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대한제국 말기 집집마다 초상 사진을 걸어둔 까닭

공유
0

대한제국 말기 집집마다 초상 사진을 걸어둔 까닭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2565)]

[글로벌이코노믹=김영조 문화전문기자] ≪고종실록≫ 33권, 32년(1895) 11월 15일에 고종은 “짐(朕)이 머리를 깎아 신하와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니 너희들 대중은 짐의 뜻을 잘 새겨서 만국(萬國)과 대등할 수 있도록 하라.”며 단발령을 내립니다. 단발령을 내리는 까닭을 조정은 단발을 함으로써 만국과 동등해질 수 있고, 위생적이며 활동적임을 내세웁니다만 온 나라는 들끓습니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곧 “몸과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를 금과옥조로 삼았던 백성은 머리카락 자르는 것을 불효로 보았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단발령이후양반들은상투를자르기전사진을찍어두었다./그림=이무성한국화가
▲단발령이후양반들은상투를자르기전사진을찍어두었다./그림=이무성한국화가
그래서 백성은 단발령을 완강히 거부했고, 이에 순검들은 길거리에서 상투를 마구 자르거나 민가에 들어가 강제로 머리를 깎기도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심지어 16살의 어린 신부는 남편이 머리 자르고 양복을 입고 집에 들어오자 자결까지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단발령을 거부할 수 없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자르는 대신 머리 자르기 전 초상 사진을 찍거나 초상화를 그려 안방 벽이나 출입문 위에 소중히 걸어놓는 것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초상사진을 찍어두는 것은 길었던 머리털을 사진으로 찍어 남겨두려는 뜻도 있지만 일부는 머리털을 자르면 양반과 백성의 차별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상투를 튼 양반이었음을 증명하려 했던 몸부림이기도 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