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독재가 낫다?"…네팔은 왕에게, 유럽은 극우에게 기댄다
가짜뉴스·혐오 판치는 SNS…플라톤의 경고 "과도한 자유가 독재를 부른다"
가짜뉴스·혐오 판치는 SNS…플라톤의 경고 "과도한 자유가 독재를 부른다"

스웨덴의 독립 조사기관 V-Dem 연구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 세계 시민의 민주주의 수준은 1985년으로 되돌아갔다. 권위주의 진영에 속한 국가·지역은 91개로 민주주의 진영(88개)을 웃돌았고, 세계 인구의 72%가 권위주의 체제 아래 살고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체제가 됐다.
이런 흐름의 중심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실망과 강권 정치를 향한 기대가 자리 잡고 있다.
◇ "왕이여, 오셔서 나라를 구하소서"…왕정 복고 외치는 네팔
지난 5월 29일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왕이여, 오셔서 나라를 구하소서"라는 구호를 외쳤다. 왕의 비호를 상징하는 검은 우산을 펼쳐 든 이들은 2008년 폐지된 왕정의 복고를 요구하고 있다.
2008년 연방 공화제로 전환한 이후 네팔은 십여 차례나 정권이 바뀌는 극심한 정치 불안에 시달렸다. 여기에 만연한 부패와 경제 침체는 국민의 불신을 키우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 왕정 복고 운동 지도자 카말 타파 씨는 "왕정 시대에는 나라가 하나로 뭉쳐 있었다"며 "외국 사상이 강요돼 사회가 불안정해졌다"고 열변을 토했다.
시위에 참여한 아카시 슈레스타(28) 씨는 "정치는 부패했고 경제도 성장하지 않는다. 왕정으로 돌아가면 안정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국왕만세'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소셜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퍼지고 있다.
◇ 네팔에서 유럽까지…전 세계로 번지는 불신
기존 통치 시스템을 불신하고 강권 정치를 기대하는 현상은 네팔만의 일이 아니다.
지난 5월 치러진 영국 잉글랜드 지방선거에서는 이민 동결과 감세를 내세운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 '리폼 UK(개혁당)'가 압승했다. 리폼 UK의 패라지 당수는 "노동당과 보수당은 약속을 어기며 민주주의 신뢰를 무너뜨렸다"고 주장해 대중의 불만을 파고들었다.
지난 6월 1일 치러진 폴란드 대선에서는 '폴란드 퍼스트'를 내건 나브로츠키 씨가 승리했다. 그는 반이민·반EU, 동성결혼 반대를 공공연히 외치며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모두가 믿지 않기 때문에 트럼프와 비슷한 사람들이 선출되는 것"이라고 한탄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권위주의 부상 배경으로 ▲기존 민주주의 시스템의 정치적 무능과 부패 ▲성장 정체와 빈부격차에 따른 경제적 불안 ▲세계화와 이민 문제로 인한 사회 불안감 등을 꼽는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선언했던 '역사의 종말', 즉 자유민주주의의 최종 승리라는 예언이 30여 년 만에 완전히 뒤집혔다는 평가가 나온다.
◇ 2400년 전의 경고, '참주'의 시대 오나
이런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미 2400년 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예견했다. 플라톤은 저서 '국가'에서 민주정이 선동 정치가에 휘둘리는 중우정치(衆愚政治, 어리석은 대중이 이끄는 정치)로 타락하고, 힘으로 대중을 억압하는 참주의 지배로 끝날 것이라고 설파했다. 그는 "지나친 자유를 향한 갈망이 오히려 극단적 예속을 낳는다"고 경고했다.
와세다대학의 도요나가 이쿠코 교수는 "지나친 '뭐든지 가능한' 자유주의가 그 결과로 현대의 참주(僭主, 고대 그리스의 정치 용어에서 유래한 말로, 단순히 나쁜 군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한 통치자'를 의미)와 예비군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SNS로 퍼지는 선동과 허위정보, 혐오와 차별의 확산은 플라톤의 우려가 현실이 됐음을 보여준다.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허용되는 자유'가 아닌 '책임 있는 자유'를 실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6월 14일 트럼프 대통령의 생일에 맞춰 워싱턴에서 미 육군 창설 250주년 기념 퍼레이드가 열렸다. 군이 특정 지도자를 축복하는 듯한 이 행사에 미국 전역에서는 'NO KINGS(왕은 필요 없다)'라는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트럼프는 반대자들을 "애국자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민주주의가 키워온 가치들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파괴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 '왕이냐 민주주의냐'…네팔의 딜레마
다시 네팔로 돌아가 보면, 정치 불안과 부패는 심각한 청년 유출 문제로 이어진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2023년 네팔의 해외 출국 노동자는 49만 명으로 2019년보다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이들이 보내오는 송금액은 네팔 GDP의 4분의 1에 이른다. 호텔 직원 마니샤(22) 씨는 "왕이 필요한지가 문제가 아니다.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정치가 안정돼 좋은 산업과 회사를 키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왕정 복고 지지자들은 "국왕은 우리의 자부심이자 역사"라며 안정된 통치를 내세운다. 이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과거의 전제군주제가 아닌,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입헌군주제이며, 힌두교 국가로 돌아가 종교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다.
하지만 과거 왕정이 독재와 민주주의 탄압으로 폐지된 경험 때문에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네팔 정치 연구가인 바스카르 고탐 박사는 "왕정 복고는 일시적인 흥분"이라고 평가했고, 저널리스트 프라나야 라나 씨는 "과거 입헌군주제에서 왕이 권력을 빼앗았던 위험을 이미 경험했다"며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네팔의 고질적인 정치 불안은 제도적 딜레마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소수민족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비례대표제와 소선거구제를 섞었지만, 이 제도가 오히려 군소정당의 난립을 불러와 잦은 연립과 정권 교체로 이어지는 역설을 낳았다.
여당 역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집권 통일공산당(UML)의 우샤 키란 팀시나 중앙위원은 "시스템이 아닌 사람의 문제"라며 "당의 민주화, 정치의 투명성 향상, 책임의 명확화가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일본에서 행정학을 공부한 수리야 프라사드 파타크 전 의원 역시 "민주주의를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네팔의 혼란은 100개가 넘는 민족이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에서 민의가 흩어지기 쉬운 선거 제도 탓도 있지만, 근본 원인은 정치 시스템에 대한 '국민 신뢰'의 붕괴에 있다.
기존 정당 불신, 통치 기구 부패, SNS를 통한 허위정보 확산 등 네팔이 겪는 문제는 오늘날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가 공통으로 마주한 과제다. 민주주의의 성숙에 지름길은 없다. 투명성 높이기, 책임 정치 구현,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 당연한 전제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세계는 플라톤이 예언한 '폭군'의 시대로 향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개선하고 지켜내야 할 가치에 가깝다. 세계가 폭군의 시대로 향할지, 아니면 플라톤의 예언을 극복하고 더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갈지는 우리 각자가 어떤 시민이 되느냐에 달려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