은 선비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대뜸 배추를 씻은 누렇게 변한 물을 눈 질금 감고 다 마시라며 한 바가지 퍼서 내밀었다.

이에 선비는 그 여인의 고약한 심보에 화가 났으나 갈증이 심해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어 주는 대로 벌컥벌컥 다 마시고는 여인에게 말했다.

“그 인심 한 번 고약하오!”

언성을 좀 높여서 말한 선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말이 뜻밖이었다.

“여보시오 선비양반 죽는 사람 살려주었더니 웬 욕설이요?”

여인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선비가 딱해서인지 머물 데가 없으면 안동네 최 부잣집 사랑방에 가서 쉬라 하고는 그 집은 인심이 후하니 불을 넉넉하게 지펴 달라 부탁하고 배추 물 한 바가지만 더 달래서 마시라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인은 최 부잣집에서 일하는 아낙이었다.
그런데 그 여인의 말이 이상해서 시키는 대로 배추 물 한 바가지 더 마시고 자고났더니 글쎄 죽을 것 같던 감기가 씻은 듯이 나아있었다. 그 일이 계기가 돼 후일 선비는 의술을 공부해 훌륭한 의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밥상 위의 반찬이 모두 약재라는 사실을 대변해준다. 선비가 먹고 나았다는 배추 물은 폐에 좋은 약물이다. 배추 중에서도 양배추는 위장병에 그저 그만이고 두통 기관지염 관절염 황달에도 좋다.

이처럼 배추 씻은 물도 구정물이 아니라 쓰임새에 따라서 약이 되기도 하는데 하물며 다른 반찬이야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늘 공기와 물을 마시고 살면서도 공기와 물의 귀함을 모르듯이 밥상 위에 오르는 반찬을 늘 보다 보니 그것들이 귀한 약인 줄을 모른다. 길경 사삼 대맥 총백 하는 식으로 식품을 한자어로 말하면 그것이 귀한 한약재인 줄 알지만 길경은 도라지고 사삼은 더덕이며 대맥은 보리이고 총백은 대파 하얀 부분이다. 모두 약탕기에 넣어 달여 마시는 폐질환에 좋은 약재들이다.

그 뿐이 아니다. 배추를 전초, 보리를 대맥, 짬깨는 호마, 들깨는 엄자, 참미역은 진곽, 우엉은 우방, 뽕나무가지는 상지, 속 피는 상백피, 잎은 상엽 등등이 모두 한자어로 부르는 한약재이다. 그러니까 밥상 위의 반찬을 넣으면 한약이고, 한약재를 조리해서 밥상 위에 올리면 반찬이 되는 것이다. 한약재는 비단 초목뿐이 아니다. 흙 수은 돌 재 금은도 약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천하에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약이라 생각하면 된다. 다만 체질에 맞는가, 안 맞는가가 문제일 뿐이다. 체질에 맞으면 독약도 약이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천하에 명약이라 소문난 산삼도 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밥상 위의 반찬들은 충분히 씹어야 약이 된다. 입에 맞거나 혹은 맞지 않아서 적당히 꿀꺽 끌꺽 삼켜서는 약성이 흡수되지 못하고 대부분이 배설되고 만다. 음식 맛이란 오래 씹어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모든 음식은 그 음식만의 독특한 맛이 있다. 진정한 미식가는 그것이 쓰든 달든 그 음식만이 가진 독특한 맛을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다. 무엇 무엇을 좋아해서 찾아 먹는 사람을 미식가 혹은 식도락가라고들 하지만 그런 사람은 편식 가이지 진정한 미식가는 아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무심코 먹던 밥상 위의 반찬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한약재임을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콩나물 한 접시 쓴 냉이 국 한 그릇도 귀하게 생각될 것이다. 귀한 것도 예사롭게 보면 예사로운 것이고, 예사로운 것도 귀하게 보면 귀하게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흔히 먹는 반찬 하나하나의 성질과 약성을 기술한다.

/정경대 한국의명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